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켈러가 갑자기 뜨고 있다.
시각, 청각, 언어의 삼중고, 난폭하고 천방지축에 사리분별 못했던 어린 시절, 부모의 고통, 무능력했던 아이가 설리반 선생님의 헌신적 사랑으로 당대의 지식인으로 환골탈퇴. 교훈은 장애우도 엄청난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성공할 수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훤히 꿰고 있는 헬렌켈러의 공식적인 스토리이다.
시각, 청각, 언어의 삼중고, 난폭하고 천방지축에 사리분별 못했던 어린 시절, 부모의 고통, 무능력했던 아이가 설리반 선생님의 헌신적 사랑으로 당대의 지식인으로 환골탈퇴. 교훈은 장애우도 엄청난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성공할 수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훤히 꿰고 있는 헬렌켈러의 공식적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동용 버전이고 원판 버전은 다르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금껏 설리반의 영향력에 가려져 헬렌켈러의 정신적 갈등이나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이 철저히 외면되었다는 것이 미국의 전기작가 도로시 허만의 ‘헬렌켈러-A Life’가 밝히고 있는 숨겨졌던 진실이다. 이것이 장애우들은 물론이려니와 여성, 일반 독자들을 열광하게 하고 있다.
헬렌켈러의 헌신적인 교사 설리반과 관련된 비밀들
헬렌켈러는 1880년 알라바마의 터스컴비아에서 출생했다. 발육이 좋은 아이였지만 19개월만에 닥친 열병의 충격으로 무의식의 상태에 빠졌다. 열병은 바로 사라졌지만 시각장애를 입었고 곧바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설명하자면 헌신적인 교사의 대명사인 설리반은 6세가 되도록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같은 헬렌켈러에 맞서 투쟁을 하다시피 언어를 가르치고 교육을 시켰다. 결국 헬렌켈러의 잠들어 있던 지성을 일깨워 하버드 대학 래드칼리프에 입학시키기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에서도 설리반은 교실마다 동행하면서 강의를 필기해 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50년 간이나 설리반은 줄곧 헬렌켈러의 삶을 지배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 전기 작가 도로시 허만은 지독하리만치 헌신적이었던 설리반과 헬렌의 관계, 평소 자신의 헌신에 대해 자화자찬하며 과장되게 표현했던 설리반의 행동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설리반은 ‘기적의 활동가’였는가? 아니면 평범한 지능의 청각,시각,언어장애를 가진 소녀를 비범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영리하게도 명성과 부를 얻는 수단으로 이용한 횡포하고 감정적으로 문제투성이인 여성이었는가?
헬렌켈러의 헌신적인 교사 설리반과 관련된 비밀들
헬렌켈러는 1880년 알라바마의 터스컴비아에서 출생했다. 발육이 좋은 아이였지만 19개월만에 닥친 열병의 충격으로 무의식의 상태에 빠졌다. 열병은 바로 사라졌지만 시각장애를 입었고 곧바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뒤따랐다.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설명하자면 헌신적인 교사의 대명사인 설리반은 6세가 되도록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같은 헬렌켈러에 맞서 투쟁을 하다시피 언어를 가르치고 교육을 시켰다. 결국 헬렌켈러의 잠들어 있던 지성을 일깨워 하버드 대학 래드칼리프에 입학시키기에까지 이르렀다. 대학에서도 설리반은 교실마다 동행하면서 강의를 필기해 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거의 50년 간이나 설리반은 줄곧 헬렌켈러의 삶을 지배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나치면 화가 되는 법. 전기 작가 도로시 허만은 지독하리만치 헌신적이었던 설리반과 헬렌의 관계, 평소 자신의 헌신에 대해 자화자찬하며 과장되게 표현했던 설리반의 행동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설리반은 ‘기적의 활동가’였는가? 아니면 평범한 지능의 청각,시각,언어장애를 가진 소녀를 비범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영리하게도 명성과 부를 얻는 수단으로 이용한 횡포하고 감정적으로 문제투성이인 여성이었는가?
7세 때 나타난 헬렌의 진정한 자아가 언어에 의해 변모되자 야만, 야수의 존재이던 헬렌켈러가 인간적인 존재로 변모하였는가? 실상은 설리반이 25달러라는 보수에 이끌려 교사로 들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설리반은 헬렌을 통해 명예와 부를 추구했으며 자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놓아 두지 않았다. 물론 설리반과 헬렌의 50년 우정은 변치 않는 것이었지만 도로시 허만은 신체적 어려움으로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헬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그것이 헬렌이 설리반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줄 수 있었던 요인으로 보고 있다. 결국 헬렌은 설리반의 그늘 아래서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우리가 야만으로 알고 있었던 7세의 헬렌켈러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종종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그들의 입술을 만졌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의 입술을 움직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음에 미친 듯이 몸짓을 했다. 이것은 그때 나를 무척이나 화나게 만들었고 그래서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발로 걷어 차고 비명을 질러댔다“
헬렌켈러의 “중류”에는 언어습득을 위한 투쟁 과정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헬렌켈러는 단어에 대해 조바심을 치며 갈구했다. 설리반은 수화로 혹은 손바닥에 사물의 이름 철자를 적어 주는 과정을 통해 언어의 존재를 전달하려 하였고 드디어 헬렌켈러는 단어와 사물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 또한 독서에 대한 갈구는 헬렌켈러로 하여금 점자를 습득하도록 이끌었다. “학교에 있는 것은 고아원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단어(나에 있어서는 음악)는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헬렌켈러는 청각장애우와 시각장애우도 언어로써 시각과 소리의 세계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것은 헬렌켈러 개인의 극복이었지만 장애우교육의 역사에 전환점을 이룬 위대한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헬렌켈러는 말하는 법과 수화, 점자, 타이핑을 완벽하게 익혔다. 교정을 보기 위해 점자기를 사용해 글을 썼지만 타이프라이터도 사용했다. 그녀의 필사본은 인쇄상의 실수가 거의 드물 정도로 완벽했다.
헬렌켈러를 둘러싼 가장 큰 베일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 이다.
헬렌켈러는 인종과 성평등을 추구했던 운동가였고 후버 정권 하의 FBI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할 만큼 좌경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변모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헬렌켈러는 빈민가를 둘러보았고 빈곤층에서 시각장애의 발생률이 높다는 사실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이에 더해 설리반 선생의 남편인 사회비평가 존 메이시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폭넓은 사고가 발달했다. 특히 1908년 H.G 웰즈의 “노인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접한 이후 사회주의를 향해 한층 더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러한 경험들에 영향받은 헬렌켈러는 독일 점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1919년 켈러는 메사추세츠에서 사회당에 가입했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날카로운 기사를 쓰며 활동적인 당원이 되었다. 당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고 노동조합과 파업을 지원했으며 미국이 1차 대전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헬렌켈러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환영하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다.
1921년 미국시각장애우재단의 요청으로 시각장애우를 위한 기금 모금이 헬렌켈러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사회주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항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동조했으며 억압이나 노동착취에 밀접한 요인들을 철폐할 것을 호소했다. 1957년 말에는 스미스법 위반으로 투옥된 공산당 지도자 엘리자베드 걸리 플린에 따뜻한 감사를 보내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휠몰아치던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던 헬렌켈러는 장애우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각장애우를 위한 일들이 결코 내 중심을 차지했던 적은 없다. 나는 모든 사람들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에 동조했다.”
1차 대전 이후 헬렌켈러는 문학적 취향이 변화했고 집필로부터 받는 수입은 점차 감소하였다. 헬렌켈러는 늘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헬렌켈러는 돈을 벌기 위해 보드빌(대중예술) 쇼에 진출했다. 설리반과 함께 나선 이 모험은 보기좋게 성공했다. 해리와 허만웨버 같은 다양한 기업인들이 켈러를 20분 연극에 추천했고 1920년에서 24년 사이에 지방을 순회공연했다. 보드빌 순회에서 인기를 모은 켈러는 그때 이미 소피 터커, 찰리 채플린, 엔리코 카루소, 야사 하이페츠 하르포 막스같은 유명인사들과 우정을 나누며 유명인사의 대열에 올랐다.
그의 친구들은 헬렌켈러가 저질 무대로 진출하려 하자 충격을 받았다. 헬렌켈러는 심경이 복잡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드빌 순회 쇼에 출연해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헬렌켈러는 청중을 사랑했고 빙글빙글 맥박치게 하는 인간적인 삶의 따스한 기류를 너무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대가 왜 그녀를 끌어들였는지 그녀가 왜 화법을 배우고 화술을 익혔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헬렌켈러는 음악과 라디오,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진동을 느끼고 싶어했다.
보드빌 투어중 켈러는 설리반과 그의 남편, 1914년 계약한 집의 주인 톰슨과 함께 메사추세츠 주에서 뉴욕 퀸스의 포레스트 힐로 이주했다. 켈러는 이 집을 미국시각장애우재단을 위한 대규모 기금모금 투어의 본부로서 사용했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카운셀러 역을 자임했다. 그녀는 돈을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우의 삶과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모색했다.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우 대다수가 부족한 교육을 받았고 보호시설에서 지냈다. 그녀의 노력은 이들 환경을 바꾸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였던 켈러는 설리반, 톰슨과 함께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여러 해 동안 세계를 다니며 시각장애우와 청각장애우들을 대변하는 강연을 했다.
헬렌켈러는 1937년 일제치하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37년 7월 14일자 조선일보는 헬렌켈러의 방문에 대해 이렇게 다루고 있다. “삼중고를 극복하여 20세기의 기적이란 일컬음을 받는 헬렌켈러 여사가 조선을 방문하였다. 우리가 헬렌켈러 여사를 환영함은 그가 조선을 방문함으로써 이 땅에 그와 같이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만천여명에 달하는 광명을 등진 무리들에게 광명을 줄 사업을 일으킬 자극과 기운을 양성해 주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여사가 조선을 방문한 본의가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관찰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조선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너무도 미미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문화의 정도가 아직도 낮고 따라서 사회시설부족에 있어서는 재언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이런 사람들을 위한 시설은 개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은 조선의 맹인 일만일천이백육인, 아인(농아) 일만삼백인의 다수를 위한 교화기관인 관립 재생원맹아부, 평양의 사립 아맹학교 밖에 없는 것으로써 족히 알 일이다.”
도로시 허만은 장애우라는 이유만으로 인해 헬렌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던 것으로 강요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아름답고 지성적이고 극도로 긴장된 그리고 열렬하며 대단히 매력적인 남부 미녀였음에도 약탈당하는 삶을 살았던 한 불행했던 여성으로 기억해 줄 것을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우리가 야만으로 알고 있었던 7세의 헬렌켈러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종종 대화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그들의 입술을 만졌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의 입술을 움직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음에 미친 듯이 몸짓을 했다. 이것은 그때 나를 무척이나 화나게 만들었고 그래서 지쳐 나자빠질 때까지 발로 걷어 차고 비명을 질러댔다“
헬렌켈러의 “중류”에는 언어습득을 위한 투쟁 과정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헬렌켈러는 단어에 대해 조바심을 치며 갈구했다. 설리반은 수화로 혹은 손바닥에 사물의 이름 철자를 적어 주는 과정을 통해 언어의 존재를 전달하려 하였고 드디어 헬렌켈러는 단어와 사물의 관계를 깨닫게 된다. 또한 독서에 대한 갈구는 헬렌켈러로 하여금 점자를 습득하도록 이끌었다. “학교에 있는 것은 고아원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단어(나에 있어서는 음악)는 고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헬렌켈러는 청각장애우와 시각장애우도 언어로써 시각과 소리의 세계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것은 헬렌켈러 개인의 극복이었지만 장애우교육의 역사에 전환점을 이룬 위대한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헬렌켈러는 말하는 법과 수화, 점자, 타이핑을 완벽하게 익혔다. 교정을 보기 위해 점자기를 사용해 글을 썼지만 타이프라이터도 사용했다. 그녀의 필사본은 인쇄상의 실수가 거의 드물 정도로 완벽했다.
헬렌켈러를 둘러싼 가장 큰 베일은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 이다.
헬렌켈러는 인종과 성평등을 추구했던 운동가였고 후버 정권 하의 FBI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할 만큼 좌경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변모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헬렌켈러는 빈민가를 둘러보았고 빈곤층에서 시각장애의 발생률이 높다는 사실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이에 더해 설리반 선생의 남편인 사회비평가 존 메이시와의 대화를 통해서 사회 문제에 대한 폭넓은 사고가 발달했다. 특히 1908년 H.G 웰즈의 “노인을 위한 새로운 세상”을 접한 이후 사회주의를 향해 한층 더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러한 경험들에 영향받은 헬렌켈러는 독일 점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1919년 켈러는 메사추세츠에서 사회당에 가입했다.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날카로운 기사를 쓰며 활동적인 당원이 되었다. 당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고 노동조합과 파업을 지원했으며 미국이 1차 대전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헬렌켈러는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환영하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있었다.
1921년 미국시각장애우재단의 요청으로 시각장애우를 위한 기금 모금이 헬렌켈러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사회주의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항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동조했으며 억압이나 노동착취에 밀접한 요인들을 철폐할 것을 호소했다. 1957년 말에는 스미스법 위반으로 투옥된 공산당 지도자 엘리자베드 걸리 플린에 따뜻한 감사를 보내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휠몰아치던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던 헬렌켈러는 장애우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 헬렌켈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각장애우를 위한 일들이 결코 내 중심을 차지했던 적은 없다. 나는 모든 사람들과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에 동조했다.”
1차 대전 이후 헬렌켈러는 문학적 취향이 변화했고 집필로부터 받는 수입은 점차 감소하였다. 헬렌켈러는 늘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헬렌켈러는 돈을 벌기 위해 보드빌(대중예술) 쇼에 진출했다. 설리반과 함께 나선 이 모험은 보기좋게 성공했다. 해리와 허만웨버 같은 다양한 기업인들이 켈러를 20분 연극에 추천했고 1920년에서 24년 사이에 지방을 순회공연했다. 보드빌 순회에서 인기를 모은 켈러는 그때 이미 소피 터커, 찰리 채플린, 엔리코 카루소, 야사 하이페츠 하르포 막스같은 유명인사들과 우정을 나누며 유명인사의 대열에 올랐다.
그의 친구들은 헬렌켈러가 저질 무대로 진출하려 하자 충격을 받았다. 헬렌켈러는 심경이 복잡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드빌 순회 쇼에 출연해서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헬렌켈러는 청중을 사랑했고 빙글빙글 맥박치게 하는 인간적인 삶의 따스한 기류를 너무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무대가 왜 그녀를 끌어들였는지 그녀가 왜 화법을 배우고 화술을 익혔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리고 헬렌켈러는 음악과 라디오, 입술의 움직임을 통해 진동을 느끼고 싶어했다.
보드빌 투어중 켈러는 설리반과 그의 남편, 1914년 계약한 집의 주인 톰슨과 함께 메사추세츠 주에서 뉴욕 퀸스의 포레스트 힐로 이주했다. 켈러는 이 집을 미국시각장애우재단을 위한 대규모 기금모금 투어의 본부로서 사용했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카운셀러 역을 자임했다. 그녀는 돈을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장애우의 삶과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모색했다. 당시만 해도 시각장애우 대다수가 부족한 교육을 받았고 보호시설에서 지냈다. 그녀의 노력은 이들 환경을 바꾸는 데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지칠 줄 모르는 여행자였던 켈러는 설리반, 톰슨과 함께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여러 해 동안 세계를 다니며 시각장애우와 청각장애우들을 대변하는 강연을 했다.
헬렌켈러는 1937년 일제치하의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1937년 7월 14일자 조선일보는 헬렌켈러의 방문에 대해 이렇게 다루고 있다. “삼중고를 극복하여 20세기의 기적이란 일컬음을 받는 헬렌켈러 여사가 조선을 방문하였다. 우리가 헬렌켈러 여사를 환영함은 그가 조선을 방문함으로써 이 땅에 그와 같이 불행한 처지에 있는 이만천여명에 달하는 광명을 등진 무리들에게 광명을 줄 사업을 일으킬 자극과 기운을 양성해 주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여사가 조선을 방문한 본의가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관찰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 조선의 불행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이 너무도 미미한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문화의 정도가 아직도 낮고 따라서 사회시설부족에 있어서는 재언할 필요도 없지만 특히 이런 사람들을 위한 시설은 개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닌 것은 조선의 맹인 일만일천이백육인, 아인(농아) 일만삼백인의 다수를 위한 교화기관인 관립 재생원맹아부, 평양의 사립 아맹학교 밖에 없는 것으로써 족히 알 일이다.”
도로시 허만은 장애우라는 이유만으로 인해 헬렌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던 것으로 강요해서는 안 되며 도리어 아름답고 지성적이고 극도로 긴장된 그리고 열렬하며 대단히 매력적인 남부 미녀였음에도 약탈당하는 삶을 살았던 한 불행했던 여성으로 기억해 줄 것을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