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ner 1

독립운동가들


경성형무소.jpg
경성 형무소


 
광복군발족1940 중일전쟁으로 창설.jpg
광복군발족1940 중일전쟁으로 창설


 
광복군총사령부.jpg
광복군 총사령부
황학수 , 이범석 과 대원들

 <<황학수>>
본관 창원(昌原). 호 몽호(夢呼). 충북 제천(堤川) 출생.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육군참위(參尉)로 복무하였다. 3 ·1운동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을 지냈으며, 그 후 둥베이[東北]지방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참모장으로 활약하였고 1921년 한국독립단의 중앙집행위원 ·군사령(軍司令)을 역임하고 1927년 둥베이의 교포자치단체를 통합하여 군민회의(軍民會議)를 결성할 때 군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임시정부 군사위원, 조선 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내고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시안[西安]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1941년 그 의용군을 토대로 광복군을 조직, 사령관 대리로서 항일전을 진두지휘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생계부장(生計部長)을 역임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범석>>
서울 출생.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중국으로 망명,1919년 윈난[雲南]에 있는 중국육군강무학교(中國陸軍講武學校) 기병과(騎兵科)를 졸업하고 둥베이[東北:만주]로 진출하였다. 1920년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참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22년 소련합동민족군 연해주지구 지휘관으로 소련 혁명전(革命戰)에 참가하였고, 1933년 중국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장교대장, 1936년 중국 제3로군 사령관, 1940년 중국 중앙훈련단 중대장을 지냈다.
1941년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고, 1945년 광복군 중장으로 8월 귀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였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에 기용되고 국방장관을 겸임하였다. 1950년 주중(駐中)대사, 1952년 자유당 부(副)당수 및 내무장관 등을 지냈으며, 그 해 8월과 1956년 2차례 부통령(副統領)에 입후보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1960년 충남에서 자유연맹(自由聯盟) 소속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고, 1963년 ‘국민의 당’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저서로 회고록 《우등불》이 있다.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광복군훈련1940.jpg
광복군훈련1940


 
교수신분으로 항일운동하다 검거.jpg
교수신분으로 항일운동하다 검거


 
김천소년형무소.jpg
김천소년형무소


 
대구형무소.jpg
대구형무소


 
대한부인구제회1919.jpg
대한부인구제회1919


 
독립군교육.jpg
독립군 교육    1941년3,4월
중국 교관으로부터 전투 사항을 듣고 있는 항일 투사들

 
독립협회행사.jpg
독립협회행사


 
동대문경찰서.jpg
동대문 경찰서


 
만주국경검문 북간도.jpg
만주국경검문 북간도


 
미국의 독립협회동지.jpg
미국의 독립협회동지


 
서대문경찰서8.jpg
서대문 경찰서


 
서대문형무소.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10.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14.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15.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4.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5(유관순).jpg
서대문 형무소(유관순)
충남 천안(天安) 출생.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즉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 ·연기(燕岐) ·청주(淸州) ·진천(鎭川)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오내[竝川] 장터에서 3,000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헌병대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이 때 아버지 중권(重權)과 어머니 이씨(李氏)는 일본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永明學校)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寬玉)을 만났다. 그 후 3년형을 선고받고 항소, 서울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던 중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갖은 악형에 시달려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고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서대문형무소6.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7.jpg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9.jpg
서대문 형무소


 
애국부인회 1940 미국하와이.jpg
애국부인회 1940 미국하와이


 
외국인이설립한학교에서 학생들군사훈련.jpg
외국인이 설립한 학교에서 학생들 군사훈련(이승만씨는 이런 무력사용을 반대했죠.)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께서는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독립운동하라고 하셨죠.


 
용산경찰서.jpg
용산경찰서


 
윤봉길의사체포.jpg
현장에서 연행되는 윤 봉길의사 (1932년)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황 생일 축하장에 폭탄을 던져 수라장을 만들었다 , 일본 헌병에게 붇잡혀 가는 윤봉길 의사

 얼굴에 피가 흐르고 있다.
 
본관 파평(坡平). 호 매헌(梅軒). 본명 우의(禹儀). 충남 예산(禮山) 출생. 1918년 덕산(德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 비운을 느끼고 자퇴,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부흥원(復興院), 1929년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처형하는 일본군1904.jpg
의병처형하는 일본군1904


 
임시정부요원들.jpg
임시정부 요원들


 
임시정부요원들2.jpg
임시정부 요원들


 
적십자간호원.jpg
적십자 간호회


 
종로경찰서.jpg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2.jpg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3.jpg
종로경찰서


 
종로경찰서4.jpg
종로경찰서


 
청산리대첩에사용한총기.jpg
청산리대첩에 사용한 총기


 
최포된최익현.jpg
일본군에 체포된 최익현 (1906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 ·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시위항전.jpg
필라델피아에서 시위항전


 
항일소년발대식1922.jpg
항일소년발대식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