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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상대반 (挽裳對飯)/간통죄

만상대반 (挽裳對飯)

'일성록(日省錄)'
정조 17년 11월 25일 조에 인용된 영조의 수교(受敎)는 이렇다.
 "다른 사람과 치마를 당기거나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挽裳對飯)
그 남편이 보고서 분을 내어 혹 화가 나서 잘못 죽였을 경우는 모두 가벼운 형률에 따르도록 하라."

외간 남자가 아내의 치마꼬리를 끌어당기거나 밥상을 마주하고 밥을 먹고.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남편이 격분해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인다.
마주 앉아 밥 먹는다는 뜻의 만상대반(挽裳對飯)은 당시에 간통의 의미로 쓰던 말이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이미 선을 넘은 허물없는 남녀 사이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일종의 완곡 어법인 셈이다.
찔러 죽여도 살인죄로 기소하지 말고 가벼운 처벌에 그치라는 지시를 내린 내용이다.
이때 치마를 당기고
살인을 해도 가벼운 처벌에 그치라는 왕의 지침은
국가에서 혼외 성관계에 대한 처벌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통제가 안 될 정도였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1785년 9월 평안도 철산 사람 서돌남은 아내 이씨가 김승추와 간통하자 둘을 붙잡은 후
아내의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김승추의 머리통을 내려쳐서 죽였다. 정
조는 살인한 서돌남의 석방을 명령했다.
아내 이씨의 간통 자백이 근거였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 일일이 예거하기 힘들다.

1797년에는 경상도 함창 사람 최우룡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신의 제수(弟嫂) 유씨를 희롱하며
몸을 더듬던 김흥재를 발로 차서 죽였다.
부부 사이의 일이 아니고 간통이 아님에도 정조는 최우룡의 감형을 명했다.
이 같은 잇단 판결은 당시 백성에게 간통죄 또는 성희롱 죄가 살인죄에 우선한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주었을 법하다.

간통죄가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62년 만에 폐지되었다.
간통죄가 부부 사이 정조 의무의 상징적 보루로 여겨졌던 만큼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은 듯하다.
다분히 수사학적 표현이긴 해도 밥을 같이 먹었다고 살인마저 용서되던 세상에서 자유와 자율의 성숙한 사회로 옮겨가는 전이를 보는 듯해서 금석(今昔)의감회가새롭다.
정말 간통죄는 무의미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