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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성의 영화 같은 탈북기, 들어 보실래요

평양통일예술단 방분옥 대표가 들려주는 탈북이야기
탈북여성 12명이 만들어가는 '평양통일예술단(www.ptart.co.kr)'이 안성에 있다. 예술단 대표 방분옥씨를 지난 7월 31일 안성사무실(안성종합운동장 수영장 2층)에서 만났다. 그녀가 털어놓은 한 편의 영화 같은 탈북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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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분옥대표 안성사무실에서 무대 공연복을 매만지다 환하게 웃는 방분옥 대표. 그녀는 2004년도에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들어온 탈북여성이다. 그녀는 북한주민과 한국을 위해서 예술공연쪽으로 길을 선택했다.
ⓒ 송상호


북한과 달리 한국은 지상낙원이었다

2004년도, 한국 공항에 내리면서 그녀는 두 가지에 놀랐다. 휘황찬란한 거리의 불빛과 고급  승용차들이 거리에 즐비한 것. 북한에선 간부급 사람들이나 몰고 다니는 차량들이 지천에 늘려 있는 것과 그 차들이 모두 대한민국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차라는 것이라니. 

북한에선 출신성분이 중요하다. 그녀는 노동자 집안 출신이었다. 다행히 예술전문학교를 나와 노래, 악기, 무용 등을 배웠다. 북한에서 결혼을 했다. 노동자집안인 그녀와  간부집안인 남편이었다. 집안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한동안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서로 열심히 해서 그럭저럭 살만할 때,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그 후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고, 1996년~2000년도 사이에 북한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거리에 나가면 굶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다. 사람들은 그냥 산에 구덩이를 파고 마구잡이로 시체를 묻었다. 그녀는 눈앞에서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이때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중국을 넘어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 북한주민들은  사상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죽지 않으려고 도강(압록강과 두만강)을 해 중국을 넘나들었다. 이걸 안 북한정부에선 잡히면 총살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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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1 평양통일예술단 단원이 공연을 하고 있다. 단체에서 원하면 초청하여 공연할 수 있다.
ⓒ 송상호


남편 사망 후 국경 넘다 붙잡혀...

그녀와 그녀 가족은 죽어도 국경을 넘을 생각은 없었다.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가족의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풀뿌리를 캐러 산으로 떠났던 남편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남편의 죽음보다 '자녀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생각하며 아파할 새도 없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그녀는 자녀 둘(딸과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넘기로 했다. 자녀들의 손을 꼭 잡고 두만강을 건넜다. 절대로 손을 놓지 않으려고 꼭 잡은 손 덕분에 아이들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다행히 중국 국경 쪽으로 흘러들었다. 

아이들을 풀숲에 숨겨 놓고, 중국현지 사정을 살피러 떠났다가 그녀가 중국경비대에 붙들렸다. 아이들과 헤어졌다. 그녀는 북송되었다. 노동단련대에 수용되어 징역을 살았다. 다행히 두 달 만에 풀려나 친척집에 가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왔다. "당신의 아들이 대한민국에서 당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처음엔 함정인가 하여 만나지 않다가,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다'는 각오로 그를 만났다. 중국인인 그를 통해 아들이 대한민국에 있고, 아들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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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희 단장 평양통일예술단 리플렛 표지 모델이 조은희 단장이며, 북한에서 최승희 선생으로부터 고전무용을 사사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탈북해서 단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 송상호


두 번 국경을 넘어 큰딸을 한국에서 만나 게 된  사연

이렇게 그녀는 또 한 번 국경을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4년도에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 알고 보니 아들은 중국에서 한국 사람의 도움으로 한국에 입국했고, 탈북정착금을 가지고 어머니를 찾는데 사용했던 게다. 

그러면 같이 탈북했던 딸은 어떻게 됐을까. 그녀와 아들이 수소문을 해 찾아냈다. 중국 현지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딸도 한국으로 데려왔다. 목숨을 걸고 탈출했던 가족이 대한민국에서 만나 함께 사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북한에 살 때, 떨어져 살던 큰딸의 이야기가 남았다. 그녀에겐 슬하에 1남2녀의 자녀가 있었다. 그럼 그 큰딸은 어떻게 됐을까. 

한국에 와서 알았다. 큰딸이 이미 1998년도에 한국에 와 있었다는 걸. 북한에서 배우였던 큰딸은 진작부터 가족과 떨어져 국제적으로 공연을 다녔다. 일본으로 공연을 떠난 큰딸은 공연이 끝나고 몰래 한국으로 망명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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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2 평양통일예술단 여성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 송상호


"나는 운이 좋아 가족을 모두 만났지만..."

"나는 운이 좋아서 모든 가족이 자유대한에 와 있다. 사실 행복하다는 말을 대놓고 하지 못한다. 아직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탈북동료들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이 고통당하는 뉴스를 접하면 괜히 마음이 죄스럽고 미안해진다."

이렇게 말하는 그녀는 오늘도 평양통일예술단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길만이 대한민국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일이고, 북한에서 고생하는 북한주민들을 위해 통일을 준비하는 길이고, 탈북자가 한국에서 잘 산다는 긍지를 심어주는 길이라 믿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기적처럼 만든 이 행복을 혼자서 누리지 않고, 탈북자들의 위상정립을 위해 뛰겠다는 것이다. 한국 땅에서 잘살아낸 후 훗날 통일이 되면 북한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대한민국의 실상을 경험자로서 알려주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이런 그녀는 평양통일예술단 활동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각종 국내공연, 미국초청공연 등을 하고 있고, 안성 남사당상설공연장에서 주말마다 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단체에서 불러주면 초청공연도 가능하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녀는 더운 여름 날씨를 핑계대지 않고, 예술단을 위해 또 길을 떠났다.


방분옥 평양통일예술단 대표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선구자의 사명”



남과 북의 문화를 춤과 노래로 잇고, 탈북자에 직업의 기회 제공

탈북자들로 구성된 예술단체인 평양통일예술단 방분옥(59, 여) 대표를 만나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 생사의 경계선을 넘어온 탈북 이야기를 들었다. 

방 대표는 평양통일예술단 이름에 대해 “평양은 ‘북한’을 의미하고 통일은 ‘남과 북의 문화’를 하나로 만들자는 의미가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평양통일예술단은 북한에서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던 10명의 여성으로 구성됐다. 고향을 떠나 자유를 찾아 경계선을 넘었다. 예술단은 문화의 차이점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북한체제에서 신음하는 탈북자에게 희망을 주는 통일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어 방 대표는 어깨가 무겁다. 

그는 “한국에는 2만 6000여명의 북한 탈북민이 입국한 내용이 통계로 나왔다”며 “언젠가 는 통일이 되겠지만, 남한과 북한이 사상이념이 다르다. 그래서 탈북한 사람이 남한에서 잘 정착해서 살고 있으면 통일의 선구자가 역할을 감당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방 대표는 양강도 예술전문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노동당에서 운영하는 광산연합 예술선전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999년 고난의 행군 때 남편을 잃고 탈북했다.

다음은 방 대표와의 일문일답. 
Q. 탈북하기로 마음먹은 계기는. 
북한에서 2003년 10월 탈북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통해 2004년 1월 대한민국 도착했다. 탈북한 지 10년 됐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라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이 도강(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건너 살았다. 그때 산이나 들에 나가 풀뿌리 나무뿌리 다 캐 먹어도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노동자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아이들을 살려야 하겠다는 엄마의 강한 의지가 생겼다. 그때 탈북을 결심한 계기가 됐다. 그래서 경계선을 넘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통해 2004년 1월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됐다. 

Q. 남과 북의 문화를 잇는 평양통일예술단인데.  
남과 북은 언어와 문화 경제 차이가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그 격차를 줄이는 것은 예술문화에 답이 있다. 예술단을 통해 남과 북을 노래와 춤으로 잇고 탈북자들에게 직업의 기회라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내 심정이다. 우리 예술단이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선구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만의 전용극장을 가지고 공연을 펼치는 목표가 있다. 또 극장 무대에서 남한과 북한의 공연자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이 바람이다.

Q. 평양통일예술단의 설립 배경과 작품소개를 한다면. 
평양통일예술단은 탈북여성 10명으로 구성됐다. 국내에서 북한의 춤과 노래로 남한과 북한을 잇는 문화예술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우리를 받아주고 일자리를 준 곳이 남한이다. 배려에 감사하다.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사랑 나눔 봉사활동과 탈북민에게 직업의 기회를 통해 꿈을 펼쳐주고자 창단하게 됐다. 

예술단은 2007년 설립해 교회공연을 시작으로 현재는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해 경기도 안성시의 시립공연단과 뜻을 같이해 안성 맞춤랜드서 매주 상설공연을 하고 있다. 한 달 평균 20회 공연을 하는데 3회 이상은 무료 공연을 한다. 특히 소외계층인 장애인 복지시설과 양로원, 교도소를 다니며 무료 봉사공연을 펼치고 있다. 설립 이후 전국을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1500회가 넘는 공연 기록을 돌파했다. 단원들은 무대에서 ‘쟁강 춤’ ‘물동이 춤’ ‘휘파람과 강원도아리랑’ ‘반갑습니다’ 등 북한의 대중가요와 민속춤뿐 아니라 남한의 트로트 등 화려하고 경쾌한 춤과 노래를 선보이고 있다. 

  
▲ 평양통일예술단의 물동이춤 공연 (사진제공: 평양통일예술단)

Q. 예술단을 이끌어 오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 
남과 북의 이질감이 심해서 동일성으로 만든다는 게 너무 어렵다. 또 창단 당시에는 예술단을 몰라 초청하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공연을 가면 가끔은 사람들이 다른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남과 북이 한 동포 한 형제인데 주변의 시선이 안타깝다.

예술단은 공연을 20~30분을 해도 정성을 다한다.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데, ‘우리를 왜 이렇게 생각을 하고 대우하는가?’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다. 교통비 1만원에도 공연에 나설 만큼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단원 중에는 만원이라도 더 주는 일자리가 있으면 예술단을 떠나는 일도 생겼다(눈시울을 붉힘). 

우리 예술단은 개인에게 후원받는 것은 없다. 단원들에게 급여 제날짜에 주고 세월호 때문에 우리가 모두 가슴 아프고 그 유가족들이 얼마나 곤란을 겪었는가. 1년 동안 공연 제대로 못 해도 단원들 급여는 챙겨주고 그랬다. 그래도 제가 대한민국 사람한테 감동한 것이 있다. 남한 사람은 자기 주머니 불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울 때 국민을 위해서 도와준 모습에 깊은 감동을 했다. 안성시에서 우리에게 공연을 함께하도록 배려해 주고 사무실과 연습장을 도와주고 있다. 받은 것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안성시에는 요양원이 많다. 대한민국이 국민들이 아름다운 모습은 본받아서 우리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Q.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남북 문화예술을 하나로 만드는 선구자 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2010년 방 대표의 딸인 조은희 단장이 입단하면서 조 단장을 중심으로 한 최승희 무용의 대표작인 ‘쟁강춤’과 ‘물동이 춤’ 등의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북한의 최고 예술기관으로 알려진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9년 동안 월북 무용가인 최승희 선생에게 무용을 전수받은 수제자 조은희 단장은 북한에서 직접 무용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승희 5대 창작작품과 대한민국의 현대무용 등 ‘쾌지나칭칭나네’ ‘신고산타령’ 새 작품을 만들고 있다. 조 단장 무용은 한국 고전무용과 달리 박자가 빠르고 관객이 손뼉 치며 호응하는 작품들이 많다.

북한의 기존 의상을 입기보다 의상도 직접 디자인해서 관객이 선호하는 의상을 준비하고 있다. 공연활동을 하면서 노력을 많이 부으면 생각한 대로 되더라. 사람은 생각하면 꿈이 실현되는 것 같다. 앞으로 우리만의 전용극장에서 춤과 노래로 관객과 의사소통하는 예술인으로 자립하며 꿈을 펼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