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에서 표류 14 시간 만에 만난 거북등에 매달려 헤매다가
화물선에 발견 구조되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김 정남[金 正南:27 부산] 씨가 30일-1969년 8월- 오전 8시 30분
[한국시간]그를 구해준 로스엔젤레스 항 터미널 아일랜드
232부두에 기항한 스웨덴 화물선 시타벨호[선장 호스테웨티]
편으로 이곳에 상륙했다.
“ 죽는 줄 알았는데 천사 같은 거북을 만나 살아났다.”
김씨는 회의적인 신문기자와 거북 메니아들에게 말했으며
이 믿을 수없는 기적 같은 얘기는 시타벨호 선원에 의해 확인했다.
김 씨는 부두에 내리기전 시타벨 호 난간에 기대어 시종 얼굴에
미소를 띄고 손을 흔들며 질문에 거의 고함을 질러 대답했다.
시타벨호가 부두에 닿자 미국 이민국 보건 및 세관 관리들이 배에 올라
검역검사를 하는 동안 김 씨는 기인(奇人)처럼 대접을 받았다.
부두에 내린 김 씨는 또 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고 용왕제를 지내더니
그 덕인 것 같다면서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기 까지 16시간 동안의
기적 같은 얘기를 로스엔젤스 주재 한국 영사의 통역을 통해 남의
일처럼 차분히 들려주었다.
일본 배 페트랄 나가라호의 선원이던 김 씨는 바다에 빠진 22일
새벽 잠도 안 오고 무료한 시간을 잊기 위해 동료 선원 5명과 함께
일본산 위스키 니까를 마셨는데 주기(酒氣)가 오르고 무더워
갑판으로 나갔다.
오른쪽 선측(船側)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롤링이 심해졌다.
이때 김 씨는 취기 때문이었던지 실족, 칠흑의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페트럴 나가라호는 이미 어두움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무턱대고 바다에 떠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라 호는 몇 시간 뒤에 김 씨의 실종을 알고 선수를 되돌려
장시간 그를 수색했지만 그를 찾지를 못했다.]
그러나 파도에 밀려 어딘가로 밀리고 있었다.
다행히 악천후는 아니었다 .
거북을 만났을 때 김 씨는 이미 기진맥진해졌다.
“처음엔 정말 상어인줄 알고 이젠 죽었구나 생각 했습니다.”
김 씨는 자기를 구해준 거북을 만났던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접근해 보기로 작정을 하고 오른 팔을 걸쳐도 거북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해칠 것은 아닐 것 같아서 슬쩍 상체를 얹는듯해도 꼼짝을 안했다.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피로가 한꺼번에 오는 듯했다.
거북은 머리를 물에 처넣고 헤엄치다가는 이따금 머리를
치켜들곤 했다.
하반신은 물에 잠긴 채 거북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긴 셈이었다.
이때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체념했던 부산 가족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
두 시간은 조히 된 것 같았다.
거북에 매달려 움직이는 동안 짙은 안개 층을 벗어나게 됐다.
때마침 눈앞을 지나가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시타델 호였다.
김 씨는 한 손을 거북의 어깨 죽지를 안아 쥔 채 남은 한손으로
배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흔들었다.
시타델 호에서 마주 손을 흔들어 자기를 발견했다는 것을 안 순간
김 씨는 거북을 놓고 배를 향해 헤엄쳐 갔다.
그 직후 거북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시타델 호에서 구명보트가 내려왔다.
보트에서 내미는 손을 붙잡고 갑판에 올라서는 순간 김 씨는
거북의 몸길이가 60센티 정도가 목의 굵기가 15센티 정도였고
새까맣고 딱딱한 등껍질의 무늬는 한모서리가 약 5센티 정도
였다는데 네 발은 건장한 어른 팔의 삼분지 이 정도였다면서
거북이 잠수해 버릴 까봐 거북에 너무 매달리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했다.
김 씨는 조금 수척해보였는데 전신은 울긋불긋한 타박상같은
상처 투성이였다.
바닷고기에 물렸거나 쏘인 자국은 없었다.
김 씨는 중학생 때 권투로 단련된 몸이기에 견디어냈을 거라고 말했다.
김 씨는 자기를 구해주고 치료해주었으며 배를 떠날 때에
160달러를 거두어주기까지는 한 시타델 호 선원들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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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모든 사람들이 제일 궁금히 여긴 추락경위가 누구와 싸우다가
빠지거나 누군가가 밀어 넣은 것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제 다시 땅을 밟은 김씨는 31일이나 9월 1일 쯤 한국 선원 송출
회사의 도쿄 대리점 지시로 귀국하게 된다.
한편 시타델 호 선원중 한 선원은 김 씨가 구조되어 시타델 호에
오르는 모습을 찍어 어느 통신사에 3천 달라를 받고 팔아
넘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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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나를 차"
[중앙일보] 1969년 08월 30일
【샌피드로 (캘리포니아주) 30일 UPI동양=본사특약】거북이를 타고 바다에서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김정남씨는 30일 소문을 듣고 몰려든 수많은 선원과 기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이곳에 도착했다. 김씨는 몰려든 기자들에게『그때 내가 타고 있던「페더럴·나가라」호에선「파티」가 열리고 있었다』고 말하고『나는 속이 거북해서 갑판으로 나갔다. 그리고 내등을 배의 난간에 대고 서있을 때 큰 파도가 나를 바다위에 쓸어버렸다』고 물위에 떨어진 경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거북등에 올라탄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얼맛동안 헤엄을 치다보니 내옆구리를 차는 놈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북이었다. 나는 곧 거북이를 부여잡았으나 거북은 물속으로 잠수하려하지않았다. 거북은 서서히 헤엄치고있었으며 나를 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거북등을 잡고 내발로 헤엄쳤다. 그것은 거북에게 너무 큰 무게의 부담감을 주지않기 위해서였다.』
기고자 : UPI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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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나이 김정남씨 귀국
[중앙일보] 1969년 09월 09일
『반갑습니다. 뭐라고 감사하다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읍니다.』거북이등에 업혀 표류14시간끝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세계적 화제를 모았던 김정남씨(27)가 9일낮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첫마디를 했다.
지난달23일 하오 6시30분 표류중「스웨덴」기선「시타델」호에 구조되어 19일만에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이날 JAL기로 귀국한 김씨는 공항에 내리자 밝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높이 흔들어 보이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부산에 있는 부모형제가 제일 보고싶었다』고 한때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약간 그을은 얼굴에 건강해보이는 김씨는「시타델」호에 구조됐을 때『물이 가장 먹고싶었다』고 당시를 돌이키며『그 고마움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김씨는「멕시코」의「리타리」연안에서 표류중 상어떼가 들이닥칠까바 걱정스러웠다고….『뭐니뭐니해도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상어였다』고 회고했다.
『작년 10월23일 1년계약으로「리베리아」상선에 승선했으나 계약이 만료되기전 당한 일로 건강이 나빠져 다시는 배를 못다게돼 안타깝게 되었다』고 말하는 김씨는 앞으로1년동안 집에서 휴양하고 싶다면서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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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등타고 구사일생 김정남씨
[중앙일보] 1980년 09월 24일
11년전 태평양에서 항해도중 바다에 빠졌다가 거북의 등에 얹혀 기적적으로 살아나 화제를 모았던 김정남씨(38·부산시암남동5가408)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기백으로 당시 하급선원에서 중견「마도로스」가 됐다.
김씨는 그때가 악몽같았지만 자기를 살려준 거북을 잊지못해 해마다 8월이면 부인 우형림씨(34) 와 함께 송도앞바다에서 용왕제를 지내곤한다.
「리베리아」상선 「페네럴·너가러」호(8천7백t급)갑판원으로 일하던 69년8월23일밤. 김씨는 바람을 쐬기위해 갑판에 나왔다가 그만 발을 잘못디뎌 바다에 떨어졌던것. 자신이 탔던 배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고 김씨는 『사람살리라』고 고함을 쳤으나 질흑같은 밤바다에서 그의 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자』며 천천히 헤엄을 쳐가던 김씨의 손에 육중한 물체가 부딪쳐왔다.
그것은 커다란 거북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몸을 의지해보니 김씨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한듯 거북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거북등에 얹혀 무작정 표류하기 2시간, 김씨는 다행히 때마침 인근을 항해하던「니카라과」상선「시타델」호에 구조될수 있었다.
김씨는 5일후 직장을 그만두고 요양하기위해 귀국했으나 사람들은 뱃사람이 배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나 더군다나 거북의 등을 타고 살아났다는 사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앓았다.
심지어 정신병자로 까지 몰려 사고후 4년동안을 취업이 거절됐고 지금의 부인 노씨와 결혼하는데도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김씨는 그동안 원양어선을 타다 지난4월 지금의 협성해운으로 옮겨 갑판장이됐고 『거북처럼 어질고 배살림을 도맡을 정도로 성실하다』는 주위의 평을 듣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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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9년 8월 30일 7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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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9년 9월 1일 7면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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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9년 8월 29일 3면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