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차관보 존 D. 히카슨의 폭로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계획된 전쟁이었다.
해방 직후 박헌영((북한정권에서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1955년 ‘미제의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됨))과 그의 직계인 이강국. 임화(작가)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 공개된 미 육군 정보국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 조사보고서’ 에서 드러났다.
1956년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이강국(초대 북한 외무성 부상)은 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 Joint Activities Commission, Korea)’에 의해 고용됐던 것으로 나와 있다.
즉, 김일성 정권에 의해 ‘미제 스파이’ 혐의로 53년 처형된 이강국은 실제로 미 첩보기관의 끄나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같이 미국은 남로당원들 탄압하고 일부는 포섭하여 간첩으로 월북시켜 북한 수뇌부에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을 정복하기 위한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당시 조선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냈다. 미군정은 자신들이 조작한 이 사건으로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 이를 구실로 정당 활동의 자유를 빼앗고 배후로 지목하여 소련대사관도 폐쇄하였다. 또 신문을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허가제로 바꾸어 좌익계열의 간행물들을 폐간케 하고 좌익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일제의 치욕스런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좌익들도 핍박을 무릅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선봉에 섰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은 독립을 방해하는 미군정이 실시하려는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단선단정 반대 대중 운동이었다.
이후에도 우리민족의 염원과 배치되는 미군정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1947년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남조선 과도입법의회는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법안에 미군정은 인준을 거부하였다.
‘반민족적 친일청산’이 시대정신이었던 해방 직후에 미군정은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대신 그들은 미군정에 충성을 받쳤다.
미군정은 절대다수 우리국민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고 전범 일제와 협력한 친일 매국노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더러운 관계 를 맺은 것이다.
미군은 친일세력들이 한국국민의 배척을 받고 있어 자신들이 보호하지 않으면 설 땅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친일파를 고용하면 충견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기용한 것이다.
또 친일세력이 한국 민중과 원수지간이므로 한국 국민들을 억압해서 길들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미군은 항일애국지사들이 ‘똥’ 이라고 부르는 친일 앞잡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미국의 분단정책을 반대하고 항거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도록 하였다.
미군은 해방자로서 조선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침략자로 들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침략자에 살인자 였다.
일본을 대신해서 미국 자신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목적이었다.
즉, 미국의 목적은 우리에게 나라를 되찾아주어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권역을 대륙으로 넓히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를 물려받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 시절에 지배세력이었던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기용하면 공을 세워 통치자인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받아 배척받고 있는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중국에서 장개석은 미국의 지원 하에 국공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160만 정규군을 동원하여 1946년 6월 해방구(解放區: 공산당 통치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개석은 공산당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병력, 월등한 재정기반, 거기에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까지 받았음에도 결국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모택동에게 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장개석을 이용하여 만주를 통치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미국은 만주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만주 괴뢰국 건설을 주도한 기시 노부스케는 패전 이후 에이급 전범으로 구속됐으나 유일하게 풀려났다.
그의 ‘옥중일기’에는 ‘케넌 설계도’와 일치하는 한반도 재 지배 구상이 담겨 있다.
케넌이 작성한 이 ‘설계도’는 그가 본부장으로 있던 국무부 정책기획본부 제13호 파일 상자에 감춰져 있다가 1985년에 비밀이 해제되어 세상에 공개 되었다.
케넌 설계도란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의 입안자로 이름을 날린 2005년에 101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세운 계획으로서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했던 일본에게 이 지역을 통치하도록 재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욕심을 내어 1905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여 일본의 숨통을 조였고 수렁에 빠진 일본은 미국의 예상대로 진주만공격을 감행 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돌아가서 만주와 한반도를 일본에게 통치를 위임하고 미국은 그러한 일본본토를 직접 통치한다는 계획이 케넌 설계도이다.
이 케넌 설계도를 실행하기 위해서 미국은 대륙지배의 경력을 가진 핵심 인사를 확보하는 게 필요하였다,
진주만 기습공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이하 일곱 명의 A 급 전범이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이 1948년12월23일이었는데, 똑같이 에이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조 등이 처형된 다음날 자유의 몸으로 옥문을 빠져나와 당시 요시다 내각 관방장관으로 있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일본 총리)의 관저로 직행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창건한 것이 32년이었는데, 일본 상공성의 유능한 관료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의 산업차장으로 발탁되어 부임한 것은 그 4년 뒤인 36년이었다. 당시 소련은 10월 혁명 후 철강·시멘트·기계공업 등의 분야에서 경제력 내지 전쟁수행 능력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시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부임한 것이 기시 노부스케 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닛산콘체른의 사장 아유카와 기스케를 만주로 불러들여 ‘만주 중공업개발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총재로 있던 마쓰오카 요스케와 손잡고, ‘만주 3스케 로 불리던 작업팀을 구성하여, 단시일 내에 경제발전을 위해 상당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가 상공성 차관으로 귀임한 것이 36년이었으므로 그의 만주시대는 그리 길었던 것은 아니나, 만주는 ‘내 작품’이었노라 고까지 호언할 정도로 그가 올린 성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였다.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를 일본의 재 지배에 맡겨야 한다는 ‘케넌 설계도’의 시각에서 본다면,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으로서는 참으로 안성맞춤의 인물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의 요원이 패전 후 옥중의 기시 노부스케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록에도 남아 있는 사실인데, 기시 노부스케는 벌써 그때부터 미국이 자기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과 무죄석방 뒤 미국과 조국 일본을 위해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다음과 같은 ‘옥중일기’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냉전(Cold War)은 조만간 열전(Hot War)으로 변할 것인데, 비록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고배를 마셨다고는 하나 동양에서 으뜸가는 소질을 지닌 민족으로서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맡아야 할 세계사적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식견과 포부, 용기와 결단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출현이 기다려진다.(1947년 9월20일)
이 글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능력을 겸비한 인물은 바로 기시 노부스케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겨 놓았다.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를 몰고 올 중국 공산군의 제패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달러와 무기원조로만 장개석을 돕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미국은 미국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택동을 제압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국 자신의 군대라는 것은 주변국인 일본의 의용군 편성도 타당하다.(1948년 11월 4일)
미국이 A 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에 대해서 사면한 것은 케넌 설계도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을 받고도 일본 영토였던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상실감을 갖고 있던 미국에게는 기시 노부스케는 케넌 설계도를 현실화 시킬 인물이었다.
미국에게 한국은 만주를 회복하는 디딤돌에 불과한 영역이었고 종착지가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국민과 좋은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가 있었지만 미국은 단지 한국만을 지배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중국대륙 그리고 세계제패의 원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충성도를 갖고 있는 친일파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친일파들은 중국대륙을 지배한 경험 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군사적으로 침략하고 이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웠던 나라인데 자주권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만주괴뢰국 이라고 부른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전역을 침략하였다.
1937년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시민 수십만을 살육하였다. 그 뒤 우한[武漢]을 공략하고 광둥[廣東]에서 산시[山西]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였다.
이렇게 일본이 팽창해 가고 있으므로 미국의 세계제패의 구상과 상치되었다.
따라서 1938년 미국의 루즈벨트는 비행기와 항공모함 부품, 고옥탄가의 항공 연료, 고철, 그리고 공작 기계들의 일본수출을 제한하는 대일경제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경제압박을 가하였다.
그리고 1941년 7월26 루즈벨트는 미국 내의 모든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시켰고 일본으로의 석유수송을 차단하였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란 일본을 중심으로 함께 번영할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범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당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정치 표어이다.
이 구호대로 동아시아를 일본이 차지하면 미국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의 목표는 세계제패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양심적인 국가인데 세계제패를 목표로 하는 나라라는 소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미국의 역사를 알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미국의 역사는 살육의 역사 정복의 역사입니다.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살육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정당성을 확립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의 피가 흐르는 미국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존재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들을 통해서 세계를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미국은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쫓아냈고 멕시코로 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강탈해 버렸다.
1837년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존 어설리반은 자신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의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되어져야 하는 “명백한 운명”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1898년 미서전쟁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뿐 아니라 앞으로 미국 외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사상적 밑받침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제도, 종교, 인종 등의 우월감은 그들의 종교적 선교 개념과 어울려 거의 모든 경우에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윌슨 대통령은 “세계민주주의의 안전을 위하여” 라는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고, 2차 대전에도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같은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다. 이런 “명백한 운명” 주의에는 숨길 수 없는 군수산업에 의한 경제적 이익과 인종 차별적 편견이 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1915년 미국의 불황에 접어드는 듯 했으나 서방의 군수품 주문으로 군수산업이 활기를 띠고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기 시작 했는데 독일의 잠수함 작전으로 군수품 수송에 차질을 빚자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와는 상관없이 군산복합체의 결정에 의한 것입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유와 미국이 여기에 뛰어든 이유는 모두 자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지 민주주의 운운 하는 것은 수식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도 경제적 배경이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눠 가졌다. 그 후 패전국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한 2차 세계대전이 뒤를 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미국의 경제공황(대공황)에서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자유경쟁 체제에서는 주기적으로 호경기, 불경기, 그리고 대공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유민주 체제에서의 대공황이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뜻합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엄청나게 경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산은 많아지지만 소비는 크게 늘어나지 못합니다.
만들어내는 상품은 많고 사는 사람들은 많이 없으니 남는 물건이 많아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재고량이 많아지자 기업. 공장 같은 곳은 망하게 됩니다.
기업이 망하고 문을 닫으면 직장을 잃은 실업자가 증가하게 되겠죠.
실업자가 증가하면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또 소비가 감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부도, 실업자증가, 소비감소, 기업부도 ...가 반복됩니다.
이렇게 살기가 어렵던 중 미국의 주식가격이 폭락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은 경제 대공황에 이르게 되죠.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세계로 확산되어갑니다.
각 나라들은 경제대공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이라고 하는 정책을 펼칩니다.
뉴딜정책이란, 생산 활동은 억제하고 실업자 규제를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 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경제공황을 극복하기위해 식민지를 수탈하게 됩니다. 식민지에 물건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진국이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는 식민지를 만들 수도 없죠.
방법이 없으니 사회가 불안해져갑니다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이럴 때 사람들은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도와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일에 구원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히틀러입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후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고자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입니다,
한마디로 1,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입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국내에서의 자유경쟁을 끝내고 세계로 포식자의 손을 뻗치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최종단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에는 승리 했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와 소련은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미국은 전쟁을 치렀으나 자국의 산업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다.
이 여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독식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식민지들을 독립시킨다는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과 함께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 (미화해서 말하면 자유세계)에 포함시켰다.
소련은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수도에 까지 깊숙이 침략한 독일을 물리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미국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영향력확대에 맞서 혁명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소련도 승전국의 지위를 주장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 하였다.
미국은 식민지나 지배권역의 확대를 꾀하면서도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고 속임수를 쓰는 나라입니다.
1898년 4월 20일 미 의회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해도 쿠바를 병합하지 않겠다는 결의안도 채택했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남미로의 영토팽창에 있었다. 미국은 전쟁에 승리한 후에 쿠바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약속위반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쿠바의 철도, 광산, 사탕수수 회사를 접수해 버렸고, 미국의 산업은 남미 대륙의 경제를 침식해 들어갔다. 그중 미국의 연합 과일 회사는 남미 국가들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까지 조정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멕시코의 경우, 미국은 멕시코 자산의 43%, 석유시장의 50%를 독점해버렸다. 전쟁의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였다는 점이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 목적은 자유세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 내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석유를 독점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를 통해서 OPEC 산유국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불과 10주에 불과한 '빛나는 소 전쟁(splendid, little war)'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는 450명에 불과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5200명의 미군이 죽었다. 원인은 말라리아와 황열병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4년 동안 필리핀 독립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보았다.
이라크와의 전쟁도 일방적인 승리였다. 미군 전사자가 불과 13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라크 게릴라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매주 3∼6명꼴로 미군이 전사하고 있다. 벌써 이라크 전 때보다 더 많은 미군이 전사하였다. 미군의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는 미군과 함께하는 동맹국들의 희생도 발생하게 될 것이다.
100년 동안 미국의 폭력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횟수가 더 많아 졌다. 구소련의 몰락으로 견제 세력이 없어진 지금, 세계는 자칭 경찰국가에 의해서 더 많은 지구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자신들은 세계의 모든 종족들을 개화시켜 관리할 책무가 있다는 논리를 확립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정복이 그들의 의무가 됐습니다.
이승만은 일제 때부터 조선독립의 운명을 미국의 외교노선에 맡기자고 한 외세의존형의 인간으로서 독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건설을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이러한 이승만을 길러왔다.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목표로 민족의 단결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아니다.
정반대로, 해외에 있던 항일 독립단체들을 미국의 조정에 따라 파괴하고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안중근 같은 항일애국투사를 테러리스트나 살인범으로 부른 사람을 미국은 독립투사로 위장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앉혔다.
우리민족은 나라의 분열을 원치 않았다. 분열에 앞장선 이승만 정권을 원치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희망에 의해 국민이 탄생시킨 정권이 아니고 미국이 한국인의 소망을 짓밟고 반대하는 민중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친일파들을 규합해 강제로 세운 정권
즉,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세워진 정권으로서 우리의 자주적인 정권이 아닌 오직, 미국의 대륙지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권이며 미국의 보호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국민들에 의해 무너질 괴뢰 정권이었다.
이승만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공법을 만들었는데 우리의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국가안보 보다는 국민들로부터 이승만의 안전을 보호 할 괴뢰 안보라 해야 맞는 말이 될 거다.
미국은 해방 후 김구 등 민족지도자 암살, 민중항쟁 탄압 등 미군정이 저지른 죄악을 조선인끼리 다툼으로 수습하여 자신들의 소행을 감추려고 이승만 괴뢰가 필요 하였다.
미군은 한국전쟁 포로들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을 행하고 북으로 가서 서방의 민간조사단에게 폭로할까 두려워 불법적으로 교환에 응하지 않고 석방해 버렸다.
그리고는 허깨비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렸다. 포로들은 미군이 관리하는데 미군의 지시를 받는 이승만 괴뢰가 석방 하였다고 둘러댔습니다.
이렇게 포로교환 하기 전에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고서 이제 와서 남한의 친일친미 기생세력들은 북한에 있는 포로를 석방하라고 지껄입니다.
미군이 남한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한국인 허수아비가 필요한 이유는 이와 같이 비난 받는 일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리를 해서 자신의 소행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팽창주의 야욕으로 일제 패망 전부터 한국 땅에 자신의 괴뢰정부를 세우기 위해 이승만을 관리하고 길러 왔습니다.
한반도 북부는 김일성의 독립 투쟁이 활발한 지역이었으므로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남쪽에 이승만 괴뢰를 세웠습니다.
한반도 남쪽만 차지함으로써 소련, 중국 대륙과 좀 띄어서 국경이 정해지므로 은밀하게 대륙침공 전쟁 준비를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우선 반도 남쪽을 지배권역에 넣고 다음엔 이를 발판으로 대륙으로의 더 큰 팽창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6·25전쟁의 원인은 그 보다 앞선 작은 전쟁에 있었고 작은 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태생적 본능인 팽창주의 야망에 있었다. 6.25 한국전쟁을 포함, 지구상에서 미국이 참전한 전쟁은 모두 팽창주의 야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원인은 냉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냉전은 미국의 팽창주의를 실행하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미국은 1866년 8월 함선 ≪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침략의 첫 발을 들여 놓은 때에 벌써 평양에까지 침입하여 인민들의 재물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였으며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아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미국은 ≪챠이나≫호, ≪쉐난도아≫호 등 함선들을 연이어 침입시켜 우리나라를 정복해 보려고 날뛰면서 온갖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적극 지지하여 미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탄압하였고 장지연과 전명운 등 항일독립투사들을 처형하였다. 미국의 외교관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였다.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한 2.7 사건은 1948년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일어났다.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양군 동시 철수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동아일보의 사주)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둔 2월 9일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 고함.〉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전 국민이 단선단정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전 국민의 반대 속에서 탄생된 정권이 대한민국 이승만 친일파 정권이었다.
1948년 창군 당시의 군 수뇌부 인맥은 대부분 일본군·관동군 출신이었고
미군정에 고용됐던 친일세력들이 그대로 정권 상층부에 자리잡고 있어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악랄하게 굴었던 일제 앞잡이들이 해방후에도 그대로 경찰 조직에 기용되어 치안을 맡아 애국적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반정부 기운도 여전하였다.
미군정이 관동군 출신을 한국군의 구성의 주도세력으로 삼았던 것은 일제 때 만주에서 중국 인민군과의 전투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대륙을 회복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미 군정청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는 친일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배출한 단체)의 폭력에 시달리던 제주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반대하여 일어난 1948년의 제주도 4.3 항쟁과 제주항쟁을 진압하란 명령에 불복해서 일어난 여수·순천의 반란, 그리고 뒤이은 야산 유격대 등으로 남한의 민중들은 저항했다.
독립을 방해하고 다시 식민지노예로 삼으려는 외세와 친일매국노 치하에서 노예 가 되느니 자유인 으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탄압하기 위해 박진경연대장, 최경록연대장, 송요찬연대장, 함병선연대장 등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지휘관을 임명했다.
친일세력들은 한국 민중들의 배척의 대상이 되어 불안전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미군정은 그들 친일세력에게 진압을 맡겼다.
친일 세력들에게 진압을 맡기면 공을 세워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받아 불안전한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본을 대신해서 자신이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이 하던 방식대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국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괴뢰정부가 친일파가 아닌 지도자나 관료는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기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은 온 국민이 반대해서 그의 명령에 따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친일파들도 미군의 지시를 따르지 허깨비 지시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해방 후 김구 등의 민족 지도자를 수없이 죽인 사람은 허수아비 이승만이 아니고 미군이었습니다.
이렇게 민족 지도자는 미 군정청이나 정부에서 기용하기는커녕 수없이 살해 했는데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기용 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해방직후 조선의 전 지역에서 조직된 각급 인민위원회들은 일본군대와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치를 실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복하여 패망한 후에 자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기를 원하여 조선에 있는 민족지도자에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을 담당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겼다.
따라서 미국이나 소련 두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면 미군은 이런 우리의 자치 기구를 지지하고 도움을 줘야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산시키고 친일세력으로 치안을 담당케 하였다.
미군정은 제주 4.3 이 발생 했을 때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위해 협상했던 김익렬 연대장 등 일본군 출신이 아닌 장성은 교체시켰습니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 면서 (5월6일). 전격적으로 제9연대장을 교체 하였다
그 동안 협상을 추진해 온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박진경을 발령한 것이다.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인물이다.
미군은 제주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박진경을 진압군 지휘관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 학살했으며, 딘 장군은 이 학살을 보고받고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하고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이로서 제주도민 4만 명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도 부모형제를 잃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1948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자 국군은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에 돌입했으며 작전 중 산간마을을 소개하였다. 빨치산을 토벌하던 제3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7월 18일 빨치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2대대장의 인솔하에 출동한 국군은 신천리 인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변과 신천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사살, 척살의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제2대대 주둔지인 덕산국민학교와 제3연대 정보과 군인들이 본부를 차려놓은 농회창고에서 마을 사람들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살해했다. 희생자들은 토벌작전에 나갔던 국군에게 각 마을에서 연행되어 국군의 주둔지에서 고문을 당한 후 시천면 덕산국민학교 뒷산이나 농회창고 뒷산, 삼장면 가막골 등지에서 살해당하거나 혹은 희생자의 거주지에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3연대는 1950년 1월 말 서울로 이동할 때까지 인근 지역 주민 수백 명을 빨치산과 협력하거나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살해했다.
1949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경북 대구에 주둔하던 육군 제6연대와 이 부대를 재편한 22연대ㆍ육군 정보국 소속 호림부대ㆍ경산경찰서 등은 지역 내 빨치산과 남로당 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였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참고인은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하였다.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였다.
1949년 7월에서 1950년 1월 말 사이에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강변, 신천리 신천국민학교, 원리 덕산 국민학교 뒷산, 사리 농회창고 뒷산, 삼장면 평촌리 가막골 외 지리산 산간마을과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국군 제3연대 정보과, 제2대대 소속 군인들에게 집단살해 당했다.
제7사단 제3연대는 1949년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덕유산, 괘관산, 반선리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1949년 7월~1950년 1월 국군 3연대 소속 군인들이 경남 산청군 주민 129명을 살해한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 희생 사건’은 빨치산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토벌군이 비무장한 농민들을 고문·총살하거나 총검과 죽창을 이용해 살해하였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에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녀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여자 41명 어린이 10명과 갓난아이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만행을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던 것으로 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비망록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하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친일 매국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들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민간단체에 조사를 의뢰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소행을 인민군에 뒤집어씌운 조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 1.2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산동면에, 국군 제12연대 1-3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지 구례중앙초등학교와 구례구역 등에 각각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집단 사살했다.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3월 28일부터 오대산 및 황병산 일대에서 끈질긴 공비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 기간에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 5개 지구에 대한 ≪토벌≫공세를 벌리고 이 지역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주민 약 4만 명을 학살하였다.
미군정 치하인 지난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거제 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수백 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청면과 장승포읍 주민들도 1949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국군 제16연대 등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 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反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때리기'와 '말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13년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위와 같이 한민족에게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미국에 빌붙어서 사는 이명박은 괴뢰도당 에 지나지 않고 이명박 정권은 괴뢰정권 이다.
직접 만행을 저지른 친일세력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주범은 무기를 공급하고 지시를 내린 미군입니다.
더구나 미군은 사람을 많이 죽인 친일매국노를 높이 평가해 주고 진급을 시켜 고무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Mark Gain의 Japan Diary 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와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신불산 공비는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의 공비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그 일부가 울산으로 이동해오면서 활동이 시작됐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군, 경과 민간 의용대의 작전은 1949년 말∼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감옥은 좌익분자로 넘치는데도 반정부 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정부 집단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공비들을 지원하는 북한과 그리고 북한을 지원 하는 중공까지 점령 할 수 있는 기회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전쟁만이 모든 것을 해소할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고 마국은 전쟁을 하기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준비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한국전쟁 전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흔히 보도연맹으로 지칭한다.
한국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감시할 목적이었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보도연맹에는 전향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
보도연맹은 북한이나 추종세력들이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 활동을 취할 수 있는 항시적 사회 불안 요인이었다.
이런 우려로 인하여 한국 전쟁 발발과 때를 맞춰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한국전쟁은 미국민 특히 군산복합체 집단들의 요구에 의하여 대륙 탈환을 목표 삼아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대륙 진군의 전진 기지가 되는 한반도를 완전히 평정 하고 평온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개시되자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시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고,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보도연맹원의 희생이 없었으며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은 경남과 경북 일부 지역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살해 형태로는 경찰이 트럭을 이용하여 창고 등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을 외딴 곳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하고 총살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는 전투가 전혀 있지 않은 제주도에서도 25일 당일에 검거되어 218명이 해병대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50년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 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도 그 해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대전지역에서도 집단처형이 이뤄졌으며 지프에 탄 미군 장교들이 '살육을 감독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처형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져 최소 10만 여명이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한국 전쟁 때 처형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이 처형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극단적인 반공산주의)과 무관한 일이 아니다.
1946년에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 의원은 1949년부터 상원에서 상원 행정운영위 소속 상설 반미조사위원회를 이끌며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일으켰다. 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매카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의 정치집회에서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이같은 폭탄적인 발언으로 적색분자 적발 소동이 일어나 미국전역이 반공산주의 극단적인 광풍에 휩쓸렸다.
이러한 매카시즘 광풍은 중국이 공산화되어 미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상실한 후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로 인해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의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하여 대통령 H.S.트루먼(1945~53년 재임)까지 공격당하여 매카시즘의 공포에 미 국민들이 떨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일을 하다 말고 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미국에서 추방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거나 훼손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릴까봐 반공에 앞장서야 했습니다. 설령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과 대량학살 시나리오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50년6월경에는 민간인들을 대량학살 함으로서 반정부 무장공비들의 활동은 수그러드는 추세였다.
1949년 8월부터 시작된 학살만행에 항거한 김달삼부대의 준동은 지역 곳곳에서 무장전투를 가져와 무장공비측과 토벌대 상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 왔으며,
이렇게 지역에서 많은 비극을 가져다 준 제3병단의 대장인 김달삼이 괴뢰군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점차 북으로 퇴각하다가 1950년 3월에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전투에서 사살되자 지역에서의 무장공비의 활동은 거의 약화되게 되었다. 그러나 김달삼부대의 중화기 중대를 이끌고 있던 강구면 금진동 출신의 박종화(朴鍾和)가 잔여부대를 모아 강철부대라 명명하고 동대산과 대둔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여 지역에서 또 하나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1950년 5월에 생포되어 이후에 이들 무장공비들은 뿔뿔이 흩어져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국내에서 무장공비의 준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로 되었다. 이는 곧 이어 일어날 민족대재앙인 6.25한국전쟁의 전조를 알려 주는 고요였다.
미국은 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마침내 준비한 대륙회복의 야망을 향해 줄달음질 고속도로를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매카시광풍을 등에 업은 미국은 중국대륙을 향해 준비된 질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매카시 광풍이 일어나도록 미 국민들을 선동한 집단은 전쟁에 목말라하는 거대 집단 군산복합체입니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는 집단은 돈이 쏟아져 들어왔던 전쟁이 없어지면 중독자가 마약이 끊긴 것처럼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아무도 전쟁에 응해오지 않을 것이므로 멕시코 전쟁 때 경험한 것처럼 상대에게 전쟁을 하자고 자꾸 자극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둬야 합니다.
미국은 강대국인 자신과 전쟁하자면 두려워 안 할 것이므로 미군도 철수. 방위선도 후퇴라는 미끼를 줘가면서 자극의 강도를 높여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전쟁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남북 간의 전쟁이 됩니다.
그리고 제3자인 미국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정의의 수호자로서 세계인의 지지와 찬성 속에 등장하여 참전하는 것입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하는 요심 전투를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즉,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1946~1949)에서 공산군에게 패퇴한 시기이므로 매카시 광풍이 일었던(1949~1954) 시기인데 미 정부는 그 당시의 미 국민의 요구에 역행하는 애치슨 선언을 하였다(1950.1.12). 이런 행위를 한 자들이 이후에 매카시의 색깔론을 면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치슨 선언 후 공화당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애치슨을 향해서 쏟아지는 매카시즘의 화살에도 불구하고 애치슨은 그 당시는 물론 그 후까지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나면서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도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렸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트루먼 정권에서 애치슨 선언이 나왔던 것은 전략적 기만전술에서였다.
1949년 6월 29일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 했다는 발표 역시 북한이 남침을 단행하여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발표였다.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남북이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세계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것입니다. 소련군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미군은 일부를 잔류시켜 한국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사단마다 미 군사고문관들이 배치되어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군 1사단의 미군 수석고문관은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연대에는 대위급을 고문관으로 배치하였다. 예를 들어 개성 12연대의 미 작전고문관은 다리코 대위 였다. 다리코 대위 역시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미국이 한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양민 수만 명을 죽이고 세운 괴뢰정부를 결사반대하는 한국국민의 손에 맡기고 미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소리이고 속셈을 감추기 위해 늑대가 내는 양 울음소리입니다.
1947년 당시 조선에 급파되였던 웨드마이어가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면 남조선이 ≪적화≫되어 공산주의의 파급을 도와 주는것으로 되기때문에 미국이 조선에서 도모하려는 문제들을 미영중소 4개국회담에서 풀며 거기에서 성공 못하면 유엔에서, 유엔에서도 해결 못하면 미국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조선반도는 지정학적 잇점을 지니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 정부의 사전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 중 하나로 요시찰인에 대한 검거 학살 계획이 있었다.
중국대륙을 목표로 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장해물을 제거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그리고 유엔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기 위해 6.25 전쟁발발 전에 미리 계획해둔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조직하는 작업을 일사천리 준비대로 신속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유엔담당 미 국무차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한국전쟁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소련이 유엔에 항의하여 불참한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은 전쟁발발 날짜를 잡았습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유엔을 보이콧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병이 쉽게 결정 되었다.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안보리에서 기권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파병될 수 있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참전의 결정을 이끌어 냈을 것입니다.
48년2월26일 한국에서의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보이콧으로 부결되자 미국은 유엔 총회에 상정하여 우리민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고 민족의 뜻과는 배치되는 남한만의 (( 이미 천명한대로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표결이 실시된 것이므로 이 결의안이 남한에만 미친다는 것을 회원국은 이미 알고 통과시킨 것이다. ))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민족은 스스로 선거를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을 우리민중들은 반대하여 항거하였고 많은 사람이 미군의 지령을 받은 친일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자주적으로 감시가 없는 자유스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를 하고 싶었고 친일매국노가 날뛰는 분단이 확실한 반쪽짜리 선거를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한국위원단(UNCOK)은 북한 남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유엔에 보고함으로써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개 섬에 불과한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가 22년 동안이나 유엔에서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물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지휘를 버젓이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을 쥐락펴락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잡지 《라이프》는 50년 8월호에서《전쟁개시에 이르러 이번 전쟁만큼 완전히 준비되었던 전쟁은 우리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썼다.
당시 미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한국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한국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한국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1949년 11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 ‘노랜드’가 이승만이 차린 초대연에서 이렇게 발언 하였다.
『나는 한국에 와서 반공태세가 정립된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특히 국군이 잘 정비되고 훈련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이 군대를 가지고 북진 통일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증가하여 북진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전쟁인 만큼 만일을 생각해서 새로 50만~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준군사적 조직에 망라하고 더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1950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북진은 하루라도 속히 하는 것이 유리한데 와서 보니 국군의 준비를 좀 더 빨리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더 준비하여 개전하면 국군의 승리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여 미군이 원조 또는 직접 참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949년 10월에 있은 국군사단장회의에서 주한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트는『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금후에도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세를 악화시켜 전쟁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이다,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 여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중앙일보≫1989년6월23일
북한은 무려 천 회 공격에도 남침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발발을 위해서는 남한군이 중화기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 괴뢰를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개시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였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군입니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도발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적이 쳐들어 온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괴뢰군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이렇게 하여 낙동강에 방어선을 치도록 하여 많은 인민군을 남쪽 끝에 묶어두고 인천상륙을 함으로써 남으로 유인한 다수의 인민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북침전쟁의 길로 내몰기 위해 1949년 한해에만도 10만5000정이상의 각종 최신보병총과 2000정이상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5000만발이상의 탄약 수많은 각종 포들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양의 포탄들,5000대의 군용차들과 79척의 함정과 20대의 비행기를 제공하였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두고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남한의 한개 연대는 북한의 한개 여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1951년판 258쪽
무기를 공급한 것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전쟁의 불집을 안심하고 터뜨리라고 공급한 것입니다.
한국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1월에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북진통일을 간청하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은 미국에 의해 발발된 전쟁이고 북한에게는 강요된 전쟁이었다.
6.25 이전에도 수차례 전쟁의 불을 지피기 위해 실제로 군사공격을 시도하였다.
‘호림虎林부대 사건’은 국군과 서북 청년단이 유격대를 조직한 다음 1949년 6월 29일에 설악산 및 금강산 줄기를 타고 들어가 원산 남방 안변 지구까지 침투한 사건이었다. 그 예로 1949년 6월 7일에는 남한 군이 북한군을 가장하여 38선 으로 부터 북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한 고지를 점령하기도 하였고, 같은 해 6월 17일에는 38선 이북으로 8킬로미터 떨어진 태탄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6월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하였었는데, 이 전투 때에는 개인 화기뿐만이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다. 처음에는 이 전투에 남한이 더 적극적이 였으나, 이후에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1949년 8월에는 춘천과 홍천, 그리고 인제 일대에서 남북한 정규군간의 전투가 무려 19일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남한 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함대습격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에서 강원도의 양양까지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말하자면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반도, 개성, 의정부, 춘천 그리고 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의 원인은 6.25 남침에 의한 것이 아닌, 여러 작은 북침전쟁을 수없이 도발한 데에 있었다.
반복된 북침에서 북침의 주체는 괴뢰군이 될 수 없고 당연히 지휘권을 쥔 미군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미국은 북한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미국은 이렇게 북한을 붕괴 시키려는 기도가 좌절 될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목적을 달성 하려고 계획 하였다.
애치슨 선언이 있기 전부터 북파공작원의 침입을 받아온 북한 정권은 미국이 결국은 전쟁을 통해 자신을 붕괴시키리라고 예상하였다.
1946년 미군 24군단 정보처는 산하에 ‘442CIC’라는 첩보부대를 창설했으며, 이 부대는 1948년 여러 반공단체와 통합해 KLO(Korean Liaison Office) 부대가 된다. (KLO를 흔히 ‘켈로’ 부대라고 불렀다) 8240부대로도 불린 켈로 부대는 특수임무의 수행을 위해 북한에 파견되어 적 생포 및 사살 적군 진지 주요 시설물 폭파 및 각종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첩보 수집 첩보망구축. 중요 요인의 암살. 주요 공공기관을 방화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등을 수행했다.
또한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물적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하며 임무수행 중 부상이나 임무수행 불가능 상태에서는 자결이나 자폭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을 들 수 있다.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북한의 3·1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소련군 노비첸코 중위가 터지려고 씩씩 소리를 내는 수류탄을 집어들고 주석단에서 내리뛰어 김일성 등의 지도부를 구했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노비첸코는 제대 후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다가 1984년 訪蘇한 金日成과 재회했다. 그후 노비첸코는 북한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고, 金日成과 의형제를 맺었으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당국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지원을 받았다. 2002년 8월 러시아를 방문한 金正日은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귀국길에도 보시비르스크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들을 만나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테러는 CIA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백의사가 일으킨 것으로 이 백의사와 CIC (주한미군방첩대) 가 공동으로 정릉의 대북암살단훈련원을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군번 없는 용사로 불리우는 북파공작원은 6.25전 해방 후부터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 하에 비밀리에 양성되어 전쟁 시에는 6,000여명에 이르렀다. 전시에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라는 정식 호칭이 붙여졌다.
미군정 치하에서 보내진 북파간첩 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10,726명에 이른다고 한다.
오늘날 테러와의 전쟁을 한다고 하지만 테러의 원조는 미국입니다.
테러는 막아야지 전쟁을 일으킬 구실은 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인다면 테러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살인의 규모로 봐서 비교가 되지 않는 테러보다 더한 테러가 아닙니까?
테러를 핑계로 테러보다 더한 테러를 저지르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이 우주에도 그런 후안무치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노벨상 시상식에서 오바마는 “평화 위한 전쟁은 불가피 하다”고 하였습니다.
뭘 위할지라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범죄입니다.
미국은 대놓고 죄를 짓겠다고 전 세계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오바마가 자신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군산복합체를 대변한 말이었습니다.
오바마는 이어서, 미국이 지난 60여 년 동안 미국민의 희생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는데 기여했고 미군의 희생이 독일에서부터 한국에 이르는 국가들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이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지라고 누가 요청하였습니까?
전 세계의 안보를 책임진다는 논리를 내걸고 전 세계에 군대를 보내 모든 국가는 미군의 감독과 지휘를 받는 국가가 되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미국은 전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산천에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시신을 방치해 두고 아무 일 없는 듯이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모를 부모라고 친척을 친척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포 속에서 번영을 누리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어도 생이별을 강요받으며 현재까지 65년 동안 살고 있는 세계 유일한 나라입니다.
제 나라도 마음대로 못가고 우리 안에 갇혀서 짐승처럼 살아온 지도 어언 65년이 됐습니다.
오바마는 60년전 한국전쟁이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킨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의 열망을 짓밟고 일본을 대신해 한국인을 다스리기 위해 한국인을 학살하고 제 맘대로 한국인이 목숨 걸고 반대한 이승만 괴뢰정권을 세웠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북한과 대륙을 집어 삼키는 침략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전쟁터로 만드는 역사에 없는 대재앙을 일으켰습니다.
현재도 미국 때문에 남북의 군인들이 싸우고 있는데 이게 평화입니까? 서해에서는 아직도 과거 친일매국노들이 하던 대로 충성경쟁을 벌리고 있습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미국 주인님 위세 믿고 부모형제도 모르는 물불 안 가리는 개가 되어 북한 형제를 물어뜯는 형국으로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오늘날 까지 혈육을 못 만나는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데 있지도 않는 평화와 번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해자인 미국은 느끼지 못하는 고문과 다름없는 고통을 우리는 현재도 받고 있습니다.
번영을 증진시켰다는 것도 한국인의 피 땀이 없이 미국이 한국의 번영을 증진 시켰습니까?
그리고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핵무기로 위협한 미국은 핵을 제거 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나라는 평화적인 핵도 가질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범국인 독일과 한국을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얼마나 원했는지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1946년 2월 26일에 국방경비대 제5연대장을 맡았고 그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되고 국방경비대가 정식으로 국군으로 재편되면서 제5연대장과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에 개성을 관할로 하는 국군 1 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1951년까지 사단을 지휘하였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 은 한국전쟁은 이미 1949년 5월의 하계 공세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고하였다.[백선엽. {軍과 나} 서울: 대륙연구소, 1989, 29쪽]
미국 국무부 정보분석국의 동아시아부 책임자인 존 메릴(John Merrill) 박사는 {한국전쟁의 기원} 에서
그리고 서주석(徐柱錫)은 1996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국가체제형성과정-제1공화국 국가기구와 한국전쟁의 영향”} 에서
각각 6.25이전에 이미 남북한은 교전상태에 있었으며 1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38선에서 작은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미국의 거대 방송매체들도 공산당은 무조건 악이라고 여기는 매카시 광풍에 동조하였다.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호간의 공격행위를 공산세력이 일으킨 도발로 축소 왜곡하였다.
미군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북한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의해 전쟁을 수행하는 한국군만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김일성은 일제 때부터 조선사람 끼리 전쟁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우익 독립투사하고는 어떤 일이 있어도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냉대를 받던 친일 세력들은 한국으로 남하하여 군대와 행정부의 각종 조직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북한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남북에 각각 이질적인 정권이 출범한 후 수년 동안 이와 같은 한반도의 극심한 혼란과 학살 및 충돌 상황은 미국 뿐 아니고 한반도 주변국에도 알려져 협의가 있었지만 북한의 우방인 소련과 중국은 잦은 침범으로 위협에 놓인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이 세계3차 대전의 시작으로 될 수 있어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공개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입장임을 밝혔다.
그러나 김일성은 38선에서 무력 충돌이 계속되어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국의 통치자인 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모택동은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이 그 후 수차례 그를 설득하여, 결국 중공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이 남침 하면 소련도 지원하기로 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으므로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침범하면 중국이 참전하여 전쟁이 확대될 것이므로 전쟁지역을 남한으로 한정하고 북한지역을 침범하지 말 것을 수차에 걸쳐 요구하였으나 이 요구는 묵살되었습니다.
8년간 항일투쟁과 4년간의 국공내전의 오랜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쳐 북한을 도와줄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을 예상치 못 했다.
남한에서 북한군을 물리친 유엔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북한 지역까지 침범해 들어갔습니다.
남한을 발판으로 하여 드디어 대륙 침략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중국은 자신의 요구가 묵살되자 동맹국에 의용군을 파병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세계대전으로의 비화를 막기 위해 이 전쟁을 조선족과 미국의 전쟁으로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항미원조 의용군을 조선족으로 조직하였다.
소련도 세계대전으로 되는 것을 염려하여 공식적으로는 참전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서 세계대전을 끝내게 한, 세계 최강임이 입증된 미국과의 전쟁은 북한을 비롯하여 주변의 소련 중국 등 어느 나라도 원치 않았으나 북한은 남침을 결행하였다. 미군과 그 휘하에 놓여있는 국군의 48, 49, 50년에 걸친,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북침으로 마침내 강요된 전쟁, 예고된 큰 전쟁이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북침으로 정권에 위협을 느낀 북한으로서는 근원지역을 공격하기 위한 남침 외에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 간의 전쟁 또는 동족간의 전쟁이나 동족상잔이란 소리는 미군의 침략을 감추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까지 10만 명 이상이 희생된 작은 전쟁에 세계는 관심을 쏟지 않고 조선 민족만 계속 피를 흘리는 상황이 계속되어 세계에 호소하기 위한 한국전쟁을 김일성은 결행 하였습니다.
북한의 발표나 성명으로는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여 전면적인 전쟁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당시에는 북한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의 몇 분의 1인 중국도 미국에 의해서 유엔에 가입을 못한 상태였습니다.
10억 인구는 무시하고 미국을 위시한 식민지 국가들 자기네들 끼리 세계평화 기구라면서 의논을 하는 꼴사나운 짓을 한 것이 유엔이었습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때도 유엔에 가입하고 못하고 하는 것도 미국이 제 맘대로 결정하였습니다.
한국전쟁은 당시 미국의 극단적인 매카시즘과 여기에 행동으로 나타난 팽창주의로 말미암아 예고된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남침에서 비롯됐다는 남침주장은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는 문서만 있을 뿐이고 반면에 미국에 의한 북침 주장은 문서로서 뿐만 아니고 문서와 당시의 상황이 딱 들어맞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침이냐 북침이냐의 결론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발생한 원인이다.
남침이냐 북침이냐보다 전면적 충돌을 낳은 요인이 중요하다 고 브루스 커밍스도 주장했습니다.
전쟁이 발생한 원인은 해방된 한국인의 독립국 열망과 미국의 대륙으로의 세력 확대가 상충했던 것이 근본 원인이다.
미국은 당시에 합리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는 대신에 무력으로 해결 하고자 하는데서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반인륜적 범죄를 수단으로 해서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 한국전쟁이다.
남한에서와 달리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아 적들의 계속되는 무력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소련 중국과도 6.25전에 이미 남침을 협의해 두었다.
전날인 24일이 토요일이어서 숱한 장병이 외출·외박을 나갔다. 부대원 절반 정도가 전선을 떠나 있던 상황이었다. 6월 들어 비상상황이 이어져 외출·외박을 금지해 오다가 모처럼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냈다고 누군가 설명해 줬다. 그나마 문산 방면의 13연대가 검열준비와 야외훈련으로 병력 대부분이 대기하고 있던 것이 큰 다행이었다. 라는 수기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내내 비상상황이 이어지다가 전쟁개시 날짜가 잡힌 그날에는 미군 지휘를 받은 육군본부가 병사들을 내보낸 것이다.
195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국장 장도영, 북한반장 김종필, 문관 박정희) 군 수뇌부는 바로 그 날 비상경계를 해제하였다. 그 날은 주말이라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외출했다. 그 날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었다.
전방부대의 중화기와 차량중 60%가량을 후방으로 보내는 등(일제 점검 목적임) 개별적으로는 이해가나 종합적으로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집중적으로 하여 이형근 장군은 저서 "군번 1번의 외길인생"에서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를 제기하며 군지휘부(이승만,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장, 신성모 국방부장관, 김경근 국방부차관)안에 통적분자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일각에서는 남침 유도설의 근거가 되었다.
미국은 이와 같이 공격용 중화기 부대만 남기고 방어목적의 부대들은 모두 철수시켜 놓았다.
그리고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한 군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남한군 당국은 백선엽 대령의 제 17연대가 1950년 6월 24일 전투를 개시하여 해주까지 북진하여 점령했다고 당시에 공식발표했었다.
미국도서 《미국과 한국전쟁》(일문판) 99쪽에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6월 24일 토요일 아침 트루먼은 고향 미주리 주에서 처, 딸과 같이 조용히 주말휴가를 지내기 위해 전용기 <인디펜던스>호를 타고 워싱턴을 떠났다. 이는 뜻밖의 일이였다.
트루먼은 1945년 2월부터 그때까지 5년이 넘는 재임기간에 주말휴가를 그렇게 여유작작하게 지낸 때가 없었다.
트루먼은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결단은 내 수중에》라는 좌우명을 내걸고 쉴 새 없이 모든 일에 참견하였다. 그것은 그 자신이 관록 있는 가문의 출신도 아니고 장성급을 지닌 경력도 없고 제1차세계대전시기에 겨우 포병대위로 복무한 초라한 군 경력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탓으로 상대방이 깔볼 것이라는 선입견이 언제나 머릿속에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자기의 승인이 없이 처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백악관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트루먼은 처와 딸까지 데리고 형이 경영하고 있는 자기 농장 개조문제를 토의하러 간다는 소문을 크게 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고향의 농장으로 가던 도중 프린드씨프 국제공항에 들러 확장공사의 완공 테이프를 끊고 연설 하였는데 그는 앞으로 평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평화의 화신처럼 생각하도록 연극을 놀았던 것이다.
대통령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 애치슨도 한국전쟁 발발전야에 메릴랜드 근처의 자기 농장에 가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이 도발되기 전야에 미국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다 자기 농장에 가서 주말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루먼이나 애치슨에게는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상황이 즉시 전달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국도서《한국전쟁: 대답 없는 질문》의 필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이상야릇한 일이였다. 미국이 싸운 세 번째로 값비싼 전쟁전야에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 다 외출하였던 것이다. 국무성에 모여온 중간급의 관리들은 정책 작성자들이 아니라 장관급의 명령을 집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전날 밤(토요일 밤) 미국은 완전히 해이되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국무장관뿐만 아니라 정책 작성자들 까지도 모두 부재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서방세계의 학자들까지도 이상야릇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될 줄 모르고 해이되어 미 국무성이 텅 비어있었다는 것인데 한 나라가 절대로 그렇게 되었을 수 없으며 만약 그렇게 되였다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분명하다. 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03.02.24일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리차드 코엔의 칼럼 '반전과 비논리(Antiwar and Illogical)'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말쟁이'는 워싱턴 정가에서 잘 안 쓰는 말입니다. 그건 워싱턴에 거짓말쟁이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중에 주워 담기 힘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워싱턴 정가에는 오래 전부터 그 말을 쓰지 말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습니다.
트루먼이나 애치슨뿐 아니고 미 정가에는 거짓말이 일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6.25전쟁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행동개시의 시간은 6월 25일 새벽으로 정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다.
일반이 휴일로 생각하고 있는 일요일 새벽을 기해 진격을 개시하면 불의공격의 효과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날 서울을 비롯한 전략적 지점들에 예비로 배치한 사단들에서는 하급사관 및 사병들의 외출을 허락했다가 개전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북한에서 공산군이 침입해 왔다고 비상소집을 하라. 그러면 일반시민들도 북한에서 먼저 쳐내려온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일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요일을 이용하여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쟁범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독소전쟁을 도발한 히틀러 도이칠란트군은 1940년 6월 22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소련에 대한 불의의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41년 12월 8일 일요일을 이용하여 진주만에 대한 불의의 타격을 감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를 믿는 미국, 남조선에서 일요일이 안식일이어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려는 틈을 타서 인민군대가 남침 하였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전쟁개시날짜를 일요일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 한국주재 미 군사고문단 단장이었던 로버트 준장은 전쟁개시날짜를 6월 25일 일요일로 선택하게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가 왜 25일로 택하게 되는가. 여기에는 우리의 심중한 의도가 있다. 25일은 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국가인 미국이나 남조선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고 있다. 우리가 일요일에 전쟁을 개시하였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전쟁을 먼저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승만은 국군에 북침공격명령을 하달하고서도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태평하게 낚시질을 하였다고 선전하여 세상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였다. 워싱턴의 휴가와 괴뢰군의 계속되었던 비상상태의 해제 그리고 이승만의 부슬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낚시질 떠난 일 이런 것은
각각 따로따로 생각해봐도 보통 때도 여간해서 일어나기 힘든 상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것들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은 의도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이런 비상식적인 3가지 일이 모두 6.25에 꼭 맞춰서 하나같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히 취한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밖에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도 우연으로 생겼을까요.
후퇴 명령에 거역하고 맞섬으로써 유엔군을 끌어오는데 차질이 생기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저히 예방하는 조치였습니다.
괴뢰군을 초기에 확실하게 후퇴시키기 위하여 괴뢰군 지휘관들의 갑작스런 대규모 인사이동을 전쟁발발 직전에 단행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해서 군 지휘관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 상태여서 인민군에 대해 자체 방어도 담당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어 미 고문단의 지시대로 무질서하게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두고 보자는 식으로 그렇게 공산군이라면 지옥까지 쫓아갈 듯이 덤비던 괴뢰군이 총 한발 쏘지 않고 물러나기만 했던 것은 후일을 도모 하는 뭐가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 유엔군이 합류하는 것은 문학작품에서 수없이 보아온 바로 그거였다.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악당을 물리칠 뛰어난 능력의 초인을 필요하게 만들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더구나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이런 해이된 사건들이 워싱턴과 이승만과 한국군이 완벽히 삼위일체를 이루어 일어났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은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철저히 준비된 전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내하던 북한의 반격이 있자 미국은 기다리던 것이 왔다.
드디어 미국이 간절히 바라던 대대적인 전쟁이 주어져 미국의 능력을 또 한 번 펼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박헌영 등을 간첩으로 들여보내서 북한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갔을 때 미국으로 암호 전문을 보냈다. 북한은 자신이나 소련이 발송하지 않은 이상한 전파가 어디론가 발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 풀 수 없는 암호 전신문은 김일성과 함께 간 일행이 발송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전쟁 준비 상황이었으므로 색출 보다는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덮는 수밖에 없었다. 소련에게 분열상을 보이면 믿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도 자신을 색출하여 전열을 흩뜨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암호발신을 감행한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전쟁 때 최고사령부주변에 반혁명분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조국의 운명과 직결된 극비자료들이 박헌영과 리승엽을 통해 계속 미국사람들에게로 날아갔습니다.
1952년 여름에 리승엽은 졸개들을 시켜 무전련락으로 최고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던 건지리골안에 미국비행기들을 수십 대나 불러들였습니다. 그 비행기들이 최고사령부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최고사령부 건물 곁에는 큰 시한탄까지 떨구고 달아났습니다. 내가 있던 집에서 그 시한탄까지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때 리을설이 비상회의를 열고 부관들과 호위성원들에게 결사전을 호소한 다음 당원증을 바치고 목도로 그 시한탄을 메다가 골짜기에 내던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을설은 최고사령부주변에 잠복해있던 암해분자들과 반동분자들을 모두 잡아냈습니다.
1952년 8월 3일 리승엽을 비롯한 13명이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되어 피체되었다. 박헌영도 그들이 체포당하면서 그들의 '반란'에 대한 후원자로 몰리면서 가택 연금 당하였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3월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몰려 체포되었다. 3월 31일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당내에서 종파를 조직하고 정보를 미국에 빼돌렸으며 한국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 15일,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북한에서 검사로 일하다가 남파되어 장기수로 복역했던 김중종은 공판을 직접 참관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중종에 의하면 문제가 된 것은 박헌영의 집 지하실에 있던 무전기로서 이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과 직접 접촉했던 증거라고 증언하였다.
박헌영은 6.25 당시 자기 집 변소에서 미군부대에 무전을 치다가 주세죽(前妻)에게 들켜 체포되었습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박헌영 공판 마지막 날, 판사가 박헌영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일제 때 변절했던 것에 관해서 솔직히 밝히지 않았느냐?" 그러자 박헌영은 "일제 때 변절한 것을 밝히면 날 총비서 시켜주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박현영이 변절한 것은 '고문'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고,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포섭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1945년 8월 15일 8.15 해방이 되자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빨리 나오시라'는 격문이 돌았다. 박헌영이 자작으로 붙였던 것이다.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내용을 담은 자료를 고스란히 접수하였고 이를 통해서 미제는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박헌영이 이러한 미제의 공작에 넘어갔던 것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양심' 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한의 친일파 당국은 김일성이 박헌영 일행을 숙청 했다고 비난 하였다.
그 후 박헌영 일당이 미국이 보낸 스파이였다는 것이 비밀 해제된 미군 문서에 의해 밝혀졌다.
가증스런 사기꾼 미국은 전쟁이 나자 뜻밖의 전쟁이 난 것처럼 연기하였다.
음모를 꾸미는 기관인 미 CIA 극동지역 고위 책임자였던 하리마오 는
6.25 한국전쟁은 미국의 작품이었다고 불편한 진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 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전개과정에서 미국은 한 민족에게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범했다고 증언 하였습니다.
증언에 따르면 미국은 자신의 국익만을 위해 한반도에서 무자비하고 처참한 전쟁판을 벌렸던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일본에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여 예상보다 빨리 종전되었고 그 이후 유럽 및 아시아에서 돌아온 500만 명의 참전 군인들의 일자리가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7%까지 떨어져 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났다. 1930년을 전후한 대공황이 다시금 오리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나와 워싱턴은 어디에선가 전쟁발발 같은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4백만 명 이상의 한국국민이 죽었고, 사망자의 4분의 3은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천만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집집마다 가족이나 친척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미군은 타민족의 시체 더미위에서 축배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 야수들이었다.
북한 김일성은 응당 남침의 권리가 있다.
남한은 조선 땅이지 미국 땅이 아니다.
김일성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해 왔지 북한 지역만의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다. 일제가 망하여 조국이 해방이 돼서 김일성은 자신의 선조의 묘가 있는 전주에 가서 조상께 인사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외세인 미국이 삼팔선을 가로막고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하는데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 따르겠는가?
당연히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 전체를 완전 독립시켜야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남조선에서 괴뢰 정부를 세우기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여자들까지 수만 명을 죽였다.
조선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가슴 아픈데
애국자 김일성이 우리민족이 그렇게 많이 죽은 걸 전해 듣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겠습니까? 이렇게 참고 참아 인내심에 한계에 달할 정도인데 이번엔 38선에서 남조선 군대를 지휘하는 전직 일본군 장교들이 자신을 냉대하는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휘하의 장병들을 이끌고 끊임없이 북침 무력도발을 감행하고 있어
죄 없는 남북한 장병들만 기약 없이 피를 흘리는, 조선민족이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는 이러한 수없이 반복되는 국지전을 끝낼 6.25같은 전면적인 전쟁 외에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2007년 04월 25일의 [중앙일보] 의 북침설을 잠재운다 는 기사를 보면
옐친이 넘겨준 문서에 김일성의 남침기획 과정 소상히 담겨있다 면서 문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50년 5월 29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당시 평양 주재 소련 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소련이 지원한 무기와 장비가 이미 대부분 북한에 도착했다"며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됐다"고 통보했다. 북한의 남침이 김일성의 기획과 소련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에 앞서 50년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인들의 제창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에 마오쩌둥은 중국이 북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했다 면서 한국전쟁이 김일성이 일으켰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말대로 하면 한국 전쟁은 승인이 있어야 행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김일성 보다 결정권한이 있는 스탈린이 일으켰다고 해야 맞는 것이죠.
조정을 받고 움직인다는데 전쟁을 일으키고 말고 할 수 없는 거죠.
그리고 전쟁이 나자 미국의 핵폭탄이 무서워 자국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국인민지원군 군복을 입혀 위장을 시키고 조종사들 간 교신도 중국어와 조선어로만 하도록 하고 압록강 유역 까지만 전투기를 보내고 탄로날까 두려워 도망치듯 되돌아간 소련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이나 타당한 이유가 있는가?
강력한 독재자 스탈린이 B-29기가 북한지역에 폭탄을 소나기처럼 쏟아 부을 때 미그-15기를 출동 시키지 않고 사람들이 죽고 집들이 파괴 되는 걸 보고만 있을 거면서 남침을 지시하거나 승낙 했다는 게 이치에 합당한 소리인가?
소련의 지시에 따를 만큼 북한은 핵무기도 몇 개 안 되는 소련이 미국보다 강한 나라라고 보았는가?
아니면 1949년 공산화된 중국이 땅 덩어리가 커서 강대국으로 보였는가?
김일성이 달나라에라도 가 있었는지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된 것도 몰랐는가?
미군이 철수해서 북한이 쳐들어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우리나라 사람을 많이 죽이고 군사식민지를 만들었는데 식민지를 포기하고 떠날 거면 우리나라 사람을 왜 많이 죽였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식민지라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란 말이 되어서 옳지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일컬어 질 만큼 세계 각국 거의 다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미국보다 훨씬 작은 영국도 그렇게 식민지가 많은데 식민지란 원래 많은 것입니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이 된 땅을 말합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인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내용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조선의 보호자가 되었고
1884년에는 프랑스가 월남을 보호하는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월남의 주인이 되어 자주권을 넘겨받았습니다. 즉, 조선과 월남은 각각 일본과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중국이 다 같이 외세인데 왜 미국만 가지고 비난 하냐? 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외계인이 지구를 공격했다면 우리는 당연히 미국과 손잡고 외계인의 공격을 물리쳐야겠죠.
그런데 이때 외계인이 한국인에게 나타나 미국이나 우리 외계인이나 다 같은 침략자인데 왜 미국편을 드냐? 고 하겠죠.
그러면 그 말도 맞는 것이 되겠죠.
우리나라가 과거에 중국의 침략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입한 이유는 고려 땅에 대한 욕심보다는 당시 중국왕조였던 송과의 관계단절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거란이 중국을 공격하는데 만약 고려가 거란의 뒤를 친다면 상당히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우선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하여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다. 서희(942~998)는 거란과 외교적인 담판으로 강동6주를 얻었다.
고려 때 몽고족, 조선시대는 만주족의 청나라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처럼 작은 우리나라는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중립을 취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당나라에 고구려를 받친 이후로 우리민족은 중국대륙의 한족으로 부터의 침략을 받은 역사는 없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에게서 일부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중국은 같은 황색인종으로서 인종적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오랜 역사를 통해서 동일한 가치관을 형성하여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 같은 이웃사촌 형제의 도움을 구하는 게 당연하지 인디언을 살육하고 한국인을 죽이고 양분하는 미국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외세들은 우리와 중국을 같이 묶어서 한 덩어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와 중국은 지리적으로 한배를 탄 운명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쇠락해서 대륙을 먹을 수 있겠다 싶으면 중국 침략을 위해서 우리나라는 짓밟고 지나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1592년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그랬고 1950년 미국의 트루먼 일당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그 길에 있는 눈이 찢어진 노란 원숭이일 뿐입니다.
반항하는 노란 원숭이는 죽여서 두려움을 주어서 얌전하게 길들여 자신들의 튼튼한 보급로를 닦고 나서 중국대륙으로 진출 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중국이 쇠약해지면 우리나라도 침략의 살육을 당하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한국 사람이나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하지 미국의 의원들은 한국을 대등한 관계가 아닌 상하관계로 생각한다고 한국의 방송에 출연한 미국의 한 의원이 말했습니다.
한미관계와 달리 북중 관계는 수평관계입니다.
그래서 핵무기도 만들 수 있고 인공위성까지 자유로이 쏘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이 민족분단의 원흉 이승만 때문에 무고한 우리 부모형제가 많이 죽어 틈만 있으면 처단하려고 하는데 증오의 대상인 이승만 수괴를 원한을 품고 있는 국민의 손에 죽든 말든 맡겨두고 떠났다는 뜻입니까?
김일성은 남침을 해도 미국이 남한을 방어하려고 군대를 보낼 리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은 남한 사정을 잘 알고 지휘했던 김일성이었기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김일성은 남로당에 가입한 사람들을 공개하지 말 것을 요청 했으나 박헌영 일당은 조직원들을 낱낱이 공개하여 동지들을 노출시켜 모두 죽게 하였습니다.
미국은 정당 활동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국가라는 그릇된 믿음이 공개하게 하였을 수도 있으나 남로당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미군이 공작원을 지도부에 박아두어 공개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북으로 올라간 남로당 지도부가 북한에서 정식 재판을 통해 간첩활동을 시인하고 처형된 것으로 봐서 그들은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한 것은 위장술 이었고 실은 미군에 매수된 끄나풀이었다.
해방 후 박헌영은 자신이 일제의 앞잡이였다 것을 감추기 위해 남로당을 이끌었으나 미제는 일제시대 ‘박헌영 변절’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박헌영을 협박하고 회유하여 간첩으로 포섭했던 것이다.
가짜 김일성이므로 소련의 지시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고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인 진짜 김일성 같았으면 민족끼리 싸우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거라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어느 게 바른 말인가?
스탈린은 조종사들 간 교신도 중국어와 조선어로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종사들은 상부의 이런 명령으로 인해서 적기와 공중전이 시작될 때 우군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고 있으며 전투가 시작되면 러시아어로 소리 지르게 마련이지만 공중전 중에 교신을 머뭇거리는 경우가 많아 위험에 빠져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어 스탈린이 매우 신뢰하고 있는 독소전쟁의 영웅 이반 코제더프가 건의 하니 스탈린은 뭐, 그 명령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전쟁에 개입하고 있지 않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것이었다. 우리 소련민중의 조종사들이 그것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다면 당연히 풀어줘야 하지 않겠나 하며 흔쾌히 이를 허락했다.
이처럼 스탈린은 자신들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소련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무서워 숨는 데만 몰입하고 정식 참여도 못 했는데 한국전쟁이 미소의 전쟁이었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미소의 대리전쟁도 아닙니다. 미국은 직접 적극적으로 참여 했습니다.
소련이 무서워 몸을 사린 한국전쟁은 주체국인 미국 북한 중국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대륙침략을 획책한 전쟁입니다.
당시 북한이 6.25남침 이전에 중국, 소련과 남침을 논의 하였다는 것은 끊임없는 미국의 북침도발로 인한 전쟁요구에 약소국 북한이 혼자 힘으로 감당하지 못해 지원을 요청한 것이고 소련과 중국은 북한이 응당 남침의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강대국 미국의 횡포에 대해 약소국 북한에 도움을 주기로 6.25남침 이전에 약속한 것이다.
북한은 전쟁의 권리가 있으므로 스탈린이 남침하라 마라할 입장이 아니다. 남침은 스탈린의 승인 사항이 아니고 북한이 남침의 권리를 행사했을 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것도 소련이 혼자 미국을 상대하기는 두려워서 중국이 참전한 뒤에 비로소 도움을 주겠다는 것이다.
미군이 북한 전 지역을 맹렬히 폭격하더라도 소련군이 북한을 돕지는 않았다.
한국전쟁은 6.25 이전에 시작됐으나
북한이 반격할 권리를 6월25일에 행사한 것일 뿐이다.
약소국 북한이 강대국을 상대로 남침계획을 세웠을지라도 남침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세우는 게 당연한 것이다. 반격, 즉 남침 시기의 선택은 북한의 권리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듯이 전쟁 시작일은 6월25일이 아니다.
권투에서 상대방이 약한 jab을 여러 번 얻어맞다가 강한 punch를 한번 날리자 그때부터 경기가 시작됐다고 우기는 경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남한 민중들은 자신의 정부나 자신의 군대를 갖지 못했다. 남한에는 남한 민중들이 결사반대하므로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미국의 괴뢰정권이 있고
미군과 그리고 미군의 명령에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친일파들이 거느린 괴뢰군이 있었다. 남한은 아직 국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승만 꼭두각시는 있지도 않는 국가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구실로 국가보안법을 만들었다. 국가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구실로 미 식민지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법이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노릇을 하는 땅을 말합니다.
김일성은 남한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고 남한 인민을 학살하고 남한인민들이 결사적으로 싫어하는 괴뢰정권을 세운 미국과 전쟁을 한 것이다.
김일성은 남조선인민들을 대량 학살하고 끊임없이 북침을 명하여 남북의 군인들을 죽게 하는 미국을 몰아내고 전체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조국해방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아니더라도 조선민족이라면 누구든 침략자 미국을 몰아낼 전쟁을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북한에서 소련군이 우리형제를 대량 학살해 죽인다면 남쪽에 있는 우리는 분단됐다고 바보같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아니면 북한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미국이나 일본의 도움을 받더라도 싸워야겠는가?
더구나 38선에서 소련군의 명령을 받은 매국노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끊임없이 작은 전쟁을 벌려 남북한 우리 겨레인 군 장병들이 죽어 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장병들이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이때 북한동포를 구출하기 위하여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면 우리 남한이 북한을 침략한 걸로 되는가?
김일성은 해방직후 중국혁명을 도와주기 위하여 수많은 항일혁명투사들을 동북지구에 파견하였습니다.
일전에 일본관동군도 김일성장군이 영도하는 조선군대라면 꼼짝 못하고 손을 들었는데 우리 같은 거야 어림도 없어. 하면서 국민당 군대는 달아났고 그래서 조선인 부대만이 아니고 중국인부대에 조선사람 몇 명만 있어도 그 부대는 전투에서 패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중국해방전쟁에 참가하고 있는 전체 조선 사람들이 중국동북지방이 해방되였다고 싸움을 그만둘 것이 아니라 중국혁명이 완전 승리하는 날까지 끝까지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당시 모택동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 오성붉은기에는 조선인민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1950년 4월 그들은 중국해방전쟁에 참가하여 받은 기념훈장을 앞가슴에 번쩍이며 압록강을 건너 꿈결에도 그리던 조국 조선으로 돌아 왔다.
그런데 그들 조선의용군들이 중국 땅에서 국민당군대와 싸워 승리하고서 간뎅이가 부어 (원폭도 하찮게 여기고?) 남침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남침을 주도했더라도 2천회에 걸쳐 도발해오는 괴뢰군에 무한히 인내하기에는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라면 정당하고 정당한 남침인 것이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 원조만 받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주은래 김일성 국경 협정에서는 백두산일대의 김일성 항일 유격지가 북한 땅에 편입되었다.
한국전쟁은 북한 또는 조선족과 침략자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한국군은 처음부터 맥아더의 지휘 하에 있었다.
1948년8월25일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군대에 대한 지휘권과 군사기지 관할권을 협정으로 명문화 하여 확고하게 틀어쥠으로써 한국전에 사전 대비하였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로 군 수뇌부를 조직한 한국군은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명령에 움직이는 괴뢰군으로 전쟁을 치른 것이다.
1949.6.29 주한미군 철수 완료라는 발표는 거짓이고 사실은 미 군사고문단 이란 이름으로 500명의 미군장교들이 잔류하여 괴뢰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이 있자 북한군은 신속히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였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였고 더구나 유엔군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보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보복 아닌 보복이 점령지에서 있었다.
평화의 상징 유엔군은 침략자를 물리친 목적을 달성하고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피에 굶주린 정복자가 되어 북한을 침략하였다.
{지옥에서 온 악마}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비 무장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이러한 범죄행위는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여 파악된 것이다.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 와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에 제시된 증언에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미군에 대항한 적이 없었다. "미국사람들은 신사라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인은 기독교도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는데!" 펠톤이 그 노인에게 기독교인이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니까 그제야 "나는 일생동안 기독교를 믿어왔소.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일컫는 자들이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을 본 이후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군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연약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Felton 1953, 133-35).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낟알이 여물기만 기다리던 전답의 곡식을 불살라 버리고 또 아무런 군사시설이 없는 농촌의 평화스러운 새벽에 폭격으로 진동시켜 할아버지와 여러 형제가 화염에 싸여 죽게 한 것도 미국 군인의 소행이었습니다...........
양민학살과 파괴행위에 대해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보고서는 이것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작위적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쟁범죄이었다고 규정짓고 세계법정에 출정시켜 책임자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해도 유엔에서 이스라엘 규탄결의안 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나라, 미국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국제사회나 유엔은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는 허수아비입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흉악한 범인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한사람을 잡기 위해서 아프간 국민을 대량 학살한 세계 최대의 살인마 미국, 그리고 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고 세계를 속이고 이라크를 침략한 사기꾼 미국에 대해서 세계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기꾼 말이 옳다고 수긍해야지 만약 바른 말을 했다가는 반미성향의 인물로 낙인찍혀 몰락하게 됩니다.
세계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런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유엔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고 자신의 지배권역을 넓히고 영향력, 세력을 끊임없이 넓혀나가는 세계 유일한 국가 입니다.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인 제임스 k. 폴크(James k. Polk)의 명령을 받은 자차리 테일러(Zachary Tailor) 장군이 멕시코 국경으로 내려가 멕시코군을 자극하여 전쟁을 시작하도록 부추겼으나 멕시코군이 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도발적인 자극의 강도를 높이고 마침내 멕시코 침략전쟁(1846년)을 일으켜 멕시코 땅을 빼앗은 비열한 수법을 한국전쟁에서 다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1898년2월15일 미국 시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아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스페인은 국제재판소나 또는 중립국과 사건을 공동 조사하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조사했다. 그 후 함선이 외부로부터 받은 공격으로 폭파되었다고 발표하고 함선을 바다 쪽으로 끌어내 외부에서 조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스페인 전쟁 후 13년이 지난 1911년에 주목할 일이 벌어졌다. 함선 메인이 인양된 후 선박업자들이 몇 달 동안 조사한 결과 함선이 내부에서 폭파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외부 공격 설을 뒤집는 이 조사 결과를 부정하던 미국 해군은 폭파 사건 후 90년 만에 인정했다. 미국이 스페인전쟁을 일으키려고 함선 폭파 사건을 꾸몄다는 음모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미국정부는 “아폴로는 달에 가지 않았다”는 진실을 음모론 이라고 폄하하듯이 당시에도 음모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1812년 6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제4대 미국 대통령, 그리고 당시 켄터키 주 출신의 호전적인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비롯하여 캐나다를 정복하려는 땅에 굶주린 전쟁광들의 선동으로 미군은 캐나다를 급습하여 토론토 등 전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러한 부끄러운 만행의 역사는 숨기고 오히려 영국이 미국의 항로를 방해하고 미국 선원들을 강제로 영국군에 징집시키는 것에 반발해서 일어난 분쟁이었던 것으로 역사의 진실을 왜곡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케네스 C. 데이비스가 이 사실을 폭로했고 브리타니카(Encyclopedia of Britanica) 백과사전에서도 미국이 영토 욕으로 1812년 캐나다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은 다른 나라를 자극해서 전쟁을 시작하도록 부추기고, 사건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만든 사건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리고 추악한 소행을 감추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였습니다.
이상의 전쟁들은 지구상에 공산주의가 생기기 전의 일로서 이념과는 전혀 무관하고 미국이 인디언을 살육하고 개척이란 미명하에 영토를 확장하며 성장해서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팽창주의에 기인한 것입니다.
군수업자는 자기회사의 무기를 군대가 사용하도록 하기위해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군수업체와 군부가 결탁하게 된다. 이렇게 군부와 대기업인 군수업체가 유착된 형태를 군산복합체 라 한다.
미국의 태생적인 팽창주의는 군수산업을 발전시켰고 군수산업은 로비를 통해 정치인과 결탁하여 군산복합체로 성장했으며 비대해진 군산복합체는 생산한 무기를 쌓아두지 않고 소비할 전쟁이 필요 하였고, 이런 전쟁의 욕구로 팽창주의는 더욱 고조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갈망한 전쟁을 통하여 해외시장을 확장하고 개척하여 국익이 확대되어 나아갔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군산복합체들의 요구대로 북한에 수많은 폭탄을 퍼부어서 소비시켰으나 중국이란 거대시장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결론으로서 한국을 점령, 군사식민지화 하고 대륙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한국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팽창주의에서 출발합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 죄가 없는 전쟁 상대방을 악당으로 선전 선동하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상대가 작은 나라일 때는 미국에 맞서는 전쟁에 나오도록 하기위해 사전에 전쟁발발 시나리오가 더욱 요구됐습니다.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758-1831)가 1823년 12월2일 의회 국정연설에서 남북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상호 불간섭 원칙을 선언했다. 먼로독트린, 먼로선언, 먼로주의, 고립주의 등으로 알려진 이 선언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나 개입, 간섭주의에 대비되는 고립주의의 전형처럼 알려졌지만
'먼로 선언'의 본뜻은 "아메리카대륙은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식민지화 대상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1808)은 중남미주 사람들에게 궐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라는 신호가 되었다. 그 결과 1822년까지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 주에서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이 독립을 쟁취했다.
'먼로 선언' 이러한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먼로 선언'은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 주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는 정책입니다.
한국전쟁도 이러한 팽창주의의
일부분일 뿐이며 추악한 전쟁이
이념전쟁으로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습니다.
세계인들의 대다수는 한국전쟁이 미국의 침략야욕을 채우려는 더러운 전쟁으로서 잊혀 진 전쟁, 정확히 말하면 잊고 싶은 전쟁이지만 한국인에 있어서는 고마운 천사나라 미국이 한국을 지켜준 전쟁 또는 공산주의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숭고한 전쟁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정회담 중에는 공산 측 대표단의 경호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한 수많은 위반사항을 저질렀으며 중립지역에 대한 포격과 기관총사격을 가하는 악랄한 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미군사는 비난이 일자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3년7월27일 북한의 남일과 미국의 해리슨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이후에
대륙으로의 팽창 야욕을 채우지 못한 좌절감에 빠진 미국은 패배감과 분노를 타락하고 야만스런 보복행위로 표출시켰다.
하나는 협정 서명 1시간 20분 후 미국 세이버 제트기 4대가 중국영토 100Km내에 있는 민간비행장에 침투해 소련 민간 항공기를 폭격해 15명의 승객과 6명의 승무원을 살상했다.
또 하나는 중폭격기 편대가 평양시를 마지막으로 강타한 일이다. 울분에 휩싸인 야만적인 광기의 표출로서 ‘자유와 평화의 사도’라는 탈을 쓴 야누스적인 미국의 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북방한계선=NLL 을 일방선포한 장본인)는 의회에서 귀국보고를 하면서“북조선은 초토화되어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앞으로 한 세기 정도는 다시 문명사회를 일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부의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역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사령관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실패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선임자들인 맥아더와 리지웨이 장군들도 동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유엔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자유대한을 되찾았는데 유엔군 사령관은 실패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엔군의 목적이 대륙획득 에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 발언이었다.
또한 1951년 5월 15일에 열린 의회청문회에서 미국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래들리는 “조선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 고른 적과 잘못한 전쟁 (the wrong war,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 and with the wrong enemy)”이었다고 증언하였는데 이 말은 미국이 적과 그리고 전쟁 선택 장소를 잘못 골랐다는 뜻으로 침략전쟁을 시인한 발언이었다.
휴전협정에 남한은 참여도 서명도 하지 않았으나 현재까지 휴전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남한이 미국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의 지배하에 있는 미국의 군사기지인 남한과 초강대국에 맞서고 있는 강력한 독재체제인 북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막아야할 세계 공산화의 위협이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자본주의로 돌아선 이후에도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이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 상대방을 겨누고 있는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국전쟁이 미소 양진영 사이의 이념전쟁이나 미소의 대리전쟁이란 소리도 미국과 소련이 이념이 같아진 오늘날에도 한반도뿐만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전쟁의 위험은 변함이 없고 따라서 그와 같은 주장은 허위임이 드러났습니다.
전 세계가 이념이 같아진 오늘날에도 국제사회나 유엔에서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 지배야욕은 여전하고 미국이 어느 나라를 침략할지 모르는 전쟁위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념이 해결되면 미국은 다른 구실을 내세워 각국을 침략합니다. 소련군을 몰아낸 아프간과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닙니다.
국제사회나 유엔을 지배해서, 민간인을 살육하는 이스라엘을 비호하고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러도, 이라크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가혹행위를 하여 인권유린의 범죄를 저질러도 비난이나 제재를 받지 않고 막가파식으로 뭐든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미국은 세계인류와 공생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어 기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자신이 지배하는 범위를 끊임없이 늘려가는 막가파 국가입니다.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탄은 가공스런 살상을 저질렀다. 높은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조그만 산탄으로 사방에 퍼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를 태워버리고 사람의 살에 붙어서 몸을 불태워 버린다.
네이팜탄은 투하하면 공중에서 터지면서 네이팜에 불이 붙어 땅에 흩어지는데 3,000℃의 고온을 내며 불바다를 만드는 야만적인 폭탄입니다.
네이팜탄은 월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하여 전 세계인의 비난을 받은 폭탄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 한국전에 사용되었고 피해는 더 컸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B-29 편대는 북한에 매일같이 800 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중에는 대량의 순수 네이팜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부터 10월 말까지, B-29는 네이팜 320만 리터를 쏟아 부었다.
1950년 7월, 대전 전투에서 생포되어 북으로 끌려간 미 제24 사단장 윌리암 딘(William Dean) 장군이 후에 말하기를, 그가 본 마을이나 도시 대부분이 그저 눈 위로 비죽 솟아 나온 폐허들 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가 만난 거의 모든 한국인이 폭격으로 인해 가족들을 잃었다.
한국전쟁 말 즈음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조차도 워싱턴에 이렇게 말하였다.
2차 대전 말, 네이팜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누구도 네이팜이 모든 민간인을 처치해 버릴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었다고.
미국은 남한에서 북한군을 물리치고 나서 북한지역을 침략해 들어가고 북한과 동맹관계인 중국을 침략해서 상실한 거대중국 시장을 되찾는 데에 한국전쟁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 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이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한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았습니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전에 더 이상 목표물들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유엔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하고 필요이상으로 힘없는 양민들을 아이와 여자들까지 불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고 식수에는 독극물을 풀어 놓고 북한에는 살지 않는 유해 곤충들을 대량으로 살포하는 등 대륙을 침략하는데 후방에 장애물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서 미 종군기자들이 석기시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 시켰습니다.
미국은 북침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한반도에서 군사작전 중 일본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박해를 하였다. 즉, 1949.9.8일 재일한국인 조직해체와 재일한국인 재산몰수 그리고 간부 추방령이 맥아더에 의해 내려졌다.
요크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강의하면서 킬램 시니어 펠로십 등 많은 학문적 영예를 안았던 ‘스티븐 엔디콧’과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미육군 지휘 및 일반 참모 대학, 미 공군사관학교, 미 공군 공중전 대학 등의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토론토의 요크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해거먼’ 의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란 책에는
미국은 일본 전범과의 비밀거래를 통해 세균전 실험 정보를 얻었고 결국 초기 한국전쟁에서 이 무기를 실험,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 중국, 북한, 캐나다, 호주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비밀문서 등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해 주장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간 생물학전을 부인해 온 미국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미국의 생물학전 프로그램이 순수하게 방어 및 보복 성격에 머무른 게 아니라 공격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1951년 12월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러빗은 생물학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최단시간 내에 실질적인 준비 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몇 주 뒤 공군 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는 그 같은 능력이 '신속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9월 6일 일요일, 마지막 남은 미군 전쟁 포로를 실은 트럭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던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 방송은 한국에서 생물학전에 참가한 것을 시인한 미 공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 38선을 넘은 첫 번째 지프차에는 이 25명 중 3명의 대령인 앤드루 에반스, 워커 마후린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프랭크 슈와블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송환된 뒤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위협 아래 자신들이 종전 자백을 철회했다.
52년 3월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의 보고서는 미군에 의해 세균전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했다.
협회의 조사단은 북한 곳곳에서 페스트, 콜레라, 티프스, 출혈열, 일본 뇌염등의 균을 가진 특별한 벼룩과 파리, 썩은 생선, 거미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할 곳에 집단으로 뭉쳐 있었다. 이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미군 비행기가 아주 낮게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곤 했던 것이 확인됐다.
이러한 내용은 52년 6-8월 사이 작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의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세균전 사실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무기제조 지도자 이시이 시로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을 나타냈다.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은 일본인과 나찌 세균전문가를 고용하였고, 제네바 협정으로 사용금지된 신경가스 사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이를 부인하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고 적고 있다. 이시이 시로는 마루타, 즉 인간생체실험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731부대의 수많은 생체 실험 데이터들은 전쟁 종결 후 미국이 입수했다.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실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731부대의 수장 이시이 박사는 후에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하였다.
1951년 5월 6일 남포시에 4차례에 걸쳐 맹폭격을 감행하면서 독가스탄을 퍼부어 그 부근인민들을 포함하여 1379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1951년 7월 6일과 9월 1일 원산지구와 황해도 여러 지대들에 최루성 및 질식성 독가스탄을 투하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1952년 2월 27일부터 4월 9일까지 기간에 공화국북반부의 여러 지역에 33차례에 걸쳐 독가스탄을 뿌렸다.
1952년 9월 간리지역과 연안지방에 주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독을 묻힌 100원짜리 가짜 돈과 삐라를 대량 뿌렸으며 1952년 5월 18일에는 대동군에 독을 묻힌 조개를 낙하하였다.
휴전협정은 포로송환문제 때문에 2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이 지연 때문에 전쟁은 무의미하게 계속되어 남측이 13만, 북측이 25만 가까이 사상자를 내는 반인도주의적 결과를 내었으며, 남북주민의 전쟁참화와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또 결과적으로 국군포로나 인민군포로의 이산가족문제를 대거 남겼다.
이의 근본적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 제네바협정 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 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자동송환원칙을 위반하고 자유송환원칙을 요구한 때문이다.
49년의 제네바협정도 공정한 자유의지의 확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고려되어 자유송환 대신 자동송환원칙이 채택되었다.
미국은 이 자유송환원칙을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하고서 겨우 두 달 만에 뒤 짚는 행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북한에 수용되어 있는 미군포로의 송환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출신인 애치슨 국무장관도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대대적인 폭격과 무장도발 강화로 이를 관철시켰다.
우리 부모형제를 무수히 죽이고 국제조약을 제 맘대로 짓밟아 버리는 미국은 그냥 미국이 아니고 미 제국주의자인 것입니다.
2010년 우리는 일제치하 35년 그리고 미제치하 65년 합해서 100년을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같이 불법을 주장하며 시간을 끌어서 포로를 가두어 두고 세균무기를 시험하여 포로들에게 반인륜적인 고통을 가하였다.
1950년 11월 20일 부산 거제리 제100호 포로수용소 관하 제7호 수용소의 포로가운데서 주로 인민군포부대에 복무했던 포로들을 수용소 동남방 6키로 미터 지점에 끌고 가서 앉거나 누워 있도록 하고 그로부터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미 배치해두었던 탱크들의 중화기로 집중 사격하여 인민군 포로 전원을 학살하였다. 1951년 3월 ≪유엔군총사령부≫의 위생복리처장 젬스준장이 인솔하는 세균살륙정은 비밀리에 거제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인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세균무기시험을 진행하였다.
1952년 2월 18일 거제도 제62호 포로수용소에서는 우리측 포로들이 ≪민간억류자≫로 되겠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약 1000명의 미군병력으로 수용소를 포위하고 25정의 중기관총, 63정의 경기관총을 란사하여 102명의 우리 측 포로들을 즉사시키고 26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952년 5월 27일 거제도 제77호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른바 ≪자원송환≫을 반대하고 공화국북반부로 돌아갈것을 주장하는 우리측 포로 800여명을 화염방사기로 소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1952년 6월 10일 거제도 76호 포로수용소에서 27대의 땅크와 12문의 포를 동원하여 화학탄을 발사함으로써 227명의 인민군 포로들이 희생되었다.
1952년 7월 7일 거제도수용소 소장 보우트너는 작업에 동원시킨다는 구실밑에 거제도수용소 4대대에 수용하고있는 인민군포로 120명을 특별한 장치를 한 두대의 자동차에 갈라 싣고 4시간동안 감금한 채 가스무기시험을 하여 그들 전부가 두 달 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하였으며 불구자가 되게 하였다.
1952년 6월 10일 제76호 포로수용소에서는 인민군 포로들이 ≪개인면회심사≫를 거절한 것과 관련하여 4000여명의 무장인원과 22대의 탱크, 20문의 포, 40정의 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동원하여 무려 4시간에 걸쳐 무차별사격과 독가스를 살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276명의 포로들이 살해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났다.
1952년 8월 13일 용초도 제2포로수용소에서 미국침략자들은 자그마한 철조망안에 수많은 인민군포로들을 가두어넣고 2개소대병력을 동원하여 1000여개의 가스탄을 폭발시킴으로써 350명이상이 중한 화상을 입었으며 44명이 의식을 잃고 4명이 희생시켰다.
당시 자료에 의해 파악된 학살 당한 인민군 포로 수는 3만 3600여명에 달하며 부상당하였거나 불구가 된 수는 수만 명에 달한다.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들은 고문하지 마라고 아우성쳤습니다.
1992년 12월 14일 경남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 용신마을 제 6포로수용소 화장실 자리에서 간이 경지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 기사 김동윤(당시 26세)씨가 포로들의 내부관리 서류 50여점을 발견했다.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으며 편지 끝 부분에는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 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현대사의 진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를 처음 필사했던 당시 거제 신문사의 서용찬씨는 편지를 만든 천이며 내용들을 볼때 당시 포로들이 직접 쓴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52년 8월 영(英) 연방군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도니 밴크로프트 소령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미군들은 제네바협약을 위반하고 많은 포로들을 학대하여 포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개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방독면을 쓴 미군들이 생체 실험에 항거하는 포로들을 진압한 후 수용소 밖으로 나오고 있는 장면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습니다.
1951년 5월 18일 UPI통신의 전신인 당시의 UP통신에 의하면 선상의 실험실에는 3천 여회나 범죄적인 시험이 행해져 그 결과 거제도에 감금되어 있던 12만 5천여 명의 인민군포로 중, 1400명은 중태에 빠지고 나머지 중 80퍼센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걸려있다 라고 보도 하였습니다.
유엔군은 세계최강 미국과 약소국 북한과의 전쟁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침략자를 응징하는 군대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유엔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 조직한 군대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란 칭호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도 가장 먼저 공을 세우려는 전쟁광 맥아더는 1950년 7월 9일, 전쟁이 터진지 이 주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워싱턴의 리지웨이 장군에게 긴급 서신을 보냈다.
A 폭탄을 맥아더에게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A 폭탄은 핵폭탄을 가리킨다.
맥아더는 북한에 이어 중국까지 점령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정권에서 소외당한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공화당 우파들에겐 맥아더는 집권을 위한 대안 카드로 떠받들어졌다.
트루먼이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맥아더에게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고 공화당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맥아더는 정치적 야심을 품어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전국장인 찰스 볼티(Charles Bolte)에게도 맥아더는 자신의 비범한 야망을 전달하였다. 전쟁을 장악하여 북한을 점유한 다음, 중국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참모본부에서는 핵폭탄의 사용 불가 결정을 내렸다. 핵폭탄까지 사용할만한 목표가 아니고 사용 후에는 오히려 미군에게 장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침략 계획은 맥아더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니고 미 행정부의 사전 계획이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당시 미국이 450 기의 핵폭탄을 준비해둔 반면, 소련에게는 25기 뿐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반응에 대해 별 걱정을 안 하고 있었다.
미국이 강적이 있어서 핵폭탄을 이렇게 많이 비축해 둔 것이 아니었다. 북한만을 상대하기 위해서 비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많이 생산해둔 이유는 핵으로 위협하여 중국을 삼키고 나아가서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미국은 치밀하고 구체적인 핵무기 사용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셰이크다운(Shakedown) 계획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그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이고 핵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핵심은 보복공격을 당할 위험 없이 소련을 완벽하게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제3차 대전이 발발한 지 6일째에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개시한다. 미국 본토와 유럽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소련의 70개 도시에 모두 133개의 핵폭탄을 투하한다. 소련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핵 보복의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한국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중국인민 의용군이 한국전에 개입할 당시 미국은 또다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핵무기 사용은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에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 전투기를 제압하고 안전하게 실어 날라야 하지만 미국은 당시 소련의 비밀병기 미그-15기를 제압할 수 없었습니다. 항공기의 기술력에서 앞선 소련으로부터의 핵 보복을 받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이를 무시하고 무모한 3차 대전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격추되거나 추락한 공군기는 미국이 1천106대로 소련 공군기의 335대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11월8일. 이날 소련 공군의 미그-15 전투기는 지금의 단둥(丹東)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F-51기를 격추해 첫 전과를 올렸다. 또 이틀 뒤인 10일 신의주 상공에서 '하늘의 보루'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 1대를 격추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중국인민 의용군을 파견할 때 소련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소련 공군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해 작전 범위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제한했다.
한국전쟁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한 첫 번째 전쟁이었으며 더러운 반칙을 하여 죽어서도 영원히 불명예를 씻지 못하는 전쟁이 되었다. 그 만큼 도덕적으로도 패하여 철저히 패배한 전쟁이었다.
하버드대 ‘제프리 페렛’ 은 ‘전쟁으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책에서
그리고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던 보스톤 대학의 ‘앤드류 바세비치’ 교수는 ‘새로운 미국의 군국주의’ 라는 책에서 미국인들이 어떻게 전쟁의 유혹을 받는가 하는 것을 파헤쳤습니다.
미국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3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을 하였고 패배를 모르던 전쟁광 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거대제국 미국이 조그마한 한반도를 차지한 걸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세계를 놀라게까지 하였으니 미국의 야망은 하늘 높은 줄 몰랐습니다.
1951년 4월12일은 미소 양국의 공군사에 희비가 엇갈린 하루로 기록됐다.
미군은 중국인민 의용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철교와 주변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72대에 달하는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한반도의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약 40분에 걸쳐 치러진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단 한대의 손실도 없이 B-29 폭격기 16대와 F-80 전투기 10여대를 격추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며, 미 공군사에 이날은 ‘검은 목요일’로 기록됐다.
그 결과 극동 주둔 미 공군은 전략 폭격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원폭을 투하하겠다는 구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모의폭격 실험까지 실시하면서 북한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원자폭탄으로 계속 위협하였다.
B-29는 37개월의 전쟁 중 21일을 제외하고는 내내 하늘을 누볐다. 약 21,000 회의 출격에서, 167,000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장소는 북 70여 곳, 남 30여 곳 정도이고 희생자 수는 약 500 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인민 의용군한테 밀려 퇴각하면서 원주, 의정부 등 작은 도시들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네이팜탄이 이 도시들을 뒤 덮었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는 점령했던 마을의 학교나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고 퇴각한 반면, 유엔군이 퇴각 할 때는 주둔했던 도시를 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인민군은 심지어 패해서 퇴각하더라도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외신들은 평했다.
사찰 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임진왜란 때의 왜구들 보다 더 흉악한 유엔군이었습니다.
해방 후 친일 세력들은 인민이란 말은 북한이 사용한다고 금기 시켰습니다. 인민은 나라를 세우는 주체를 의미하고 국민은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란 뜻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인민은 자연인으로서 국가가 있으나 없으나 존재하는 국가보다 상위 개념이고 국민은 국가에 복속된 하위 개념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국민이라고 하면 우리는 미국이 남한 땅에 세운 나라(괴뢰국가)에 수동적으로 속해있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나라를 세울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항일무장투쟁시절 김일성은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여 보천보전투 등 위험한 전투는 몸소 맡았습니다.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을 스스로 보이셨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이끄는 독립군의 항일 투쟁이 기진맥진했던 1930년대에 김일성부대는 북만주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에도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함경북도 갑산군의 보천보 전투였다."
지휘자는 25세의 청년 김일성(1912~1994). 밀림에서 낮을 보내고 밤 10시에 작전을 개시한 이들은 먼저 전화선부터 끊은 뒤, 주요 목표인 경찰주재소를 공격했다.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경찰 3명과 조선인 경찰 2명은 모두 도망쳤고, 이들은 무기고에서 경기관총, 소총, 권총, 탄약을 노획했다.
보천보 전투는 독립운동이 침체 분위기이던 때에 국내 진공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추격하는 일본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이 신문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퍼지면서, 김일성은 신비화됐고 민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시기적 특성과 작전의 과감성, 언론 보도를 통한 사실 확산이 결합돼 나타난 결과였다.
불의의 기습으로 일격을 당한 일제는 보천보 전투 뒤, 마에다 부대를 보내 뒤쫓지만 홍기하 전투에서 김일성 부대에게 또 다시 섬멸당한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77594) 홍기하 전투 현장에 중국 정부에서 세운 홍기하전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1940년 3월 25일, 김일성 장군은 이곳에서 항일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유인매복전으로 일위 '마에다 경찰토벌대'를 소멸하였다."
- 화룡현 인민정부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세움
이라고 쓰여 있다.
김일성이 1937년 6월 4일 직접 지휘한 역사적인 보천보 전투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하여 인민에게 나누어주었다.
<동아일보>가 정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건을 연일 보도하면서 김일성의 이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인들에게 보천보 전투는 1936년 손기정(1912~2002)의 세계 제패에 이은 쾌보였다.
작전을 완료한 혁명군은 「한인조국광복회 10대 강령」50여장을 비롯, 「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반일 대중에게 보내는 격문」등 수백 장의 '삐라'를 살포한 뒤 밤 11시경 압록강 건너 만주 장백산의 밀영으로 철수했다.
김일성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제74연대(함흥 주둔)는 6월30일 만주 장백현 간산봉에서 오히려 '괴멸적 타격'을 당했다. 일본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상이 조선 천지를 뒤흔든 보천보 전투사건의 간략한 전모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작은 전투였지만 정치적 충격은 매우 컸다”고 평한다. 보천보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힌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고 얘기하지만 오히려 소련을 결정적으로 도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1930년 후반 이후 소련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소련이 항일 게릴라 단체에 대해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으나”, 게릴라 부대는 일본이 북진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선봉’에 섰다.
그래서 소련이 멸망할 수도 있었던 1941년 전투(서부로부터의 히틀러의 침공)에서 동부로부터의 도조 히데키의 침공을 막는데 일조했다.
보고에 의하면, 게릴라들은 진압작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의 국경선을 수차례 넘나들었으나, 소련은 그들에게 무기나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그리고 다른 군수품들을 탈취해 사용했다
커밍스 교수는 김일성부대의 항일 게릴라 활약이 일본이 중국본토 장악을 포기하고 남진을 결심하게 된 본질적 요인이었고, 진주만 공격도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게릴라식 습격으로 고민하던 미군은 일본의 “게릴라 소탕작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중 관동군에서 대좌로 근무한 두 사람이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를 추격한 적이 있어 미군들에게 브리핑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여타 조선 게릴라들은 중국의 지휘자들과 협조체계를 구축했으나, 영향력 있는 특정인의 지시에 복종하지는 않았다며 “(김일성이) 소련군 또는 중국 공산군 지휘부와의 관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1945년 “미 국무부 최고의 한국 전문가”인 조지 매큔은 1937년 소련 저널에 실린 글에 관심을 가지고 번역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위대하고 유능한 지도자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김-니-첸(김일성) 부대가 특히 두드러졌다. 그의 부대원들은 정말 용감하다. 가장 위험한 작전은 모두 그 부대가 도맡아 처리한다.
<우리민족은 주변국의 원조만 받는다>는 친일친미 기생세력들의 민족을 깎아내리는 모략 선전만을 듣고 우리는 자랐습니다. 하지만 하늘높이 나부끼기는 오성홍기를 바라보며 중국인민이 《저 깃발에는 조선인민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얘기 할 때 우리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미국의 더러운 침략전쟁에 총알받이 노릇을 하다 패잔병이 되어 쫓겨 온 역사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김일성 부대가 주변 강대국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켜주었다고 하니 뿌듯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중국뿐만 아니고 일본군의 북상으로부터 소련도 지켜 주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더욱 자부심을 느낍니다.
일본군은 보급로가 위태로워 질까봐 중국본토나 소련으로 진군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김일성은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침략자 왜놈들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싸웠습니다.
이와 같이 긍지 높은 인민군을 남쪽 인민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마침내 남쪽 인민들은 자기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충직한 아들딸들인 인민군을 만났습니다.
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시절부터 낮에는 중무장한 일본군의 눈을 피해 숲속에 은닉해있고 밤이 되면 활동을 하거나 부대이동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야간전투에 익숙하였지만 인구가 밀집된 서울 함락 때는 인민들이 방향을 잡지 못해서 인명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야간에 공격하지 않고 낮 동안에 서울을 공격하였습니다. 민간인이 피난을 갈수 있도록 보호 하였습니다.
항일의 명장 김일성이 이끄는 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라는 말처럼 인민을 보호하였고 양민을 학살한 흉악한 유엔군과는 대조되었습니다.
27일 오전 11시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에 다다르자 서울시민들은 급하게 가족의 손을 부여잡고 전쟁의 포화를 피해 부랴부랴 대도시인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민군이 서울근교까지 내려왔던 6월28일 새벽 2시30분경 어둠속에서 국군 공병대에 의해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었습니다.
미군은 이승만 괴뢰를 이미 6월27일 새벽2시에 특별 열차 편으로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신 시켰다. 그리고서 피난민들은 내려가지 못하게 다리를 끊어 뒤따르던 민간인들을 다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미군은 이승만과 제 놈들의 명령을 수행한 한국군 대령에게 잘못을 돌렸습니다.
실상을 모르는 한국인 중에는 “자기 정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이 세상 어디에 있겠나. 이런 것을 보면 이승만은 전범이다.”라고 허수아비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하지만 진범은 허수아비 이승만도 사형당한 최창식 대령도 아닙니다.
다리를 폭파한 시간 다리위에는 500명~8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폭파 됐으나 피난민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폭파된 사실을 모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서 계속 앞으로 밀려서 설사 어둠 속에서라도 폭파된 사실을 아는 피난민이 있다할지라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떠밀려 계속 한강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계속 밀려들어 밤사이 수 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강물은 핏물이 되어 오랫동안 서울 한복판을 흘렀습니다. 한강은 한민족과 함께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미군이 다리를 끊어 피난을 못 가게 해놓았는데도 친일매국노 일당은 다시 돌아와서 ‘부역자 처리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가서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라며 무차별적으로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국군에 협조한 사람을, 그리고 국군의 점령지에서는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을 죽였다고 하지만 부역자처벌법이란 법까지 만들어서 보복살인 한 집단은 친일 매국노 일당의 반정부 범죄 집단이며, 대한민국이란 간판을 붙인 대한 괴뢰집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군과 친일매국노는 선량한 우리 민족을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인민군 치하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없었고 소수의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습니다. 따라서 미군이 아닌 북한인민군을 해방군으로 불러야 옳지 않겠습니까? 부모형제를 죽인 흉악한 미군과 매국노로부터 우리민중을 해방시켜준 인민군이 해방군이었습니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흘만인 6월 28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시켰다. 이날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미제의 침략도구인 유엔은 남의 나라 내전에 간섭하는 짓을 하였다. 남한군이 반격하여 서울을 탈환할 수도 있는 상태임에도 굳이 중국 대륙침략을 위해 유엔군을 파병하였다.
애당초 인민군은 부산까지 남진하지 않고 서울만 점령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는데 유엔의 불법 개입 결정으로 확전이 불가피해지자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이다.
유엔군의 모자로 바꿔 쓴 미군과의 첫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 있었다.
6월 27일 한강이남 전선을 직접 시찰한 맥아더가 29일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고 30일 트루먼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일본에 주둔해 있던 스미스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여 3일 오산에 투입되고 5일 죽미령에서 벌인 6시간의 전투에서 406명의 부대원 중 181명이 전사 및 실종하고 72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유엔군은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운 남조선을 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불법적으로 남의 내전에 뛰어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해방이 되자 미국은 우리국민을 다스리라고 친일 반역 매국노에게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이런 친일매국 지배세력은 북한이 남한 국민을 죽이기 위해서 핵을 만들었다고 지껄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민족을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칠 각오로 항일 투쟁의 한 길을 걸어 온 애국자인데 애국자가 자기 민족을 죽인다고 매국노의 입으로, 김일성도 가짜라고 사기 친 썩은 내나는 더러운 입으로 또 사기 칩니다.
1952년까지 미국이 전개한 야만적 공중 폭격전쟁으로 한반도의 북부와 중부는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도시의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주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데 마치 원시인들 같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백만의 주민이 희생되고 ,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속 생활로 생명을 이어갔으며 석기시대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평양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은 1951년 1월 3일에 행해졌다. 폭격은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15분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처음에는 소이탄, 다음에는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리고는 다시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조직적인 구조작업은 불가능했다. 때때로 우리들은 시한폭탄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한번은 시한폭탄이 10분 간격으로 연속 폭발하였는데 이 폭탄들은 1주일 전에 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공습에 희생되거나 다친 이웃, 친지, 가족을 구조하기에 정신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이 구조대를 살상. 파괴하는 것이다.
공습과 포격에 의해 죽고 부상당한 무고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대부분 서방의 언론들은, 특히 미국의 유피통신 (UPI통신의 전신) 을 필두로 해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외면하거나 왜곡된 당국의 발표를 복제해 내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국은 6.25 한국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을 구해주고 지켜준 천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 하였습니다. 즉, 전범자 스스로가 북한을 전범자로 지목하며 한국국민을 속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은 중국대륙을 수복하여 장제스(장개석) 괴뢰를 세우려는 야망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중국대륙 회복은 미국의 한국전쟁을 일으킨 최종 목표였다.
1943년11월의 카이로 회담 1945년2월의 얄타회담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중국을 대표하여 장개석이 참석하여 미국을 지지 하였으나 중국대륙을 공산당에 빼앗긴 뒤에는 왜소해진 장개석은 발언권이 약화되어 미국을 지원 할 수 없게 됐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도 미국의 뜻과는 다르게 도출된 것은 지금까지 미국을 지지하던 중국이 빠진 때문이다.
1920년대에 중국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 일본에게 정복당할 정도로 낙후한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을 굴복시킨 세계 최강 미국은 이렇게 미개한 중국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다.
1949년 상반기부터 중국 본토에 대한 군사적 방법을 통한 해결 방안이 마련되었다.
즉,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 기지로 전환시키고, 반도-대만-베트남을 각각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1954년 2월 미국 하원에서 로버트슨 국무차관보의 발언을 통해 사후 확인되었다.
[1] 일본의 병참기지화
<1> 일본 주둔 미군에 대해 전투태세 강화가 있었다.
1949. :제8군 전투단 군사훈련에만 전념토록 조치,
1949, 6월: 제8군의 병력증강을 추진 (7만에서 15만으로),
1949, 6월: 8군단을 극동 공군·해군과 함께 통합된 육·해·공군 통합팀으로 실전 배치.
1949, 8, 8월: ‘험한 지역에서 작전수행할 사단의 훈련을 위해 후지산 근방에 훈련지역을 마련하였다-맥아더’
<2> 일본주둔 미군 군사기지의 대폭적인 시설 확장-보수.
1949, 10월말: 오키나와 기지 실제 주둔병력 수용 수준 훨씬 초과 (한국전쟁 개시 후 정상화)
1950, 2월: 요코스카 해군기지 시설 확장 공사.
1949~1950년 전반기: ‘롤 업(roll-up)’계획 비공식 실행 (8군 보병사단 중무장 조치)
1949, 4, 16일: 대충자금 특별회계법 일본 국회통과 (일본인 조세를 군수품 생산에 전환)
→일본 군수산업을 재생시키기 위해 주력한 미국.
<본래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미국에 의해 몰수되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1949년 이후 벌어진 일본의 병참기지화 과정은 한국전쟁 중에 일본이 수행한 역할을 통해 밝혀짐.
[2]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정치적 조치들
<1> 미국에 의한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 부활기도
→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박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 중 야기될지도 모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함) / 1949, 9, 8 : 재일한국인 조직해체, 재일한국인 재산몰수, 간부 추방(맥아더 명령)/ 1950, 3, 3 : 일본내 좌익세력에 대한 불법화 조치 → 1950, 6, 16 : 일본지역에 대해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 금지. (사실상 전쟁 동원 체제 돌입)
[3] 구체화되는 미국의 전략
<1> 애치슨 라인(1950년 1월 12일)
한국과 대만에게 관여 안 하겠다던 애치슨 라인은 ‘우리의 첫 방어 라인으로, 그리고 덧붙여 우리가 그곳에서부터 공산 지배지역의 감소를 모색할지도 모를 첫 공격라인’으로 그것이 공식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과 실제 미국의 정책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애치슨라인 선언을 할 당시에 오히려 대만과 한국에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고 있었다.
<2> 1950, 4 : 국방비 증대 비밀리 추진 (중공에 대한 초강경파 덜레스 국무장관 등장과 함께)
<3> 1950, 1, 26 : 한미상호방위 원조협정 체결
(원조를 미끼로 미국이 한국의 내정을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합법화 함)
<4> 1950, 6월 : 미 군사고문단의 지도하에 남한군대 10만으로 성장. (국내 치안 유지 수준)
<5> 1950년 미국 군사 지도자들의 극동지역에 대한 잦은 왕래 - 고무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주장.
<6> 전쟁 준비되지 않은 북한의 군대 - 1949년 말까지 방어 형 군대였으나, 1950년 공격용 군수물품 수입 (북진하려는 남한에 대한 대응, 1950년 7월말 완료 계획), 6.25 당일 동원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았음.
<타임> 등을 발행한 대표적 우파 언론인 헨리 루스 등 차이나 로비 세력은 한반도를 위험한 장소나 곤경에 빠진 곳으로 보지 않고 중국을 자유화하는데 꼭 필요한 <전투지>로만 생각하였다. 즉, <훨씬 더 큰 전쟁> 즉, 중국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한국전쟁은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의 국민당 친미세력이 다시 중국대륙을 탈환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절호의 찬스였다. 맥아더에게 한반도는 애초에 일본의 방어진지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는 한국 상황에 무지 했고 한국인을 깔봤던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 잠시 서울을 방문한 것을 빼면 그 때까지 단 한 차례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맥아더가 세운 비밀 작전 계획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의 공군력을 동원해서 중국의 항공 기지와 산업 시설, 그리고 만주와 동북지역의 군수시설을 파괴한다. 둘째, 미 해군을 동원해 중국의 남해와 황해의 해안 항구들을 포위 공격한다. 셋째, 대만의 장개석 군대를 파견해 중국 남부를 기습, 점령하게 한다.
마이클 샬러에 따르면, 맥아더의 궁극적인 관심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조국 미국이 아시아에서 승리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패배시켜야만 했다. 한국은 중국을 패배시키기 위한 기회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확대되면 중국에 내란을 일으켜 국민당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논의했을 것이다. 장개석은 그 전부터 대만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키겠다고 제안해 온 터였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갑자기’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완전히’ 끝난 역사의 한 토막이 결코 아니다. 한국전쟁은 해방이후 우리 민족이 기울여 온 통일국가 건설의 노력이 좌절되면서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된 것이며, 또한 미국의 대 동아시아 전략의 산물이다. 중공 봉쇄정책이 포기되기 이전에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모든 분쟁은 바로 미국의 군사전략과 결정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일본의 재무장,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아시아 민족 간의 끊임없는 충돌 등은 미국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연출되는 각각의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의외로 빨리 끝나서 엄청난 군수물자 재고로 군수업체들이 파산에 몰리고 특히 군수식품(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군량미)은 썩어나서 대서양과 태평양에 갖다 내버려야 했을 지경이라 새로운 전쟁이 절실히 필요했다.
2차대전중에 미국은 생산 설비를 총동원하여 많은 무기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전쟁이 빨리 끝나 버렸다. 원폭을 급히 일본에 투하한 이유는 일본도 원폭을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패망직전인 1945년 8월 12일 흥남 앞 바다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하였다.
2차 대전 당시 참전국들은 경쟁적으로 당시 최신무기인 원폭개발에 뛰어들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1년에는 육군 주도로 동경대 이화학 연구소에서, 42년에는 해군주도로 교토제국대에서 원자 폭탄 개발에 착수하였다.
B-29의 일본 폭격으로 이화학연구소가 파괴되자, 일본에서 행해지던 원폭실험의 주요무대는 한반도 이북 지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전력과 우라늄 공급이 용이한 북한 흥남으로 옮겨서 개발을 계속 하였다.
일본의 원폭개발은 독일 나치와의 유대가 큰 힘이 되었다.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던 나치는 원폭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우라늄을 지원해주었다. 실제 독일잠수함 U-234호는 독일이 패망한 그 순간에도 우라늄 10박스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이 작성한 공격 목표물 중 첫 번째가 흥남 질소비료공장이었고 공업단지 내의 5대공장과 부전강 발전소 등 산업시설이 모두 포함돼 있다.
언급한 대로 군산복합체의 잉여무기 처리가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의 하나입니다.
무기가 나가지 않고 재고가 쌓이자 공장은 생산을 멈추고 돈벌이가 끊겼다. 군수산업체는 돈벌이가 끊기자 마치 마약중독자에게 마약 투입을 중단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금단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의 사용처가 필요했다. 재고가 쌓여 처분하고자 하는 욕구를 떨치지 못했다.
자신의 동족인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에게 까지 자금을 대준 유대계 군산복합체에게는 전쟁까지도 사업일 뿐이다.
1964년 8월 미국이 북베트남을 공격하기위해 통킹만 사건을 연출하였습니다. 먼저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인 이른바 ‘펜터건 페이퍼’를 입수해 1971년 6월 13일부터 연재함으로써 날조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론비평가 노먼 솔로몬은 당시 통킹만 사건을 취재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머레이 마더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그에 따르면 개전의 구실이 된 미군 전함 매독스호의 피격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월남군의 전함이 북베트남에 대한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름의 취재를 통해 통킹만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도 전에 <워싱턴 포스트>의 수뇌부가 이미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을 비호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편집방향을 잡았다고 증언하였다.
911사건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많은 미국인과 전문가 및 군인들은 자해 공갈단 미 CIA 가 대 테러전쟁을 일으켜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2001년에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CIA 는 쿠바 침공의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자작극인 노스우드 작전(Operation Northwoods)을 1962년에 수립하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도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마약 단속국 등 미국 연방정부의 각 기관 사무실과 탁아소 등이 들어 있 알프레드 머라 빌딩을 사건 조작기관인 미 CIA 가 폭파시켜 티모시 맥베이(당시 26세)를 희생양으로 삼아 처형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와 같이 미 CIA 는 군산복합체에 의해 조종 받고 지배를 받는 기관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충북 영동의 노근리를 비롯한 한민족에 대한 양민학살이 록펠러-모건 재벌의 록히드사 전투기의 기총사격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한국전쟁 최후 점검으로 50.6.19일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파견하여 38선 일대를 비밀리에 시찰하는 등 모든 점검을 완료하고 북한을 유인, 기다리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군수업체인 모건과 록펠러, 듀퐁은 전쟁 물자를 끊임없이 쏟아 부어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습니다.
미국은 대통령의 지시보다 군수업자인 록펠러-모건 재벌의 지시를 받아 운영되는 전쟁 사업을 끊임없이 펼쳐야 살 수 있는 거대 회사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미국의 적이고 미국은 평화의 적 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전쟁이 아닌 천재지변도 미국은 세력 확대의 기회로 삼습니다.
프랑스는 지배권 확대에 목적을 둔 미국의 아이티지원에 대하여 비난 했습니다. 2010.1.19일 프랑스는 미국이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미국은 공항 관제권을 쥐고 프랑스와 브라질 등 다른 나라의 구호품을 실은 항공기는 착륙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원조라는 미명하에 풍부한 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가진 아이티를 군사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이티에 대규모 군 병력을 파견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전쟁 상황도 아닌데 미국이 아이티 비극을 이용해 또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군인을 보내는 대신 의사·구조대·의약품·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도 미군의 아이티 철수를 요구 했습니다.
브라질도 미군의 항공모함 배치 및 해군 병력 파견 등을 이유로 미국이 아이티 점령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국경 없는 의사회, 니카라과도 잇따라 비난 대열에 합류 했습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지는 “아이티 주민들은 미국은 군인 말고 구조대원과 의료진을 지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구호 활동보다 군사적 점령에 목적을 두어 지진 발생 1주일이 됐는데도 약탈과 폭력이 오히려 극심해졌다.
“오바마는 취임하면 신속하게 북한과 양자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하였으나 2009년 1월 20일 취임한 오바마는 2009년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북핵 실무진을 임명했다. 또 북한이 고대하던 미국과의 양자대화는 지난해 12월에 들어서야 처음 열린 것을 보더라도 미국은 대통령보다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하였다. 1978년 말까지 1개 여단, 1980년 6월 말까지 또 1개 여단을 철수하며, 한국에 있는 핵무기도 줄이겠다고 하였으나 당선 후에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미 군산복합체는 무기판매사업 물론 언론, 영화, 금융, 스포츠, 대학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백악관과 군부, 정부기관을 뒤에서 움직이며 인류에게 전쟁을 가져다줍니다.
한국전쟁에서 몸소 전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걸고 지휘하는 김일성과 달리 군산복합체 소유자들은 대재벌로서 전쟁이 나더라도 직접 전장에 뛰어드는 일이 없어 전쟁을 선택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파라마운트는 모건의 영화사이고 20세기 폭스사의 최대주주는 록펠러, 워너 브러더즈는 모건과 록펠러, 듀퐁이 대주주입니다.
미 국민들에게 매카시즘을 일으킨 주체는 언론과 영화사를 장악하고 선전 선동을 벌린 군산복합체입니다.
군산복합체는 전쟁이 필요했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했고 공산주의를 적으로 설정하여 매카시즘을 일으켰습니다.
군산복합체는 공산주의가 사라지자 테러리즘을 적으로 삼아 오늘날 대 테러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재벌들은 공황에 대비해 보험 역할을 하는 군수산업을 필요로 합니다.
대공황으로 경기가 침체에 빠지면 군수공장을 총 가동시켜 이를 만회하는 것이죠. 군수공장을 총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된 무기 들이 쌓이지 않고 제 때에 소비 할 수 있는 소비처가 필요합니다.
즉, 전쟁을 벌려 경제를 일으키는 군산복합체의 국가가 미국입니다.
애치슨 선언을 한 딘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은 군산복합체인 탄약제조업체 듀퐁의 고문변호사 직도 갖고 있었으며 군산복합체가 그를 행정부에 앉혔습니다.
한국전쟁당시 전쟁정책과 전략을 수립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록펠러 동지인 멜런가의 멜런 공업 연구소의 사장이었습니다.
사전에 좌익명단까지 만들어 파악하고 6월25일을 기해 일제히 검거 학살 한 결과 단선단정을 반대할 민중은 말끔히 청소가 됐습니다. 친일파 문제도 화살을 북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해결하였습니다. 더구나 친일파들이 나라의 주요 직책을 맡아 국민들을 교육해 왔습니다.
교육은 당연히 북한을 배척하는 반공교육이 되었습니다. 친일매국노가 미국과 한 통속이 되어 애국적 우리민중에게 세뇌교육을 시켜 반공을 주입함으로써 부모형제도 몰라보게 정신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국회에서 어떤 의원이 “6.25전쟁이 북침이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맞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에 기생하여 살려는 인간들이 “이 때다” 하고 달려들어 주인에게 충성심을 인정받으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가장 무서운 비극적 사태는 정신이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교육은 민족주의를 업신여김으로써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한민족의 넋을 뿌리째 뽑아버리는데 집중되었습니다.
친일매국노들은 미국과 괴뢰정부에 충성을 하여 전후에 훈장 받고 잘 살았습니다.
반면에 일반 국민들은 살기도 빠듯한 삶을 사느라고 친일매국노들이 하는 교육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미국과 매국노 들은 국민들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데만 전념하는 틈을 타서 반공선전과 반공세뇌교육을 하였습니다.
일제와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를 증오하도록 남한 민중에게 적개심을 심어주어 우리 민중은 참된 애국정신이 마비된 채로 오랜 분단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왜곡된 역사교과서로 진실이 감춰진 날조된 역사를 배웠습니다.
일제는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폈습니다. 일제는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폈습니다.
해방 후에는 일제 대신에 친일지배세력들이 민족주의는 낡은 사상이라며 민족정신을 폄하하는 교육을 하였습니다.
미국의 의도대로 민족이 갈라진 채로 영원히 살라는 반민족의 극치입니다.
흩어져 사는 부모형제가 다른 나라에서처럼 만나서 화목하게 살자는 게 극단적 민족주의 입니까?
우리가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보고 듣고 할 수 있습니다. 마약을 끊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친일지배세력의 세뇌를 극복하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당하여 오랜 세월 한과 눈물로 살고 있는 힘없는 약한 민족을 위하여 애국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한정부와 선전매체들은 미국과 자유세계의 희생의 은덕으로 침략자인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한국을 지켜내서 우리가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고 선전 합니다.
미국은 우리나라를 갈라놓고 우리에게서 서로 왕래 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고 자기들이 이 땅의 주인 노릇을 오늘날까지 계속 해 오고 있습니다. 이산가족은 무슨 죄로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합니까? 미국이 말하는 자유가 우리의 자유는 아닙니다.
유엔군의 학살 만행과 잔인한 폭격으로 대폭적인 인구 감소를 겪은 북한은 지금까지 전시동원 체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잠시 휴전일 뿐 아직도 전쟁 중에 있고 실제로 정전협정 후에도 미국의 핵공격 위협을 받고 있어 평화는 없었고 이것은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의 정당성을 제공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해 통킹 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을 파병하였습니다.
6.25 남침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준 미국 은혜에 보답하려고 5천명의 국군 목숨을 미국의 추악한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바쳤습니다.
한국전쟁에서도 한국군은 미군의 총알받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었다.
한국전쟁에서 아몬드 소장이 지휘한 미 10군단은 미 2사단과 7사단 그리고 한국군 5사단 및 8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단장은 1950년 크리스마스 공세 때 동부 전선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었다.
아몬드 소장은 횡성과 홍천을 잇는 공격로의 좌익에 국군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 그 우익에는 국군 5사단(사단장 민기식 준장)을 앞에 세웠다.
미 2, 7사단은 국군 8, 5사단을 뒤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몬드 소장은 한국군을 총알받이로 앞세웠던 것이다.
대포와 전차 등에서 미군과는 큰 수준 차이가 있는, 화력에서 뒤져 있는 국군 사단을 오히려 전면에 배치하였다.
당연히 한국군은 중공군의 막강화력 앞에 전멸 상태가 되었다.
51년도 미 10군단 지휘보고서에 따르면 국군 8사단은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의 병력 손실을 본 것으로 나와있다. 국군 5, 3사단 역시 부대원을 각각 3000명씩 잃었다.
위의 사실은 국군을 총알받이로 취급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미군에게 전시작전권이 있으므로 전쟁 시에는 미군의 작전명령에 따라 국군은 앞에 나가서 싸워 미군에게 갈 총알을 몸으로 막아야 한다.
자기나라 땅에서 전쟁 났는데 자기가 주관해서 싸우지 않고 외국군대에 손에 끌려서 수동적으로 지시받고 싸운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그래도 괴뢰군이 아니냐고요?
한국군은 미군의 명령에 움직이니까 괴뢰군이란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군을 수십 년 동안 괴뢰군이라고 불러왔다.
북한군은 전쟁 나도 소련 중국의 작전명령 없이 홀로 싸운다.
힘세다는 조폭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겁하게 떼로 덤비니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북한으로 봐서는 남조선 땅도 우리나라인데 왜 우리나라를 미제에게 빼앗긴 채로 부모 형제도 못 만나고 참고 살아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미제 침략자를 내쫓으려는데 오히려
침략자가 나눠준 총을 들고 침략자가 지휘 감독하는 대로 하는 남조선 군대를 괴뢰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자신을 감추기 위해 친일친미 세력들은 북한을 괴뢰라고 불렀습니다.
현재는 그것을 남한에서도 잘 알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군을 가리켜 괴뢰군이라고 업신여겨 불러도 남측에서는 듣고서도 옛날 같이 괴뢰군이라고 예전처럼 대꾸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정치범 수용소라든지, 인권 침해라든지,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등의 말로 대꾸합니다.
그런데 다 이런 것들이 가짜 김일성이니, 북한 괴뢰니, 좌익이 찬탁으로 돌아섰다느니,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던 친일친미 세력들이 하는 얘기이니 온전히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처럼 헐뜯는 버릇 개 줬겠습니까?
무슨, 상호비방 않기로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온갖 모략 소설로써 비방해 대는 주제에 비방 않기로 했다고 지킨다고요? 북한 지도자를 욕하는 비방 삐라를 풍선에 달아 날려 보내어 북한을 자극하는 짓이나 그만두게 하십시오.
우리 땅에서 미국에게 우리 민중이 죽임을 당하고 또 머나먼 외국에까지 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조국이 분단되어 겪는 치욕입니다.
누가 조국을 분단 시켰습니까?
해방된 조국에서 65년 동안 어머니가 살아있는데도 자식이 만날 수 없는 생이별을 강요한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결의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무산시켰습니까?
한민족의 자주통일을 짓밟는 장기적 신탁을 누가 주장하였습니까?
바로 “미국”입니다.
더구나 미국은 신탁통치의 기간은 5년으로 하되 연장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영구적인 신탁통치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결정은 소련의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에 부딪쳐 미국의 장기적 신탁통치를 통한 한반도의 지배권 확보와는 전혀 다르게 도출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를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고
삼상결정을 무산시키기 위하여 회의의 결정내용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강조하였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하였다”고 정반대로 왜곡하였다.
미 군정청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이러한 허위사실을 유포시켰다.(동아일보는 미국 발 기사라고 속이며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당시 친일 보수 세력이 모여 있던 한민당을 대변하던
동아일보는 미 군정청의 지시에 적극 가담하여 12월 28일자 1면 머리기사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소련에 경고한다는 사설까지 실었다.
식민지 후진국에나 있을 법한 신탁통치가 우리나라에 실시된다는 사실이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대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러한 왜곡된 뉴스에 너나 할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 곧 반탁운동을 벌였다. 실제로 당시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거짓말에 속아 소련은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결정 발표 뒤 부분적으로 반탁의사를 나타내던 좌익세력은 곧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당시 좌익세력은 찬탁, 곧 신탁통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분단을 막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먼저 하도록 규정한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했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차 진실이 알려지니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 했소.
반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보고 찬탁을 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가 왜 신탁통치를 지지해.
우리는 찬탁을 말한 적이 없소. 우리가 외친 것은 삼상결정 지지였고 통일된 임시정부였소"
거짓 내용의 벽보를 제작해 일제히 붙이는 등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고용해 반탁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방 후 냉대하는 북한 정권을 탈출한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후원에 고무되어 스스로를 애국자라 내세우면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꼭두각시,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노로 비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미군정 치하의 이 땅에서 벌어졌다.
친일파들은 이제 반공 반소를 앞세워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자신을 둔갑시켰다.
미군정에 고용된 친일 세력들은 돌아다니면서 “신탁통치란 무엇이냐 , 소련이 사주해서 좌익이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이다”고 선전하였다.
우리 국민은 미국의 사기 행각에 말려들어 미군의 의도대로 좌우대립이 일어나 미군정 지역만의 단독선거 강행으로 우리나라는 끝내 분단의 길을 가게 됐다.
그러나 사실은 좌우대립이 아니고 미군과 친일세력이 한패가 되에 애국적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 술수를 써 애국을 좌익으로 몰아 분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 그리고 같은 연배의 어르신들은 지금도 물어보면 그 당시 좌익 공산진영은 소련이 제안한 찬탁을, 우익 진영은 미국의 제안인 반탁을 서로 주장해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알고 계십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국민 전체가 미국이 날조한 것을 믿고 있는 것은 당시 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의 조직된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 전쟁이 김일성의 남침 때문에 시작 됐다고 속인 것처럼 철저하게 속였다.
당시 신문에는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는 허위 기사를 냈습니다. 이것을 오늘에 와서야 찬탁을 삼상지지로 바르게 고쳤지만 현재도 미군정의 날조 공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않고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의 잘못으로 오해가 생겨 반탁과 찬탁으로 갈린 것처럼 기술하고 미국이 속임수를 쓴 사실을 숨겨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처음에 자국의 언론 즉, 일본에서 발행되는 태평양성조기 를 통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거짓으로 알리고 이것을 동아일보 등의 한국 언론이 받아쓰게 하는 비열한 방법을 썼다.
동아일보는 미군정의 지시를 받고『태평양성조기』지 1945년 12월27일자 한국관련 기사 (랄프 하인젠 기자)의 한국관련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여 한국국민에게 알렸다
랄프 하인젠 기자는 동아시아에 문외한이었다. 즉, 자신이 직접 쓴 기사가 아니고 미군이 넘겨준 원고를 기사화한 것이다.
미국의 공작으로 <태평양성조기> 와 <합동통신>에도 같은 날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미 육군 극동군사령부를 대변하는 <태평양성조기> 와 그리고 서울의 주한미군사령부가 일제식민지의 도메이통신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합동통신> 으로 간판을 고친 두 기관에서 동시에 같이 보조를 맞췄다는 것은 미국의 정치적 음모였음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 이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각은 12월 28일 오후 6시였다. 그런데 하루 전인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 모스크바 결정에 관한 기사가 났다. 미군 측의 의도된 공작임을 또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미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이어서 조선일보도 조선인에게 신탁통치라는 굴욕적인 왜곡된 뉴스를 함으로서 양 대신문에 의해서 우리민족의 좌우익 분열로 극심한 좌우대립이 극에 달했다. 이와 같이 미국은 우리민족의 분열을 획책하였고 현재도 분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군정은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제안자는 미국이라는 <타스통신>의 보도는 사전 검열을 통해 알려지지 않게 통제했다.
그래서 진실은 간헐적으로 알려지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미국은 자신들이 날조한 것을 진실인 것처럼 뉴스로 내보냄으로써 우리 국민을 간교하게 속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북한에 관한 뉴스는 거짓말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온 국민이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식민지 배상금을 지불하는 걸 원하지 않는 일본은 북한 소식인지 북한 모략선동인지 를 구분 하지 않고 마구 하고 있습니다. 인민을 부모로 섬기는 사회주의 북한에서는 절대로 인민을 속이지 않습니다. 거짓말은 일본 놈이나 친일파들이 하는 짓입니다.
일본 놈들은 하루도 안돼서 탄로 날 거짓말을 하는 뻔뻔스런 종족입니다.
2010년2월23일.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아래와 같이 거짓말을 뉴스처럼 내보내고도 부족한 느낌이 있어서인지 해설까지 실었습니다.
지난해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중국이 북한에 개혁·개방, 세습 반대, 핵 포기 등을 요구했다고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이 23일 보도했다.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는 이례적인 강경 대응이다. 신문은 복수의 북한 소식통을 인용, 이 같은 요청은 공산당에 의해 이뤄졌다고 전했다.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되고, 경제 상황도 불안해지면서 인접국인 중국이 강한 위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아사히는 해석했다.
신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5월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3남 김정은을 지명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 위원장의 매부 장성택 국방위원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 직후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으며 장 국방위원은 5월 말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인 왕자루이(王家瑞)가 장 위원에게 개혁·개방, 세습 반대, 핵 포기 등 요구사항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당시 예정됐던 정부 고관과 대표단의 북한 파견을 취소했다.
아사히는 “중국이 전에 없던 강경 자세로 나오자 북한은 중국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김정은이 장 국방위원과 함께 6월 10일 중국을 직접 방문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중국에 김정은을 보내 세습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풀이했다.
이와 같이 일본 신문이 보도 했으나 하루도 못 되어
중국 외교부 친강(秦剛) 대변인은 23일 정례브리핑에서 “중국은 내정 불간섭의 원칙하에 결코 다른 국가의 내정 및 사무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정면 부인했다.
1947.5.21 서울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은 일방적 퇴장으로 파탄시켰다. 미국은 통일된 국가 보다는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게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전후처리 관련 분쟁에는 유엔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헌장 제107조’의 규정을 위반하고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대방 진영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으로서 조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할 때부터 분단은 정해져 있는 거나 같았습니다.
국제평화기구에서 범죄단체로 전락한 유엔 은
우리 조국을 완전히 분단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죽는 날까지 혈육을 만날 수 없게 하여 수백만 명 이산가족에게 죄를 저지른 범죄 집단 유엔은
북한을 침략해서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를 또 저질렀습니다.
미국은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해 47년 11월 14일에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담당할 「유엔한국위원단」을 만들어냈으나 몇 달 뒤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하여
2.7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1948년).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날 서울의 여러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1월 19일에는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애국민중의 투쟁은 마침내 경향 각지로 확대됐다.
1948.2.7일에는 전국에서 참가하였다( 2.7 항쟁 즉, 2.7구국투쟁). 서울, 인천, 대전, 목포,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철도노동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물러가라!≫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이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 밑에 총파업에 돌입했다.
투쟁은 삽시에 40여개의 도시를 포함한 경향 각지를 휩쓸었고 철도, 체신을 비롯한 각부문에 걸쳐 수백개의 공장, 업체 노동자들의 참가하에 대규모적인 동맹파업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날 전라북도 완주군 농민들도 투쟁에 나섰으며 경찰의 탄압만행에 격분하여 경찰지서를 들이쳤다. 합천, 김제를 비롯한 각지의 농민들은 시위와 횃불투쟁 등을 벌였다.
2월 13일 청년학생들은 서울 탑골공원 앞과 종로 네거리, 남대문 거리들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투쟁참가자들은 33개소의 경찰기관을 습격하고 47명의 악질친일경관들을 살상했으며 68개소의 전선을 끊어버리고 39대의 기관차와 5개소의 철길과 도로를 파괴해 버렸다.
이 투쟁으로 이남 전역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고 대부분의 공장, 기업체들에서 생산이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2.7구국투쟁은 미국과 그 추종자들의 가혹한 폭압 속에서도 3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등 무려 2백여만에 달하는 각 계층 애국민중이 참여했다.
참으로 2.7구국투쟁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독립된 조국에서 살려는 우리 민중의 굳센 의지를 내외에 널리 과시한 애국적 투쟁이었다.1948년 2월 5.10단독선거를 분쇄하여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력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2.7구국투쟁이라는 '작은 전쟁'에서부터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 정전까지 우리민족은 죽음으로써 미국에 항거하였다.
해방된 조선에서 독립정부의 수립은 오직 조선인의 힘만으로 이뤄져야 한며 유엔으로 간판을 바꾼, 실질적인 미군 감시하의 선거는 원치 않았다.
우리민족의 장래는 우리 민족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세계대전 후 독립하여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 우리민족에 관심조차 없는 잡다한 신생국가들을 포함한 유엔총회의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미국이 천명하고 「국제연합헌장」에도 있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즉, 그 나라 운명은 그 나라 사람들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다른 나라가 또 다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횡포에 의해 불법적으로 조작된 1948년의「5.10단독선거」는 민중을 억압하는 살벌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강행되었다. 그것은 민의가 수렴된 자유스럽고 평화적 선거가 아니었고 주한미군이 개입된 군사적 폭력행사였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미군 정찰기는 상공을 비행하였고 선거장이 있는 곳에는 야구용 타봉을 가진 「향보단」에 의하여 엄중히 경호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수 천 명의 경관과 투입된 민간인이 미군의 지원하에 각 요소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 골목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용 타봉,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경비대는 미국제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분위기는 계엄령하의 도시와 같았다』라고 보도했다.
미군은 투표를 거절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주저하는 사람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하고 마구 때리며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골목마다 뭔가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났고 여자의 비명 소리도 들려왔지만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만 듣고 있을 뿐 주위에서는 그 쪽으로 감히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은 5월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5만 여명에 달하는 우리 민중들을 체포했고 5백89명의 애국민중을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파렴치하게도 이미 작정했던 대로 단독선거결과를 날조하여 『선거가 성과 있게 진행』됐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은 유엔을 도구로 이승만을 괴뢰 정권을 만들어 내는 선거놀음판을 벌림으로써 우리 조국과 민족을 분열시키는 범죄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1946.3.5. 서울에서 38도선 철폐를 요구하여 국민대회를 열어 미 군정청까지 행진하는 시위가 있었으나 미군정은 정반대로, 1946.5.23일 38도선 무허가월경 금지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38선 왕래를 금지시켜 놓고 미군은 지령을 내려 이승만에게, 이제는 통일정부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남에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발언하게 하였다. (1946.6.3. 이승만 정읍발언). 이 같은 발언은 1947.5.21.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으로서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항구적 신탁통치가 아닌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향해 나가는 미소공동위원회에는 관심이 없고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만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48.2.10 김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1948.2.16 김구, 김규식,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비롯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자고 북측에 서신
1948.2.26 유엔 소위원회, 조선 전토가 어려우면 남에서의 단독선거도 가능하다는 권고안가결
이에 대해 남에서는 2.7구국투쟁, 제주도 4.3항쟁, 5.8총파업 등
단선반대투쟁 전개
1948.3.11 남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이 남북 협상으로 민족자결과 조국통일을 실현하자는 성명 발표
1948.3.25 북측이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4월 평양) 제안
1948.4.17 김구, 기자회견에서 평양행 표명
1948.4.19 평양에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4.26)
1948.4.26 평양에서 남북인사 15명을 중심으로 남북 지도자협의회 (∼4.30)
1948.5.1 평양에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1948.5.6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관한 공동성명 발표
1948.5.10 남북지도자들의 분단을 막기 위한 활동이 활발함에도 남은 범죄단체 유엔의 감시 속에서 단독선거 강행 실시
1948.7.17 남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이승만) 선출
1948.8.15 남에서 대한민국 수립선포. 초대 대통령 이승만, 무력에 의해서라도 북한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을 갖는다고 발언
1948.8.25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1948.9.8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초대 수상(김일성) 선출
1948.9.9 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선포
1948.9.10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
소미 양국 정부에 보내는 요청서에서 소미 양군 철수 요청
김일성 수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정강 발표,
미소 양군의 동시 철수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으로 제시
1948.10.13 남의 김약수, 노일환 등 45명의 제헌의회 의원들이 미군철수요청 결의안을 국회 제출
1948.10.19 남의 여수에서 군인폭동 (10.27)
1948.12.1 남에서 반공법 공포
1948.12.12 범죄 단체 유엔, 민중들이 저항하는 대한민국 이승만 괴뢰정부를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여 우리 민족을 짓밟은 만행을 범함, 유엔조선위원단 설치 등의 결의 채택
1948.12.26 소련, 북주둔군의 철수 완료(12.25) 발표
1949.1.1 미국정부, 대한민국 승인에 관한 성명 발표
1949.1.4 미 국무성, 한국이 자위력을 보유할 때까지 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발표
1949.1.18 김구, 외국군대 철수 주장
1949.1.19 이승만정권, 유엔가입 신청
1949.1.29 이승만정권, 남북협상 반대성명 발표
2.5 유엔조선위원단 서울 도착
2.9 북, 유엔가입 신청
1949.3.19 남의 김약수(국회 부의장) 등 국회의원 63명이 외군철거와 평화통일 결의안 제출
1949.3.31 이승만정권, 대북교역 금지 발표
6.8 미 국무성, 미군철수 발표
1949.6.25 평양에서 남북 정당대중단체 대표자회의가 열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결성(6.28). 남북총선거 주장
1949.6.26 서울에서 김구 암살
1949.6.29 미군, 군사고문단 500여명을 남겨두고 남으로부터의 철군완료발표
1949.7.5 북의 조국전선, 남측의 제 정당사회단체에게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 주관하의 9월 15일 남북총선거 제안. 남측은 이를 거부 (7.9)
1949.8.29 소련에서 핵실험 성공
1949.10.1 유엔총회, 남 대표 초청안 채택. 북 대표 초청안 부결
1949.10.1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선언
1950.1.26 한미상호 재경원조협정 및 주한 미 군사고문단 설치에 관한 한미협정조인
1950.1.12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으로부터 제외시킨다고 발표
1950.6.7 북의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 8.15 5주년을 계기로 민주주의적 원칙에서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고 전 조선입법기관을 창설하는 방법으로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방안 제시
1950.6.19 북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북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의 국회를 단일한 입법기관으로 연합하는 방법으로 통일 할 것을 제의
1950.6.25 조선(한국)전쟁 발발. 미국의 요구에 의해 유엔 긴급안보이사회가 열려 북을 평화의 파괴자로 단정하는 권고결의안 채택
1950.6.27 트루만 미 대통령,미 극동 해공군의 작전출동 명령. 유엔 안보이사회, 미국이 제출한 유엔 성원국에 의한 대한군사원조 검토 결의안 채택
1950.7.7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군사령부를 구성하고 조선(한국)전쟁 참전
1950.9.15 미군 인천 상륙
1950.10.25 중국 인민지원군이 조선(한국)전쟁 참전
1950.11.30 트루만 미 대통령, 조선(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한다고 언명
36년 동안 일제의 감시 하에서 살아 왔던 우리민족은 해방된 뒤에도 국제연합의 감시 속에서 선거 아닌 선거를 치렀다. 선거라기보다 목숨까지 빼앗는 미군의 군사작전으로 시행된 강제적 선거연극 이었다.
사람들은 당시의 UN은 중립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엔에서 이스라엘 문제나, 자신의 인권은 빠진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인권을 문제 삼는 등 중립성의 문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었으나 친일매국노를 처벌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친일매국노들이 오히려 잘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러고도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애국투사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조선이란 나라의 존재를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호소하기도 하고 무장하여 싸우기도 하면서 오직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받쳤습니다.
식민지 예속에서 벗어났으면 마땅히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온 애국투사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한은 독립투쟁 했던 애국자들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애국자로 우대하지 않고 가난 속에서 어렵게 살게 내버려두었습니다. 오죽하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생겨났겠습니까?
이게 해방을 맞이해서 정상적인 국가로 돌아온 것입니까?
반면에 독립 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매국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매국노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잘 살며 활개 치며 다니는 것을 볼 때 여전히 식민치하 상태가 아닙니까?
반역자 매국노를 처단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매국노가 도리어 애국자나 국가 유공자로 추앙받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우리나라가 나라가 아니거나 해방이 안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조선 해방시켜 준다고 해도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요즘의 신문방송에서는 6.25남침이란 말을 거의 들을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침이란 선전이 거짓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김일성이란 말도 북한 괴뢰란 말도 요즘은 안합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다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뉴스를 멋대로 소설 쓰듯 내보내는 버릇은 아직도 있습니다.
자신이 속국이기 때문에 남한의 괴뢰언론들은 마치 북한도 중국의 속국인양 떠벌입니다.
북한은 제재를 풀기 전에는 6자회담에 나가지 않을 거라고 이미 밝혔음에도 중국이 나가라고 지시하고 북한은 지시받고 6자회담에 나가기라도 하는 예속국인 것처럼 멋대로 씨부렁거립니다.
북한을 방문한 중국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이 오늘(2010.02.08.)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것으로 보입니다. 6자회담에 돌아오라는 요구에 김 위원장이 화답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왕 부장은 2004년 이후 4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고 그 때마다 방북 사흘이 되는 날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을 가졌습니다.
위와 같이 남조선 언론들은 북한을 중국이 하란대로 하는 속국인양 기사를 멋대로 쓰는 습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주석의 친서를 가지고 왔는데도 김 위원장은 홀연히 함경남도 함흥시 소재 ‘2·8 비날론 연합기업소’로 현지지도를 하기위해 떠났다. 남한에서는 워싱턴에서 고위 인사가 오면 대통령이 특사를 맞이하기 위해 그날 지방에 시찰 나가지 못하지만 김 위원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방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날(2010.02.08.) 저녁에 중국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이 김정일 위원장이 현지지도 하는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승용차로 5시간 거리인 함흥을 찾아가 면담하고 구두친서와 선물을 전달하는 장면을 사진과 함께 신화통신이 보도하였다. 김정일은 친일친미 세력들이 중병을 앓고 있다고 지껄이는 것과는 달리 왕성하게 현지지도를 하고 사진 속 모습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김정일을 만나려고 5시간 거리도 마다 않고 달려간 것이다. 한국 같으면 미국에서 정부인사가 왔다면 부르기 전에 달려가 노비처럼 굽실거릴 것입니다.
외국의 간섭을 물리치고 핵을 만들어 나라를 지킨 나라가 속국이면 외국이 허락 않는다고 핵무기는커녕 평화적 이용조차 못하는 나라는 뭐라 해야 합니까?
2010.02.12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UN대북특사가 북한은 제재조치 등으로 인해 6자회담 복귀 준비가 안 됐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을 방문했던 린 파스코 유엔사무국 정무담당 사무차장은 12일 베이징에서 기자들에게 북측이 회담 복귀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복귀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닌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면담에서 왕 부장은 북한에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는 후진타오 주석의 친서를 김 위원장에게 전달할 것이라느니 김 위원장도 6자회담 복귀 의사를 중국 측에 전할 가능성이 높다느니 정부 관계자까지 나서 무슨 요식행위라느니 라는 남한의 뉴스가 얼마나 어리석은 소설인지 불과 며칠 만에 드러난 것입니다.
친일친미 세력들은 외세에 기생해서 살줄만 알았지 독립의 의지조차 없고 선량한 국민들이 그들에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속은걸 생각하면 기생충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런 기생충들은 김일성의 최측근 아무 아무개를 등잔인물로 하는 소설을 쓰고 남침증거를 조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러시아에 이어서 중국도 교과서에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으로 고쳐져 있다고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 누리꾼들은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15주년 기념일인 2008.12.26일 인터넷을 통해 마오 주석이 내린 6.25전쟁 참전 결정이 침략자를 격퇴한 극히 정당한 결정이었다는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중국 포털 사이트인 왕이(網易)와 후난성에서 발행되는 후난일보(湖南日報) 등은 이날 '마오쩌둥의 한반도 참전 결정은 착오'라는 책(영국의 전기 작가인 필립 쇼트가 지난 2004년 출간한 저서) 내용을 소개하고 찬반 의견을 받은 결과
중국 누리꾼들은 토론방에 일제히 몰려들어 마오 주석을 반대하는 자는 미국의 충견(忠犬) 또는 변견(便犬)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6.25전쟁 참전 결정이 착오라는 입장을 개진한 누리꾼은 1명도 찾을 수 없었다.
베이징에 산다는 한 누리꾼은 "마오 주석은 6.25전쟁 참전을 통해 15개 서방 열강에 맞서 용감하게 항쟁했다"며 "지금은 돈도 있고 최신 무기도 있지만 그날의 정신이 없다"고 지적했다.
6.25 남침을 말하는 것이나 미국이 (자국의 인권유린은 빠뜨리고 남의 나라) 인권을 얘기하는 거나 다른 점이 있나요?
유엔 임시조선위원단장 메논이 48년 1월 21일 서울에 와서 처음한 라디오 방송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통일국가가 있었다면 그것은 조선이며, 조선은 동일한 언어를 쓰고, 동일한 전통을 사랑해 온 단일국가였습니다. 지금 조선은 남북 대립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나, 통일을 이뤄 외국 군대의 기지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양대 세력 간 황금의 가교가 되기를 나는 충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는 메논의 염려대로 이뤄야할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택하지 않아야 될 외국 군대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한국문제결정에서 미국에 의한 유엔결의의 불법성은 조선 문제가 유엔에 상정될 수 없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상정되었다는데 있으며 조선대표의 참가 없이 조선 문제를 토의 결정하였다는데 있으며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도록 한 국제법규범을 위반하였다는 데에 있다.
1941년의 ≪대서양헌장≫은 ≪모든 인민은 자신이 요구하는 정치제도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공산국가가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남의 나라 정치제도에 간섭하는 것은 자주권을 보장한 대서양헌장을 위반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유엔헌장 제2조 7항에서도 ≪대서양헌장≫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라 함은 국민, 영토, 주권 즉, 국가를 구성하는 3요소를 갖추었을 때 국가라고 정의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아닌데 주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즉, 주권이 없습니다.
한국군에게 대통령의 명령과 미군 사령관의 명령이 동시에 하달 됐다면 한국군은 어느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북미와 중국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여 전쟁은 잠시 멈추고 휴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휴전협정을 반대하여 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더 싸워야 한다면서 국군에게 전투 명령을 내렸으나 전쟁은 더 이상 지속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명령보다 미군사령관의 명령이 더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상납한 상태이고 평시작전통제권도 김영삼 정권시절이던 1994년 10월에 이르러서야 한미 군사위원회 회의(MCM)에서 환수하기로 합의하였다.
한국군에게는 전시작전권은 고사하고 평시작전권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자기나라 땅에서도 노비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미군의 허가를 받아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미군은 이 땅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고 국군은 족쇄를 찬 것처럼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미군이 한국인에게 그쪽으로 가도 되냐고 묻는 게 아니고 거꾸로 한국인은 자기 땅에서도 남에게 물어보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니
외국에서 온 다른 사람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노릇을 하는 땅을 말합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 국군이 당시의 미군사령부의 승인을 받아 움직인 사실이 청문회를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졌듯이. 부대 이동이나 배정 등도 한국군 맘대로 할 수 없고 미군의 지휘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 때까지 한국에 미8군만 주둔하는 줄 알았었는데 수도경비를 목적으로 미2군사령부가 주둔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일본 놈들이 3.1운동을 폭동이라고 불렀듯이 당시 모든 남한 언론은 폭동이라고 불렀습니다.) 때 신군부를 이끈 전두환 사령관이 국방에는 허점이 생기지 않기 위해 수도경비 임무를 담당했던 군대를 이동시켜 진압작전을 펼쳤는데 이때 미2군사령관의 사전 승인을 받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도 미2군이 있었으며 미2군사령관 은 밴플리트(Van Fleet) 중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여중생이 모두 2차선 직선 도로의 찻길이 아닌 갓길을 따라 앞뒤로 나란히 오르막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미군 장갑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섭게 따라와서 옆이 절벽 같은 언덕이므로 앞으로만 도망치듯 신발이 벗겨지도록 달렸으나 숨이 차 바로 앞의 언덕을 넘지 못한 여중생들을 재미삼아 깔아뭉갠 (마주 오는 장갑차를 순간적으로 피하기 위해 급히 갓길로 방향을 꺽은 것이 아니고 두 여중생을 줄곧 따라왔던 궤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다) 효순 미선 양 사건 때도 미2군사령관 과 주한미대사가 사과하였습니다.
미2군 은 미국이 세운 이승만 괴뢰 정권을 목숨 걸고 반대하고 항거하는 한국국민들로부터 저들이 세운 괴뢰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북한군에 대비하는 미8군 이외에 한국내의 민중항거에 대비하여 미2군 을 따로 배치하였습니다.
한국인 여중생을 죽여도 미군은 재판은커녕 한국 측의 심문조차 받지 않고 자기나라로 귀국했습니다.
미군이 우리를 지켜주니까 감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피해자는 전혀 잘못이 없고 미군의 잘못이 명백한데도 미국이 자국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묻지 않았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짓입니다.
자신의 조카들에게 범죄를 마음대로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린 징기스칸의 야만적 행동을 미국은 한국인에게 하였습니다.
미군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데, 미군이 지키는 게 한국사람 입니까? 한국 땅입니까?
저들의 군사기지로서 한국 땅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쟁은 미군이 일으키고 한국군이 맨 앞에 나가 싸웁니다.
효순 미선 양 사건은 수많은 미군 범죄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땅의 미군들은 치외법권에 있습니다. 저들은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반면에 한국군은 이동하기 전에 허가를 받게 합니다. 이 땅의 주인이 뒤바뀌었습니다. 미군은 주인이고 한국인은 노비가 됐습니다.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에 감사해야만 합니까?
침략자가 자기의 식민지를 지키지 안 지키겠습니까?
그럼 침략자에게는 감사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침략자에게서 벗어나지 말고 노비로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국민들은 우리의 수도나 대통령을 미군의 명령을 받지 않고 국군이 스스로 지키고 있고 군통수권도 교과서에서처럼 한국의 대통령이 갖고 있는 줄 아는데 전부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있는 수도를 휘하에 한국군을 거느리고 있는 미군이 지키고 있습니다.
주권이란 한 국가의 최고 권력이며 다른 나라의 간섭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을 주권이라 합니다.
한국군의 통수권은 대통령이 아닌 미군사령관에게 있습니다. 즉, 한국의 군통수권은 미군에 의해 독자적인 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즉, 엄밀히 따져 한국은 군통수권을 포함하고 있는 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주권이 없는 국가 이므로 독립국이 아니며 예속국가 즉, 식민지입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다른 나라들의 주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국은 특히 미국이 효율적으로 북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의 주권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즉, 가장 크게 주권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주권국가가 기본으로 가져야할 전시작전권을 한미연합사가 여전히 갖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주권국가로서 치욕스러운 일이다. 군사주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전시작전권을 가지지 못한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라 할 수 있는가. 그러함에도, 정부가 자기 발로 나서서 재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주권국가임을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미국이 2010.2.2일 발표한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QDR)에서도 한국으로 2012년 전시작전권 이양을 확인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일부 보수층의 요구를 앞세워 대한민국의 주권을 되돌려 받는 것을 스스로 포기 한다는 것은 주권국가의 통수권자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미국은 아예 이런 논의 자체가 나오는 걸 불쾌하게 생각한다. 어렵사리 합의한 걸 되돌리기 싫은 것이다.
전작권이 도대체 뭐길래 한미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걸까?
말 그대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대북정보태세인 `데프콘`이 3단계로 발령되면 한국군의 작전을 통제할 권리를 누가 갖느냐의 문제이다. `데프콘3`는 적의 도발 징후가 포착되는 상황이다.
평상시에는 작전통제권은 (1994년부터) 한국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지만. 한반도 유사시에는 미국의 4성 장군이 맡고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이 넘어간다.
이걸 다시 한국이 갖자고 하는 것이 전작권 전환의 요체다. 당연히 한미연합사는 해체된다. 참여 정부 시절인 지난 2007년 2월 24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국방장관회담에서 이미 최종 합의를 본 사항이다.
예비역 장성들의 모임인 성우회는 전작권의 한국군 단독행사를 반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미국 의회와 국방부, 주한미군사령부에 보냈다. 이들은 성명에서 "미국 정부가 한국의 준비 상태가 부족한데도 노무현 정부의 일방적인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며 "이 중대한 문제에 대해 미국 정부와 조야는 물론 미국 국민이 우호적인 관심을 보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노무현대통령의 일방적인 요구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언질이 있고나서 노대통령이 거기에 보조를 맞춘 것입니다.
한국에서 아무리 요구해도 미국은 미룰 의향이 없습니다.
지난 22일 제41차 한미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을 보면 당초 이 성명에 굳이 전작권에 대한 언급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11항에 전작권 환수를 재차 확인하는 문구가 삽입됐다.
"양 장관은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전략적 전환계획(STP)에 따라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한미연합사령관의 보고에 의견을 함께하고, 2012년 4월 17일 전작권 전환에 대한 양측의 의사를 재확인하였다."
전작권 전환과 관련해서는 다른 소리하지 말라는 강경한 태도입니다.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도 이날 회견에서 "2012년 4월17일 전환을 절대적으로 확신 한다"며 "마감시한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절대적으로`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만이 아니다. 미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군의 작전능력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작년 한미합동군사연습은 을지프리덤가디언(UFC) 연습 직후 월터 샤프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은 북한과 전쟁을 이끌어나갈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샤프 사령관은 그러면서 국회나 성우회를 상대로 전작권 전환의 당위성을 홍보하고 나섰다.
어떤 사람은 전시작전권을 미국이 갖고 있어서 주한미군은 효용가치가 적고 그리하여 한반도 전쟁을 하는 데만 유용성이 있어서 다른 나라로 주한 미군을 뽑아 예를들어 중동전을 치른다고 할 때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시작전권을 환수하려고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법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황당무개한 소리이고 사실은 국지전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전쟁을 벌리더라도 미국은 제3자의 입장에 서서 한민족끼리 피를 흘리라는 것입니다. 군사분계선의 충돌로 인하여 미본토가 즉각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세계 최빈국과 핵전쟁을 하면 승리해도 미국은 세계초강대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위험을 무릅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시작전권 이양은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고 이양 후에도 국군 통수권을 여전히 행사하려는 속셈으로 기만술을 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 일본은 미국이란 세계 제1의 강대국을 상대해서 싸우기 위해서는 필히 한국인을 총동원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식민지에서는, 세계 최강 미국은 한국인을 총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보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은 가혹했습니다.
오늘날 미제강점 시절에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농산물 공산품들이 풍부해졌기 때문에 일제의 강점시절보다 덜 가혹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일제가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도 3.1운동에 의한 검거 투옥 그리고 제암리 학살 등이 있었으나 국내에서의 학살은 미제에 비교해 볼 때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제 침략자들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모형제 친인척 등의 한국 사람이 미국의 식민지화 정책에 의해 자기나라 영토에서 죽임을 당해 조국산천은 시체들로 메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제식민지 시절에는 무자비한 학살로 식민지화 과정을 마치고도 대륙침략의 야망을 실행하기 위해 전국토가 전쟁터로 변해 하늘에서 폭탄벼락이 소나기 퍼붓듯 하여 수없이 많은 국민이 미군과 유엔군에게 죽임을 당해 피바다가 되었고 그러고도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된 채 혈육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노비신세가 되어 치욕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는 형제끼리 총을 쏘는 전쟁터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나라가 분열 되지도 않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010.1.12일 웹사이트에 올린 기사에서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과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처럼 북한출신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만 남한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이 항상 곤궁하고 호전적인 2등 시민으로 취급하고, 마찬가지로 북한의 학교에서는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이며 북한 침략을 위한 도약대 구실을 하고 있다고 가르친다면서 남북한은 분단 65년으로 이질감이 심화 됐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상의 뉴욕타임스가 지적한대로 호전적인 나라는 남한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북한이 아니고 핵 선제공격을 준비한 미국이고 여기에 맞춰서 짖어대는 친일친미 기생충들입니다.
뉴욕타임스 지적대로 오늘도 대한민국 뉴스를 들어보면 북한 사람 수십 만 명 굶어 죽었습니다. 이러다 북한에는 사람이 다 없어지리 싶습니다.
북한이 쌀이 적게 나는 지역이어서 그렇지 비록 잡곡밥이래도 남한의 급식비 못 내서 점신을 굶는 극빈 계층이나 노숙자나 차상위 계층에 비하면 부럽다 할 만큼 끼니 꼬박꼬박 안 거르고 잘 챙겨 먹고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넉넉히 사는 중국 형제가 남는다고 쌀을 보내오지만 건강에도 좋아 우리 북한 사람은 잡곡밥을 즐겨 먹습네다. ㅎㅎ
빚더미에 앉아서도 남 걱정까지 해주는 것은 좋은데 제 발등의 불씨부터 끄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뉴욕타임스가 지적한대로 북한 곤궁한 것 걱정 말고 자기 나라 빚이나 걱정하기 바랍니다.
원금은커녕 이자도 제 때 못 갚아 또 빚을 내서 이자를 갚고 있으니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하여 언제 터질지 모르는 빚 시한폭탄을 안고 있으니 그거나 걱정하기 바랍니다.
군대의 작전권도 없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남한이 미국이 식민지가 맞는데 언론에서는 아닌 것처럼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주입하여 마비시킵니다.
원주민들을 쇠사슬로 묶고 채찍으로 때려야만 식민지 입니까?
용어를 바로 알고 사용하기 바랍니다.
주인이 원주민에서 외래 타 종족으로 바뀐 것이 식민지입니다.
식민지를 국어사전에서 보면 채찍으로 때리는 것은 안 나와 있고 식민지(植民地)란 <정치적?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에 예속되어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한 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노릇을 하는 땅을 말합니다.
한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완전한 식민지입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전쟁 때 자신들의 민간인 학살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감추며 한국전쟁도 남한과 북한의 전쟁 즉, 민족끼리 서로 싸운 내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민족의 핏줄을 두 토막으로 동강낸 인위적인 장벽을 하루속히 제거해버리고 자주적인 통일조국에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통일된 한국에는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 소고기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IMF 환란과 경제신탁통치도 없어서 하루 35명씩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침략을 위해서 외국에까지 가서 미군의 총알받이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무기를 우리 손으로 만들지 않고 피땀 흘려 번 외화로 미국 무기 사오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북한을 이간질한 친일매국노, 그리고 기꺼이 미국에 기생하여 붙어사는 숭미매국노들을 배제함으로써 자주적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첫째, 그들을 지원하는 미군이 철수해야합니다.
독일에는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히거나 학살한 기생충들이 존재하지 않아서 동족끼리 쉽게 화합할 수 있어서 통일이 쉬웠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서독에 자원이 풍부하고 생활 수준이 높은 반면 동독은 이와 반대였고 더구나 자신의 국가를 지키려는 자긍심이 없었고 전범국가라고 서독과 함께 씻기 어려운 불명예를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독이 흡수해 주면 쉽게 통일이 되었다
결정적인 것은 동서독을 갈라놓은 당사자인 미소가 통일시키기로 합의하면 동독은 자립경제가 아니므로 통일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 장벽을 쌓고 넘어가지 못하게 한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듯
휴전선을 콘크리트 장벽까지 이중 삼중으로 쌓고 반공법을 만들어 왕래를 금지시킨 남한이 북한에 흡수될 것입니다.
동독과 달리 북한은 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게 해줍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친일파들이 북한을 떠나도 김일성은 잡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항일유격대에서도 도주한 자가 생겨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갈려면 가라입니다.
북한의 <적기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
항일무장 투쟁도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조국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한 대원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덤벼치던 나머지 척탄통알이 들어있는 배낭을 전장에 두고 척탄통만 가지고 퇴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부대에서는 모임을 열고 그 대원을 비판하였습니다. 무기를 잃은 대원을 비판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혁명군부대들에서 간혹 보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비판무대에 오른 대원은 전우들이 주는 충고를 응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초급정치일꾼이 과오를 범한 대원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제기하는 바람에 회의분위기가 살벌해졌습니다.
김책은 과오를 범한 대원의 입대년도를 요해해 보고 그가 신대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책임은 그를 잘 교양하지 못한 지휘관들에게 있으니 책벌이 아니라 방조를 주어야 한다고 결론한 다음 초급정치일꾼의 제의를 기각해버리었습니다.
문제가 이렇게 끝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처단을 주장하던 그 초급정치일꾼이 계속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사건은 확대되었습니다.
과오를 범한 신입대원은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하루 종일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그날 밤으로 도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순조롭게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문제가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심각하게 번져갔습니다. 책벌을 주장하던 초급정치일꾼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두들 인정사정없는 그를 비난하였습니다. 그를 반혁명분자라고 규탄하는 사람, 처벌해야 할 사람이라고 기염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책은 이런 사태를 보고받고서 책임은 다른데 있지 않고 나에게 있다, 대원들의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여길 줄 모르는 정치일꾼이 있다는 것은 정치주임인 내가 일을 쓰게 못한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그 초급정치일꾼을 자신의 호위반에 편입시키고 가까이 끼고 있으면서 개별교양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도주해도 잡지 않습니다. 하기 싫은 사람 억지도 시키면 일본군에게 발각될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은 세뇌교육의 결과로 중국을 미워하지만 중국과 달리 미국은 단지 미국에 반대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아프간이나 이라크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침략합니다.
한국에서는, 권력자가 국민의 반대 의사를 외면하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게 민주주의 입니까?
미국은 우리에게 일본 개도 안 먹는 광우병 의심 소고기를 먹이고
이렇게 일본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면서 아프간에 또다시 수천 명의 국군의 파병을 요구하여 침략전쟁에서 침략자를 위해 목숨 받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대부분 부모형제를 다시는 못 만난 채 살다 그대로 죽어야했습니다.
노예들이나 자기의 혈육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스스로 노예가 아니고 자유인이라고 믿습니까?
그런데 노예해방 전의 흑인 노예들처럼 가족이 흩어져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한국 땅에서 살면서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고 미국의 군사식민지의 원주민으로 전락하여 치욕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주둔 비용도 내지 않고 한국인을 노예나 야만인 취급하며 쉽게 죽이는 미군의 철수를 시민들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군보고 나가라면 나가겠습니까? 무슨 이유로 자신의 지배지역을 포기해 축소시키겠습니까?
미군이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은 우리의 근 현대사에서 체험했듯이 연약한 민중의 외침으로는 안 됩니다. 힘에는 힘으로 대해줘야 합니다. 즉, 미국과 북한의 힘겨루기로 결판나는 것입니다.
미르는 소련이 발사한 우주 정거장이다. 1986년 2월 19일 소련의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발사되어 2001년 3월 23일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하면서 파괴될 때까지 다양한 실험에 사용되었다.
미르는 1971년까지 발사된 소련의 살류트 우주정거장 시리즈에 기초하고 있다.
미르의 목적은 거대한, 거주 가능한 우주 과학실험실의 마련이었다.
미국은 미르에 대응해서, 프리덤 우주정거장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미르가 발사되기 한 달 전에, 챌린저 우주왕복선이 폭발했다.
냉전이 종료된 후에, 우주왕복선-미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미국 우주인과 다른 서방의 우주인들이 미르 우주정거장에 장기간 체류하고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미르의 수명이 종료할 즈음에, 최초의 궤도 비행하는 미르를 텔레비전/영화 스튜디오로 사용하기 위하여 민간용으로 구입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더 이상 사용하기 곤란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결국 러시아의 우주 정거장은 2001년 3월 23일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피지의 난디(Nadi) 근처에 추락, 남태평양 바다속으로 가라앉으며 15년의 임무를 마쳤다.
미르 우주 정거장은 발사된 지 10년쯤 지나서 고장이 나기 시작하였으나 수리를 거듭하여 15년의 우주정거장 최장기록을 세우고 2001년 3월 23일에 파편들이 남태평양 바다에 떨어졌다.
미르 우주 정거장은 원래, 미르 2가 후속계획으로 잡혀있었다. 미르 2의 정식명칭은 즈베즈다였다.
즈베즈다는 현재의 국제우주정거장 ISS의 모델이 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國際宇宙停車場) ISS (International Space Station)는 1998년 이후로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이 참여하여 건설 중인 연구시설을 갖춘 다국적 우주 정거장이며 2010년까지 완성되어 최소한 2016년까지는 운영될 계획이다.
오늘날 미국은 경제가 붕괴되고 있는 탓에 우주왕복선도 제때에 만들지 못하고 러시아 우주선인 소유즈호를 빌려서 사용해야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나사, 즉 미 항공우주국은 오는 2010년부터 지구와 우주정거장 ISS (러시아 축적된 기술력에 세계 각국이 협력하여 만든 현재 세계유일의 우주정거장)를 오갈 우주왕복선이 없습니다.
그동안 나사가 만든 우주 왕복선의 잦은 고장과 막대한 비용으로 인해서 러시아 소유즈호를 빌리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라고 합니다.
NASA는 국제우주정거장 4회 왕복에 무려 3억6,0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러시아와 소유즈 대여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우주개발은 한번 손을 놓으면 언제 회복될지도 모르지만 경제가 회복된다고 해도 그때는 따라가기 힘들다.
그리고 계약이 종료되는 2013년에는 러시아에서 요금을 더 인상할 수도 있어 미국으로서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라고 합니다.
미국은 나사도 폐쇄하고 나사가 하던 일을 민간업체에 넘기고 과거처럼 국가 주도의 우주개발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앞으로 민간 우주기업이 NASA를 대신합니다.
미합중국 방위기관으로 간주되어온 NASA가 문들 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국이 언론을 통해 줄기차게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98년 북한이 발사한 인공위성 광명성 1호를 정작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는 실패한 걸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근거 없는 소리를 하는 부류입니다. 당시에 1단 추진체는 동해에 2단은 일본 동북쪽에 3단은 알래스카 근해에 떨어진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2005.2.25일 국정원에서도 북한이 1998년 8월 31일 쏘아올린 발사체가 인공위성이라는 정보 당국의 공식 발언이 있었다.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하면 인공위성입니다. 북한은 인민을 하늘로 떠받드는 나라인데 그런 인민을 속인다는 것은 잇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달나라에 인류 최초로 갔다 온 세기의 사기꾼과 그에 기생하는 것들이나 할 짓입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마이클 오핸런 선임연구원은 2006년 6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 전략 군 소위 청문회에서 ‘어떤 국가가 핵무기를 지구 밖으로 쏘아 올릴 수 있게 되면 그 나라는 이미 우주공간에 있는 인공위성을 공격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에 핵무기를 장착하게 된다면 우주공간에서 핵무기를 터뜨려 위성을 파괴하고, 다른 위성들의 작전을 상당기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은 2009년 4월 5일 에 광명성 2호를 발사했는데 1단, 2단은 지구로 떨어졌고 3단은 지구를 돌고 있습니다. 3단에 핵폭탄이 실려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핵을 고고도에서 폭발시키면 인명 피해는 일으키지 않으면서 적의 첩보위성의 정상 작동을 방해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고도 (80km이상)에서 폭발시키면 핵EMP(Electromagnetic Pulse) 영향으로 인하여 군사용 전자기기를 포함해서 모든 전자기기들의 작동을 멈추게 하거나 오작동을 일으키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각종 전자 정밀무기체제에 의존하는 미국은 가장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한 나라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 수도 있고 적국이 핵 공격한 걸로 전자기기가 오작동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미국과 소련은 우주공간에서의 핵폭발 실험을 상호 금지키로 협정을 맺고 지키고 있습니다. 중국은 협정 당사자가 아니지만 이런 협정을 자발적으로 준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극동지역 치타시(市)를 방문중인 유리 발루예프스키 러시아군 총참모장은 기자들과 만나 "러시아의 무기 통제시스템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관찰했다"면서 2006.7.5일 하루 동안 10기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북한이 2006년 7월5일 10개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 했는데 미국은 단 한 개의 미사일을 발사하다가 공중 폭발로 실패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도 이러한 핵EMP 영향 때문입니다.
핵EMP에 대한 방어는 너무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고, 현재 미소가 핵EMP 실험을 금지하고 있어 그 효과도 정확히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북한이 이제 6자회담은 안 하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6자회담 틀 내에서만 북미대화가 가능하다던 미국이 대화를 하겠다고 방향을 선회한 것은 광명성 2호가 EMP탄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파악 됐기 때문입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방부 무기 시험 담당 차관보를 지낸 필립 코일은 2008.04.16일 미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MD 시스템 (MD는 Missile Defense의 약자)의 '아킬레스 건'은 요격미사일을 피하기 위한 교란장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코일은 대표적인 예로 적국이 탄도미사일의 탄두에 레이저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하얀색 페인트를 칠할 경우 탄도미사일을 포착, 요격하는데 필수적인 레이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코일은 또 최근 5년간 실시된 미사일 요격실험은 그 이전 5년간 실시됐던 실험에 비해 "단순하고 비현실적"이었다면서 MD 시스템 개발에 기술적으로 큰 진전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MD 시스템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온 '걱정하는 과학자 모임'(UCS)의 리스베스 그론룬드는 청문회 증언에서 "(MD) 프로그램은 현실세계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는데 어떠한 기대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관론에 힘을 실었다.
그론룬드는 "이 프로그램은 오히려 미국에 가해지는 현실적인 핵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갉아먹을 따름"이라고 힐난했다.
북한의 광명성 2호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이유는 이와 같이 레이저를 반사시키고 약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북한은 광명성 2호의 발사에 그치지 않고 무수단리에 설치된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기지보다 규모가 더 크고 기능이 향상된 장거리 미사일 발사기지를 비밀리에 서해안에 건설했습니다.
글로벌시큐리티(GlobalSecurity) 소속의 위성사진 분석전문가인 존 파이크에 따르면 북한의 기존 미사일 발사 기지인 무수단리 기지의 경우 규모가 작아 단기간에 여러 시험을 실시할 수 없는데 반해 새 기지는 규모가 크고 훨씬 더 정교해 짧은 시간에 여러 차례 발사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설은 무수단리 기지와 달리 대부분 구릉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 정찰로부터 훨씬 더 잘 보호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은 광명성 2호처럼 핵폭탄을 실은 인공위성을 일시에 여러 개를 발사하여 미 대륙 위에서 핵EMP 실험을 계속적으로 실시하여 전자교란을 일으켜 혼란을 겪게 할 목적으로 이러한 대규모의 발사대를 건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자교란이 발생하면 호전광 미국은 핵전쟁을 일으키고 싶어도 전자기기들의 작동이 불능 상태에 빠져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현재 이와 같은 북한의 우주군사력으로 인해 미국은 정책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전쟁을 끝내고 미군 및 유엔군의 각 나라 군대는 자기나라로 돌아가는 평화회담을 하여 몇 년에 걸쳐 미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시간을 벌려고 할 것입니다.
북한이 6자회담을 할 것인지 확답을 내놓지 않고 있는 시기였던 2009.12.8.에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단이 방북 했고 이 보다 앞서 2009.11.21.에는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소장 일행을 북한에 보내 6자회담은 날짜조차 잡혀 있지 않은 상태에서 북미 대화를 가졌다. 그 후 2010.1.12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재차 요구했습니다. 클린턴은 "북한이 6자회담에 돌아오면 제제 완화를 검토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2010.1.20일 북한은 국가개발은행 을 설립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국가개발은행은 국제금융기구와 국제상업은행들과 거래하며 국가정책에 따르는 중요 대상들에 대한 투자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풍그룹은 대외경제협력기관으로서 국가개발은행에 대한 투자유치 및 자금원천을 보장하는 경제연합체로 활동하며 그룹 본부는 평양에 두기로 결정됐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번 조치는 북한 국방위원회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린 것으로 북한 최고지도부가 직접 나섰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이 금융제제를 내릴지도 모르는데 이와 같이 나온 것은 움츠려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미 대륙위에 돌고 있는 핵폭탄이 수 십 개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국가개발은행의 금융제재로 북한 김정일과 최고지도부에 직접 도전을 하여 한국전쟁 전처럼 전쟁을 유도하든지 선택은 미국에 달려있다고 선택권을 미국으로 넘긴 것이다.
2010.03.03. MBC뉴스에 따르면 대풍 박철수 회장 "北, 480조 외자유치라는 기사에서 보듯 조만간 북한은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북한의 국방력에 대한 자신감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인근에서 이어진 북한의 해상 포사격 도발(?)이 종료(2010.1.30) 된 다음날 유엔은 2월9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유엔의 고위급 인사 2명 (린 파스코에 정무담당 사무차장과 김원수 사무총장 특보 겸 비서실 차장) 을 북한에 특사로 파견하기로 했다 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UN의 고위 관계자는 유엔 최고위급인 정무담당 사무차장의 방북으로 UN과 북한 간 고위급 대화를 복원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 등을 포함한 포괄적인 이슈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뜻에 의해 움직이는 유엔이 이런 발표를 무력시위 바로 다음날 하였다는 것은 옛날 부시처럼 핵 선제공격 위협으로는 되레 자신의 안전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유엔의 발표에도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북한은 2010.1.31일 오전 7시부터 2일 오후 8시까지 서해 교동도 서방 5.8마일 해상과 평북 철산군, 평북 선천군 앞 서해상 4곳에 각각 항행금지구역을 선포했다. 그리고
2010.2.3일에는 (지난달 1월31일부터 2월 2일까지는 서해상 4곳과 동해상 1곳을 항행금지구역으로 추가 선포한데 이어서)또다시 서해상 백령도와 대청도 동부지역 NLL, 북방한계선 인근 해상의 2개소를 북한이 해상사격구역'으로 설정했습니다.
이 수역은 지난달 25일 북한군이 항행금지구역으로 선포했던 해상과 같은 구역으로 NLL을 침범하고 있다. 설정 기간은 5∼8일이다.
북한군이 첫날인 1월27일 오전 9시5분께 해안포 여러 발을 백령도 인근 NLL 해상으로 발사했었을 때 우리 군도 즉각 "백령도 해병부대에서 사거리 3~4km의 벌컨포로 대응 사격을 했다"면서 "북한이 포 사격 당시 물기둥 20~30개가 솟아올랐다"고 전했다.
그러나 같은 구역임에도 두 번째 사격기간(5∼8일)에는 대응 사격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한미군이나 휘하의 한국군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이것은 워싱턴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핵폭탄을 고고도에서 폭발시킬 수도 있고 더 하강시켜 미 본토에 핵폭탄을 투하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하지 않으면 북한은 계획대로 미 본토 상공에 핵폭탄을 지닌 인공위성 수십 개를 띄울 것입니다.
협상을 외면하면 북한은 핵EMP 실험을 계획대로 시행하여 미국을 괴롭힐 것입니다. 만일 미국이 이에 맞서 또 다시 한국전쟁을 시작한다면 지난 한국전쟁과는 달리 북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미 대륙은 모든 통신의 마비로 무방비 원시상태가 되어 전쟁이 있었다는 것도 수개월 후에야 조금씩 외부 세계에 알려질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0.1.29일 방송된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는 “김정일 위원장을 아마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 고 얘기하였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길로 나가야 만날 수 있다고 한 국내에서의 인터뷰와는 달리 이명박 대통령이 시기까지 못 박아 외국에 가서 얘기한 것은 미국의 의중이 노비 이명박 입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2010.2.1일 이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언급과 관련해 "미국 정부는 남북한 대화를 촉구 한다"고 말하고 "그 같은 회담이 개최돼야 할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BBC 회견에서는 평소의 소신을 꺾고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조건을 없애겠다고 말하였다” 즉, 북핵 문제가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다뤄지지 않을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명박의 이 같은 외국에서의 원칙 없는 발언은 이승만 괴뢰의 정읍 발언처럼 미국의 뜻을 대변하는 말로서 이명박도 이승만처럼 미국에 빌붙어 사는 괴뢰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으로 답방 원칙을 지껄이다가 알현하게 될 게 뻔합니다.
북한 노동신문은 2010.2.1일자 정론에서 김 위원장이 “이제 내가 할 일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우리 인민들에게 흰 쌀밥을 먹이고 ...... 라고 하며 군사력 증강에 힘쓰느라 인내한 주민들의 생활 향상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습니다.
즉, 핵 과학 우주과학을 세계 첨단으로 끌어 올린 북한 인민을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우리 인민 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이명박은 굶는 아이들이 있어도 모른 체하고 국민이 반대해도 운하인지 뭔지에 수조 원을 허비하고 있는데 김 위원장은 “아직 우리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이래도 이 대통령이 아닌 김 위원장이 독재자입니까? 겸손한 성품의 김정일은 주석직도 사양하였습니다. 그래서 북한인민들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수령님을 계승할 후계자를 갈망하는지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김정일의 후계자는 북한에서 지정하기 전에 일본 언론에서 앞서서 챙겨주어 세계에 선포하기 때문에 후계자가 쉽게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기 때문에 우리가 적어도 북한보다는 더 낫다고 으스대며 북한식 사회주의의 과제를 우리는 이미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급식비를 못 내고 굶는 저소득 빈곤층 아이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사회는 어떻게 된 사회인지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을 안 하고 부자들만 가지고 얘기 합니다.
북한은 전체 인민에게 골고루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을 얘기 하는 것입니다.
남한에서 부자들도 고깃국을 안 먹습니다.
일본 개도 안 먹는 음식을 돈 주고 들여와 음식문화가 오염 되었습니다.
누가 미국 실험쥐가 될지도 모르는데 먹고 싶다고 안심하고 고깃국을 먹습니까?
그러니 북한에서는 달성할지언정 남한에서는 앞으로도 고깃국 먹는 것은 언제까지나 달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북한 사람은 1년에 몇 번 정도는 먹을 수 있는데 불쌍한 남한국민들은 1년에 단 한번도 먹고 싶은 고깃국을 맘대로 못 먹고 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소고기로 국을 끓여 먹기도 하였는데 노비정권이 들어앉은 후에는 누가 소고기를 선물로 사와도 반갑지가 않고 안 먹게 되어 맛을 잊은 지 오래 됩니다.
미국이 주도한 IMF 경제신탁통치를 받은 후에는 그 전으로 회복하지 못하여 남한은 목표와 희망이 없고 경제적으로 이미 공중 분해되어 붕괴된 나라입니다. 붕괴되어 나라가 없어졌으니 집단이라고 해야 됩니다. 이 상태에서 북한정부를 반대할 때는 반정부집단이 됩니다. 즉, 반정부집단 은 남한 자신입니다.
붕괴되어 집도 돈도 직업도 없는 노숙자가 수만 명에 달하고 예비노숙자인 실업자 수는 또 얼마입니까?
겨우 얻은 직장에서 밀린 임금을 주라고 하면 잘릴까봐 일만하다가 부도나거나 도주하여 생긴 체불임금은 누구한테서 받습니까?
직업을 구하다구하다 포기한 사람은 실업자가 아니라고 하니 이런 말장난이 어디 있습니까?
그 뿐입니까 얻어먹고 잘 곳도 없어 아무데서나 자는 사람은 있는데 거지가 아니고 노숙자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남한에 거지가 많다고 선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이 아닌 것처럼 얘기 합니다.
식민지 노예 100년의 장구한 세월이 자신을 볼 수 없는 소경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미국과의 거래에서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면서 미국이 식민지 한국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지 않는다고 해괴한 소리를 합니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보다 우리가 수출을 더 많이 해서 이익을 얻는다고 합니다.
직업을 구하다 못 구해서 포기한 사람은 실업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미국무기를 수입하는 것은 무역수지에 포함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거래에서 이익을 얻는 것처럼 허위선전을 합니다.
2003~2007년 정부가 무기를 해외에서 가져오기 위해 지출한 비용은 연평균 1조2300억 원으로 이 돈은 무역협회의 <무역통계>에서 제외하여 무역수지에 포함시키지 않습니다.(이 돈은 무기무역수지라는 해괴한 용어를 만들어서 따로 음성적으로 관리합니다.)
지식경제부가 2010년3월1일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10년 1월에 적자를 기록했던 무역수지가 2월에는 흑자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흑자는 무기구입비를 제외하고 계산한 것입니다.
해방 후 좌익이 찬탁운동(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운동)을 했다는 거짓 역사소설을 썼던 작가들이 그 후에
김일성의 이름을 도용한 소련군 소위인 가짜 김일성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1950년6월25일 새벽4시 남침을 개시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는 소설을 쓰고 사실인 것처럼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김일성도 가짜라고 사기 친 더럽고 냄새나는 입으로 자꾸 거짓말을 해댑니다.
요즘에는 정치범수용소에 북한주민이 갇혀있다고 사기 칩니다.
그러면서 유엔에 거짓정보를 제공하고 미국의 북한인권 모략선동에 활용하게 합니다.
주로 알려졌습니다. 전해졌습니다. ....로 보인다. 전문가에 따르면, 무슨무슨 소식통에 따르면 ... 등으로 근거 없는 뉴스를 내보냅니다.
유엔에서 북한의 평균수명을 69.3세로 밝힌 것도 노비정권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른 것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집권 기생세력은 수십 년 동안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간첩이라고 갖은 고문으로 죽이고 북에서 보냈다며 북을 쳐 없애야 한다고 위협 공갈을 하며 사기를 쳤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임신부를 삽으로 찍어 죽였답니다.
그렇게 사람을 마구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미군이 효순 미선 양을 깔려 죽여도 죄가 안 되는 것인가? 미군이 죽인 사람이 효순 미선이 뿐이냐? 그리고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명을 죽인 것은 죄가 아닌가?
미국에게서 뭘 배우더라도 사기 치는 것은 배우지 맙시다.
미국은 아폴로 11호부터 무려 6차례나 달 왕복한 것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전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당시에 제집 드나들듯 수시로 왕복 하고서 이제 와서는 온갖 핑계를 대며 달에 사람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대사가 당시의 네덜란드 총리였던 빌렘 드리스에게 기증했던 달암석은 탄화된 나무조각 즉, 가짜인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미국은 이와 같이 다른 나라를 속이고 세계를 속인 세기의 사기꾼입니다.
이런 세기의 사기꾼을 주인님으로 모신 충견들은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식 없이 세계지배의 길로 나가고 그러기 위해 속임수까지 쓰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됐습니다. 그게 미국의 습성이요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임수와 기만은 당장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폴로가 달에 다녀온 이후로 NASA의 임무는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게 아니라 철저히 은폐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시대는 끝났다"고 미 ABC방송 이 3일 보도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0.02.01일 NASA의 유인 우주탐사계획 '컨스털레이션' 예산을 전부 없앤다고 한 데 이은 분석기사다. '우주개발 주도권을 민간 기업에 넘긴다'는 게 오바마가 내린 결정이다.
오바마 정부의 결정은 NASA 우주 탐사계획을 재검토해온 어거스틴 위원회가 "컨스털레이션 계획으로는 2020년 유인 달 탐사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결론 낸 데 따른 것이다
NASA 관계자는 "컨스털레이션 계획에 참여한 사람 모두 집에 상(喪)을 당한 기분"이라고 미국인의 심경을 대변했다.
존 F 케네디(Kennedy· 1917 ~1963) 전 대통령이 달 정복을 선언했던 1960년대 이래 우주탐사는 미국인들에게 힘과 자긍심의 상징이었다. MSNBC 방송 앵커 브라이언 윌리엄스(Williams)는 "전후 세대가 소년 시절이었을 때 우주비행사는 영웅이었다. 이제 우주를 꿈꾸던 낭만의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고 탄식했다. 플로리다 지역신문 올랜도 센티넬은 "오바마의 우주 경쟁 항복 선언"이라고 했다.
미국의 '포기' 선언으로, 이제 유인 달 탐사 계획을 진행 중이라고 공표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 중국은 2012년 무인우주선 창어 3호를 달에 착륙시키고, 2017년 이전에 우주인을 달에 보낼 계획이다.
망해서 한 푼이 아쉬운 처지에 놓였던 소련에서 뭘 못 하겠습니까?
달라면 없는 것도 만들어 주게 생겼는데 그러한 소련에서 남침증거 문서들이 나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온 것이 북한의 남침증거가 될 지라도 남침이 있기 전에 전쟁을 일으킨 자는 미국이며 전쟁 발발 일부터가 6월25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진실이 아닌 소설을 쓰는 자들은 한국전쟁에서의 유엔군의 반인륜적 학살만행에 대해서는 전혀 기술하지 않고 인명의 소중함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말들을 하지만 미국의 우리민족에 대한 만행은 소련이나 중공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약소국 북한에 죄를 뒤집어씌울 증거들을 돈이 없어 혹은 기술이 없어 달나라에도 갔다 온 미국이 만들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 백번 양보해 남침을 김일성이 했다하더라도 왜 김일성이 점령한 남한은 그대로인데 유엔군이 점령한 북한은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한 민간인에 대한 반인륜적인 범죄로 피바다가 됐습니까?
김일성은 남침을 시도하여 일거에 남한을 점령한 뒤에 미군이나 유엔군이 몰려오면 다시 북으로 철수하는 치고 빠지는 항일 유격대식 전술을 그대로 한반도 전역에 적용했다. 인민군이 남한에서 민간인을 학살 않고 철수했는데도 유엔군은 침략군으로 돌변하여 침략하였을 뿐만 아니라 끔찍한 민간인 학살 만행까지 저지를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1950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군안의 1만 6, 200여명의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을 포함하여 3만 5, 380여명이 학살되었습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평양에서 1만 5, 000여명, 안악에서 1만 9, 072명, 은률에서 1만 3, 000여명, 해주에서 6, 000여명, 벽성에서 5, 998명, 송화에서 5, 545명, 은천에서 5, 131명, 태탄에서 3, 429명, 사리원에서 950여명, 안주에서 5, 000여명, 봉천에서 3, 040명, 연안에서 2, 450명, 재령에서 1, 400여명, 장연에서 1, 199명, 락연에서 802명, 평산에서 5, 290여명, 토산에서 1, 385명, 봉산에서 1, 293명, 송림에서 1, 000여명, 양양에서 2만 5, 300여명, 강서에서 1, 561명, 남포에서 1, 511명, 개천에서 1, 342명, 순천에서 1, 200여명, 박천에서 1, 400여명, 정주에서 800여명, 철원에서 1, 560여명, 원산에서 630명, 함주에서 648명, 단천에서 532명, 선천에서 1, 400여명, 초산에서 900여명을 살해하였다. 여기에는 폭격으로 죽은 사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살육방법은 너무 가혹하여 옮겨 적을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감행한 학살만행은 한인 멸살을 노린 전대미문의 범죄행위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950년10월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간에 벌어진 이와 같은 양민 대학살 사건으로 세계는 경악했고, 그 당시 프랑스 파리에 있었던 세계적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8)는 이를 소재로 ‘코리아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1951) 이라는 대형 그림을 그려 발표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피카소가 미국의 범죄를 폭로했다고 빨갱이라고 빨간 칠을 합니다. 미국은 죄를 지어도 덮어야 옳은 것 입니까? 왜 인민군은 민간인을 안 죽이는데 미군들은 무더기로 여자 어린애까지 죽입니까?
피카소가 1937년 그린 <게르니카> 에는 사지가 절단된 주검, 죽은 아이를 안고 울부짖는 어머니. 그림 오른쪽 위편의 무시무시한 형상 등을 담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6년부터 3년여의 내전을 통해 공화정부를 물리치고 1975년 사망 때까지 36년간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프랑코를 지원하여 독일의 히틀러는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는 폐허가 되었다.
피카소는 이에 분노하여 대작 <게르니카>를 그렸습니다.
<게르니카> 는 그려도 되고 <코리아에서의 학살> 은 그리면 안 됩니까?
적을 무찌르기 위해 최신 살육 무기들로 중무장한 군인으로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 살육은 해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입니다.
보복이 필요한 경우 일지라도 힘없는 비무장 민간인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신을 믿는 기독교 국가인 서구 열강과
자유와 인권을 소중히 한다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규합해서 만든 유엔군은 북한군한테 피해를 입지도 않아 보복으로도 변명거리가 될 수 없는 천인공로 할 살육이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어린이와 여자들에게 까지 가해졌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든 군인으로서 민간인에 대한 살육 행위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참전한 유엔군이 해서는 더더욱 안 되지 않겠습니까?
반인륜적인 범죄는 어떤 변명이나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범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더라도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어떤 변명으로도 죄를 면할 수가 없는 범죄 즉, 반인륜적인 범죄에 속합니다.
민간인 학살은 죽어서도 영원히 불명예를 씻지 못할 범죄로서 범죄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범죄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해마다 6.25가 되면 반공웅변대회 글짓기대회 반공포스터 반공영화 등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김일성을 얼마나 욕했는가?
한국전쟁이후 레드 콤플렉스(complex는 정상적이 아닌 정신 상태라는 뜻이며 레드콤플렉스는 빨간색에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를 일으킬 정도의 극심한 반공 이념은 반공광증(反共狂症)으로까지 나타나 분단 이후 한국 사회 모든 영역에 침투되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색깔론 논쟁이 벌어졌고 그 때마다 각 당과 후보자들은 자신이 친북세력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정치 분야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빨간색을 꺼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미국의 식민지인 까닭에 미국과 같이 매카시광풍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누가 전쟁을 일으켰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냐 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을 때 전쟁의 원인도 김일성 이냐 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경찰이라고 칭하는 힘센 악당이 있었는데 그 악당에게 계속 괴롭힘을 당해서 참기도하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도하고 해도 악당이 힘이 세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경우, 가까운 형제와 상의를 한 뒤에 괴롭힘을 당하는 걸 끝내기 위해 악당과 한판 붙었으나 악당이 더러운 반칙 을 해서 코피를 많이 흘렸을 때 싸움은 내가 일으켰지만 싸움이 일어난 원인까지 나한테 있습니까?
내가 아닌 여러분이 저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방법이 있었을까요? 형이 둘이 있는데 겨우 입에 풀칠하는 큰형은 겁쟁이고 낙후지역에서 이제 막 살림을 시작한 가난한 둘째 형은 몸집만 크고 주먹은 시원치 않습니다.
미국은 전쟁에서 뿐만 아니고 전쟁 전부터 수많은 한국 국민을 죽인 범죄를 저지른 명백한 범죄자입니다.
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김일성은 전쟁에서 뿐만 아니고 전쟁 전부터 수많은 북한 동포를 죽인 범죄를 저지른 명백한 범죄자입니다. 라고 하면 김일성 나쁜 놈이야 난 원래부터 알고 있어 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이 바른 사고를 할 수 없이 세뇌되고 황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기망하고 정신건강을 황폐시킨데 대하여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은데 한국정부라고는 하지만 양민을 수만 명을 죽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자인 미군의 휘하에 있는데, 미국을 무서워 않고 비위에 거슬리게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전쟁 때 남한 군인과 싸웠어도 북한 사람은 포악한 살인자 미국에 거역할 힘이 없어 시킨 대로 한 남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한국의 근 현대사를 더 이상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우리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고 북한을 비난하기 전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자기 자신부터 둘러 봐야합니다.
왜 우리가 갈라져 있는지 사실을 모르고 짖어대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좌익이건 우익이건 항일 애국투사들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향락을 추구하지 않고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 않고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운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항일 애국자인 북한의 김일성을 소련군 소위인 가짜 김일성이라고 모략과 거짓으로 근 현대사를 수십 년 동안 가르치다가 사실이 밝혀지니 이제는 아예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친일지배세력들은 라디오 TV 등의 전파를 통해 가짜라고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모함을 하고서 아직껏 사과조차 않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이번에는 <요덕스토리> 라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소재로 북한 인권을 고발하는 내용의 사기극을 만들게 하고 노비정부에서 10억 원을 지원하였습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보았던 똘이장군 만화에는 공산당이 늑대와 여우로 그려졌고 김일성은 돼지가 변한 악마로 표현되었다.
기생충들이 북한인권 어쩌구 하는 것은 순전히 모략입니다.
저들은 남의 인권을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는 자유인이 아닌 노예들입니다.
인권을 말하려면 최소한 미국 품속에서 나와 자기 힘으로 독립한 후에 자유인이 된 연후라야 인권이든 뭐든 따질 자격이 있는 것이다.
지금 상태에서 인권 운운하는 것은 미국품속에서 계속 그대로 눌러 살려고 미국에 충성하기 위해 하는 동족을 보고 개처럼 짖어대는 소리로밖에 안 들립니다.
공군 장교로 만기 전역했던 김대중 장남 김홍일은 두들겨 맞아 파킨슨병을 앓는 장애인이 되어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이 끌려간 한겨레신문 창간자 송건호도 파킨슨씨병으로 고통 속에서 살다 갔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의 조사 결과, 불법 연행과 고문, 가혹행위를 통해 간첩으로 조작된 사실이 드러나 재심을 청구한 사건이 한두 건 입니까?
경찰에 불법 연행된 뒤 온갖 고문과 협박을 견디다 못해 간첩으로 허위 자백한 사건이 지금도 재심 청구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끌려간 사람들은 형을 선고 받고 만기 복역 후 출소했으나, 고문후유증으로 병원을 전전하다 결국 사망했습니다.
예를들어 김우철·이철 형제간첩 사건 이후 김씨 형제의 자녀 6명과 친·인척 5명 등 남은 가족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등 35년 동안 인권침해의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친일매국세력들은 스스로를 매국노가 아닌 우익이라며 우익정당을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국회의원인 모 의원은 “보는 내내 끊임없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면서 “<요덕스토리>에 눈과 귀를 닫은 노무현 정권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외세기생 세력들은 창작 연극을 역사라고 우기면서 정작 배워야할 학생에게 역사를 안 가르칩니다.
올바른 역사 즉, 정상적인 근 현대사는 가르쳐야지 연극을 역사 대신 가르치는 나라가 있습니까?
식민지 괴뢰국에서는 있어도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집권 매국노들 자신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던 현대사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은 변함없다 고 합니다. 통일이 어찌 야욕이 됩니까? 통일은 민족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적화통일이란 사회주의로의 통일을 속되게 표현한 것인데 내가 살아보니 우리 집 구조가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면 부모형제에게 그런 집에서 살도록 하는 게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그러나 북한은 적화통일이나 사회주의로의 통일을 한 번도 주장한 일이 없다.
오히려 친일지배세력의 호전적인 승공통일(북한 공산당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통일을 이룬다는 뜻)이란 구호를 많이 듣고 자랐다.
잘사는 미국도 오늘날까지 전 국민 건강보험이 실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남한에서 현재, 건강보험의 혜택이 전 국민에게 실시된 것은 이웃에 북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정부수립 이후부터 전 국민 무상치료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는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서 죽거나 앓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보험이 실시되기 전에는 돈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에 대한 기사가 신문들을 장식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회의석상에서 북한대표가 입원보증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죽은 환자에 대한 기사를 거론하며 “이런 점을 보더라도 전인민의 무상치료가 보장되는 북한이 남한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남한에서는 1989년 7월 1일에야 전 국민 건강보험(당시에는 의료보험이라 하였음)이 실시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운 미국보다 더 나은 제도를 갖게 된 것은 이웃에 사회주의 국가 북한이 있기 때문이므로 북한 급변사태 대비 계획이라는 모략책동을 만들어 발표함으로써 북한을 분열시키는 못된 짓을 해서는 안 되며 북한에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항일애국투사이신 김일성 주석께 마음 속으로나마 감사해야 합니다.
근 현대사를 왜곡시킨 친일친미 견공들이 교육한 대로 믿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고 기생충들은 지금이라도 혼자 힘으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미국의 뱃속에서 나와 독립하는 날 부모형제가 눈에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대사는 분단을 반대하는 민중학살로 식민지가 되어 괴뢰정부가 세워지고 준비한 대로 침략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미 파악해둔 이승만을 반대하는 사람을 모조리 학살하고 그리고 중국까지 삼키기 위해 북한을 완전 파괴하여 피바다로 만든 유엔군의 만행을 어떻게 가르칠 수가 있겠습니까?
학교에서 근 현대사를 왜곡되게 배운 사람이 나중에 국가 지도자가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나라를 완전히 미국의 식민지 속국으로 만들 것입니다.
미국의 수족 역할을 하는 것을 천사나라의 수족이라고 영광스럽게 여기고
취임하자마자 6.15남북공동선언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10.4선언들을 백지화하여 남북관계를 퇴보시키고 주인님 말 안 듣는 북한을 향해 짖어댐으로써 충성 맹세하고 국방비 늘려 미국 무기 더 많이 팔아주고
유엔 같은 국제회의에서도 부모형제는 생각지 않고 미국의 거수기 노릇을 기꺼이 하고
세계 어느 나라도 먹지 않는 광우병 의심 소고기를 국민이 모두 반대해도 무시하고 들여와 온 국민이 먹도록 할 것이고
미국의 침략전쟁도 정의의 전쟁으로 여기고 수천 명의 국군을 파병하여 생명을 받치게 할 것입니다.
미국에게만 잘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독선적인 정치를 할 것입니다.
침략자 미군의 지배 하에서는 이렇게 더러운 인간이 자랄 것입니다. 마치 그늘아래 음침한 곳에서 독버섯이 자라듯.
2005년 미국 민주당 소속 찰스 슈머 상원의원과 공화당 소속 린제이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중국산 수입품에 27.5%의 보복관세를 물리겠다는 법안을 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는 비난 대신 두 의원을 본국에 초청했다. 슈머와 그레이엄 의원은 중국을 다녀온 뒤 결국 법안을 철회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경제력이 커진 중국이 수백만 달러의 로비자금을 뿌리면서 자국에 적대적인 미 의원들을 친중파로 돌려세우고 있다고 9일(2010.1.9) 전했다.
'차이나 머니'가 미국 의회까지 움직인다는 것이다.
중국이 이와 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즉,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을 융합한 제도를 취한 때문입니다.
친미친일 세력들은 공산주의하면 정신이상자처럼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하지만 공산주의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것입니다.
해방 후 분단과 통일의 싸움을 찬탁과 반탁의 싸움으로 몰아갔고
한국전쟁도 외세와 반외세의 싸움이 아니고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전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종파사이에서 공작을 통해 이라크 전쟁을 시아파와 수니파의 싸움으로 몰고 갑니다.
2천만 인구를 13억 인구가 단돈 몇 푼씩만 도와 줘도 북한은 1년 내내 농사를 거의 안 지어도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그렇게도 안 되나? 중국이 부유해지는 상황에서 북한이 망할 거라는 것은 잠꼬대나 망상입니다.
거대한 국가 정보력을 가진 클린턴 대통령도 북한이 곧 망할 줄 알고 제네바협정을 맺고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기로 합의를 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클린턴은 한국도 북한이 망하면 이용가치가 없어지게 되므로 한국 경제를 접수하였습니다.
외환위기 때 김영삼 대통령은 IMF로부터 외화를 빌리지 않고 외화가 부족했을 때 늘 해왔던 대로 일본으로부터 외화를 차입하려고 했다.
외화 부족으로 우리보다 먼저 IMF 구제 금융을 받은 남미의 국가들을 보면 국민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 거리에 넘쳐났고 국가의 자산 가격이 폭락 되고 경제가 몰락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TV를 통해서 IMF의 구제 금융프로그램이 남미·아프리카·일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를 수렁에 빠뜨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김 대통령과 보좌관들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IMF 구제 금융을 받지 않고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클린턴은 고집 센 김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을 것을 종용하였습니다.
거기다가 돈을 빌려주기로 했던 일본도 일본의 담당자가 미국에서 파견한 관리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안 빌려주겠다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한국은 미국의 등에 업혀서 OECD에 가입(1996.12.12)한 것을 큰 자랑이나 된 듯이 흥청거리다가 일 년 뒤 1997.12.3. IMF로부터의 가혹한 경제신탁통치를 받기로 국제통화기금과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경제 신탁통치로 인하여 외국인이 한국의 은행들과 대기업을 접수하여 소유주가 모두 외국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외화를 빌려주면서 금리를 사상 유래 없는 고금리 정책을 쓰도록 요구 하였습니다. 그 결과 웬만한 회사들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감당 할 수 없어 빚더미를 안고 쓰러졌습니다. 회사가 문을 닫으니 실업자가 넘쳐났습니다, 그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은 극에 달하여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리고 한국은 사람이 살지 못할 생지옥으로 변하였습니다. 생지옥 같은 나라에서 더는 못살겠다고 국민은 하루 35씩이나 스스로 생지옥을 떠납니다.
현재는 IMF로부터 빌린 외화를 다 갚았다고는 하지만 경제주권이 상실한 상태이고 실업자는 줄지 않았습니다.
구제 금융을 받기 전에도 외화를 갚을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낮은 금리인 미국으로부터 단기자금을 빌려 동남아 국가에 장기로 빌려 주었기 때문에 융자금을 회수하면 갚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단기자금의 만기연장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IMF 로부터 엄청난 금리로 돈을 빌려 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였고, 특히 2002년 이후 매년 30조원 이상씩 크게 늘어났다. 2009년 국가채무는 366조원으로 전년 대비 사상 최대폭인 57조7천억 원 늘었다.
당연히 국가채무 이자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00년 7조5천억 원이던 것이 올해 15조7천억 원으로 배로 늘어났다. 내년에도 3조 원 이상 늘어나 이자부담은 19조원을 훌쩍 넘길 것이다.
국가채무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오는 2013년에는 정부의 계산에 의하더라도 500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자에 이자를 부르고 있는 상황으로서 IMF 환란을 극복 위한 나라 빚이 이자폭탄의 '부메랑'이 되고 있다.
2010.2.9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정부, 공기업, 공적금융기관 부채가 7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1인당 1500만원의 나라 빚을 지고 있는 상황으로 국내총생산의 70%에 육박한다.
북한을 흡수통일 한다고 하는데 빚이나 갚고 지껄이기 바랍니다.
흡수통일은 고사하고 그냥 통일해 달라고 사정해도 북한 사람은 500조의 빚에서 250조를 떠맡고 한국을 갈라놓고 일제식민지 정부 인사들을 그대로 복직시킨 미국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들에게 영양가 있는 자원을 빼앗길까봐 싫어할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거덜 난 나라를 명맥이라도 유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국민들에게 정신에 아편을 주사합니다.
남한주민들의 불만을 희석하고 북한사회의 동경이 생기지 않도록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편을 주입합니다.
즉, 경제난에 시달리는 남한 주민들이 북한 사회에 대해 가질지도 모르는 동경과 '환상'을 차단하고, "북한사회는 사람이 못살 곳"이라는 인식을 남한 주민들에게 심어 줍니다.
그런 선전내용이 '진짜'라는 효과를 내기위해 정부는 돈으로 (정착지원금으로) 중국 거주 조선족이나 탈북주민들을 유인하고 그 돈을 노리는 브로커(중개인)들은 그들을 한국으로 인도해서 허위선전의 증인노릇을 하도록 합니다.
이런 탈북 브로커에게 연간 수십억 원이 흘러 들어갑니다.
((작년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브로커에게 총 65억 원 가량을 지불한 것으로 나타났다. http://www.hani.co.kr/section-003100000/2005/04/003100000200504201543915.html ))
북한사람들은 영양실조로 몇 사람 안남기고 다 죽어 나라가 곧 붕괴된다고 선동선전을 합니다. 김일성도 한번 죽은 게 아니고 남조선 보도에 따르면 수백 수천 번도 더 죽었습니다. 그만큼 남조선 언론은 근거 없는 걸 보도하는 언론입니다. 김정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이 체제 선전한다고 하지만 허위보도 안 하고 인민이 골고루 평등하게 사는 북한 체제가 좋은 체제라고 선전할만 합니다.
대대적인 주민 탄압 어쩌구 하면서 북한사람은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 화폐개혁 이후 혼란이 생기고 내분이 발생해서 붕괴가 임박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선전공작은 항일유격대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왜놈들은 항일 유격대원들의 의지를 꺾어보려고 김책이 체포되었다, 박길송이 투항했다, 어느 지대가 귀순했다, 허형식이 어떻게 됐다 하고 사실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유포한 적이 있습니다.
항일 유격대 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동요하고 실망하게 만들려고 왜놈들이 조작한 것입니다.
그런 허위선전에 신물이 난 2지대의 지대장은 좋다, 너희들을 혼내주마 하고 적들을 골탕 먹일 계책을 꾸미었습니다.
그는 부대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특무를 한 놈 유인하여 그에게 빨치산이 투항하려고 하니 당신이 산에서 내려가 헌병대와 교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헌병대는 특무를 통하여 접선장소와 접선시간을 알려주고 지대장에게 후한 표창을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귀순자대열을 인수하기 위하여 약속된 접선시간에 특무를 앞세우고 지정된 장소에 나타났습니다.
적들은 수림 속에 정렬한 2지대의 대오를 보자 벌쭉벌쭉 웃으면서 그들에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습니다.
이때 2지대의 대원들은 일제히 총을 내들면서 『꼼짝말라!』고 고함쳤습니다. 지대장은 적들에게 이 어리석은 놈들아, 우리는 투항하러 온 것이 아니라 네놈들을 잡아가러 왔다, 손을 들라고 호통 쳤습니다.
그러자 적의 우두머리는 공산군은 거짓을 모르는 군대라던데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법이 어디 있는가, 군대란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항의하였습니다.
지대장이 그 말을 듣고 이 뻔뻔스러운 놈들아, 네놈들이 눈만 째지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신의는 무슨 신의란 말이냐, 네놈들이 하도 대포를 불기 때문에 우리도 대포를 불어본거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2지대는 적들을 몽땅 생포해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대장이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들이 대단했습니다. 성공한 작전이라고 추겨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김책은 2지대의 지휘관들을 불러놓고 적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유격대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사고방식인가, 아무리 가짜귀순놀음이라 해도 어떻게 유격대와 투항이라는 말을 결부시킬 수 있는가, 혁명군대의 지휘관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무섭게 몰아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지대장을 철직시키고 나머지 지휘관들도 다 강직시켰습니다.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와는 달리 왜놈의 정신을 이어받은 충견 기생충들은 지금도 일본을 따라서 북한에 대해 거짓과 모략으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지하자원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빚밖에 없는데 대통령이란 사람은 북한보고 남한 경제력 인정하고 순순히 핵 포기하고 말 잘 들으면 북한 경제를 살려 주겠답니다.
해방 후에 미국이 남한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아서 남한에는 정부도 군대도 없었듯이 지금 남한 경제는 외국에 수용되어 없어져 버렸습니다. 남한에는 남한경제 대신에 외국 경제가 있습니다.
남한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미 망한 나라입니다. 나라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한국은 북한 문제 때문에 아직 부모 품을 떠나기는 이르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종속국으로 이대로 살면서 북한도 남한처럼 붕괴될 때까지 반공법도, 작전권도 그대로 둬야한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제 때에 나오는, 망하지 않고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려면 100 대 1 정도의 경쟁을 뚫어야 되므로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직업을 얻기 힘든데 어떻게 살겠습니까?
정부에서는 아이를 낳으라고 광고하지만 길러서 공부시키는데도 엄청나게 돈이 들어가지만 그렇게 공부해도 온전한 직업을 갖고 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요즘 세대는 미래가 없는 세대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공군의 난데없는 개입으로 우리의 소원인 통일은 바로 눈앞에 두고 좌절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중공군의 도움이 없었다면 삼천리 온 강토가 지금쯤 미 광우병 소고기 폐기처분장이 되고 온 겨레가 미국의 실험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군으로부터 사들인 전쟁예비물자(WRSA) 탄약 절반 이상이 발사가 안 되거나 성능 미달 불량품이란 어처구니없는 보도가 나왔다. 2008년 한ㆍ미 간 ‘WRSA 양도 합의 각서’에 따라 2700억원 상당의 탄약 26만t을 구매, 성능을 시험한 결과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50%를 넘는다는 것이다.
싼 값에 성능 좋은 탄약을 인수했다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쓸 만한 신형 탄약은 주한미군이 사용하거나 본토로 가져가고 나머지를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우리가 인수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우리가 쓰레기 하치장 인가. 협상 당시 불량 탄약 인수 가능성이 제기되자 군 당국은 “성능이 검증된 물량을 선별 인수 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이 꼴이다.
더욱이 못 쓰는 탄약은 폐기도 쉽지 않아 쓰레기보다 못하다.
이번에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적당이 덮고 넘어가기가 십상이다.
한국은 한미군사동맹이니 혈맹이니 하지만 한미관계는 본국과 식민지 폐기장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광우병 의심물질 폐기장, 탄약 폐기장. 미국이 못먹고 못쓰는 오염물질 버리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1990년대에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쓰러지니 그들과 교역을 하였던 북한이 어려움을 당했던 것입니다. 북한의 우리 형제는 그 때의 고난의 행군을 헤쳐 왔습니다. 이제 그와 같은 고난은 오지 않을 것이지만 온다 해도 또다시 일심단결 하여 극복해서 마침내 한반도 유일의 국가를 보존하고 수호할 것입니다.
전체 인민이 합심하여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공위성을 자력으로 발사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영광스러운 나라입니다.
이로써 어떤 외적도 자력으로 물리칠 수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자주 독립국 이 되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역사를 자랑과 긍지로 여기며 끝까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 90년대의 기아와 고난을 견뎌낸 우리 부모형제들 입니다.
독재자는 한쪽 눈만 뜨고 자기 국민들이 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국민을 골고루 살피고 못사는 사람도 있음을 느끼고 인민들이 잘 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북한이 식량도 없어 무너져 난민이 되어 중국으로 탈출이 이어질 거라는 북한붕괴 음모론에 국민들이 호응을 하고 공감하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북한 정권은 전쟁을 일으켜 대 재앙을 초래한 민족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불량국가이다 라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북한정권은 당연히 붕괴되어야 하고 곧 붕괴될 것이다 고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남한 언론은 북한이 민족통일을 위해 뭘 제안하면 붕괴 직전의 체제유지를 위한 몸부림으로 여기고 있을 만큼 민족정신이 멸실 됐습니다.
북한은 민족의 이익을 위에 두고 정책을 펴는 나라입니다.
남한에서 쌀과 비료를 주는 것을 받아들인 것도 북한경제 뿐 아니고 민족화합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북한정권은 자신에게 쌀보다 더한 걸 준다 해도 민족화합에 역행한다면 받지 않을 민족을 위한 정권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하자원의 대부분은 북부에 편재해 있는 반면 곡창지대는 남부에 집중되어 있어 예부터 북한 지역에서는 쌀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지하자원을 남한에게 팔려고 해도 남한의 기생정권은 붕괴되는 북한을 도와줘서는 안 된다면서 광물 채굴권을 획득하는데 신경을 안 씁니다.
북한 주민은 지금 초강대국 미국과 그리고 남조선의 외세 기생정권과 일당백으로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식량은 전쟁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폐가 되지 않습니다.
잉여분을 받기 때문에 농민에게는 쌀을 생산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권을 이어받은 뒤에 미국의 노비 노릇하는 데만 정신이 팔리고 붕괴되는 데 왜 보내냐면서 쌀을 북한에 안 보내 야적해 놓은 쌀 때문에 농민만 골치를 썩고 있지 않습니까? 지배세력들은 쌀 과자 쌀 막걸리를 만든다고 태평스런 소리를 하지만 한계가 있고 이미 해봐서 실패한 정책 아닙니까?
어느 분이 절대 독재는 절대 부패한다. 절대 부패한 사회에서 인권이 보장될 수 있겠는가?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독재를 하고 있는 한 북한 주민들은 노예이며 북한이란 감옥에 갇힌 죄수들일 따름이다. 라고 말씀을 합니다.
부패를 국어사전에서의 의미를 찾아보면 정신, 정치, 사상, 의식 등이 타락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독재정권은 개인의 축재로 인하여 국민을 피폐하게 하지만 개인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독재로 인한 개의의 축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느 독재자가 하루 4시간의 수면만 취하고 오직 인민과 나라만 걱정합니까?
다수의 국민들은 배고프고 냉장고가 텅 비고 쌀도 사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먹지 못하고 못 살고 있고 극소수 부유층만 잘살고 있는데도 국민들이 잘 산다고 정부와 언론에서 선전할 때마다 그들 다수 빈곤층은 더욱 소외감에 빠지고 일부는 자살을 택하게 됩니다.
독재자가 흔히 하듯 정치를 잘해서 국민이 잘산다는 선전을 하지 않고 인민이 못 살고 있다고 가슴 아파 합니까?
어느 독재자가 국가 원수 직을 사양합니까?
북한 주민들은 노예라는 소리도 잠꼬대 같은 소리입니다.
북한주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권은커녕 생존권도 없어 자살할 수밖에 없는 남한주민에 비하면 기본권을 맘껏 누리고 인간답게 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실업자가 없으니 실업자 된다고 해도 아무도 겁을 안냅니다. 돈은 누구나 벌므로 매춘을 해서까지 벌 필요는 없습니다.
잘나가는 연예인도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만들 수 있는 게 자본주의의 권력입니다.
박정희장기독재는 부패하여 기쁨조가 생기기 않았습니까?
어린 여자들을 돈으로 매수하고 안 들으면 실업자가 된다는 협박이 통해서 그런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일당은 권력의 맛을 오랫동안 보아온 자들이므로 대통령 선거로 정권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북한에 보낸다는 명분을 앞세워 만든 실미도 북파공작원이었습니다.
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에게 질 경우에 암살하려는 계획으로 훈련시켜온 총인원 31명의 부대입니다.
선거일을 불과 닷새 앞둔 71년 4월22일. 미 국무부의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 장관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마샬 그린(Marshall Green) 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도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4월22일자로 비밀 분류된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 기록되어 있는데 ‘김대중 후보의 약진세가 계속될 경우 비교적 공정하고 평화로운 선거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과 그의 측근 추종자들이 패배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과잉 행동을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과 행정부 내의 하급자들이 행정부의 권력과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고 되어있다.
과잉행동은 실미도 북파공작원에의해 김대중이 살해되는 것이었다.
이후 박정희의 당선으로 실미도 부대는 필요 없게 되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항의 하는 국민에 의해 물러났다.
그래서 박정희는 이승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3선을 끝으로 김대중의 주장처럼 총통제를 구상하였다.(유신헌법을 채택하여 대통령을 국민을 대신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거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그들은 평소대로 가혹한 훈련을 계속하였다.
훈련만 계속될 뿐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끊겼다.
훈련이 매우 고되었는데 보상마저 받지 못하자 더는 견딜 수 없게 된 이들은 71년 8월 23일 수류탄과 카빈총으로 무장한 채 박대통령을 만난다며 서울행 버스를 탈취하고 난동을 부렸다.
그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박대통령에게 가려고 했을까요?
실미도 부대원 31명중 24명이 71년 8월 23일 수류탄과 카빈총으로 무장한 채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하다가 군경과 교전 끝에 14명은 자폭하고 4명은 사살됐다. 나머지 6명은 검거됐으나 군사 재판을 거쳐 곧바로 총살됐다.
31명에 불과한 실미도 부대는 북파목적으로 목적을 위장하여 박정희 일당이 만든 부대입니다.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정적을 없애기 위해 만든 무장 사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의 난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70년대 초 남북한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실미도 부대’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 앞날에 불안을 느껴 이로 인해 난동을 부렸다고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당시 반공밖에 모르던 나라에서 청천벽력 같은 7.4남북공동성명은 실미도 사건 후인 1972년7월4일에 발표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한 화해무드는 실미도난동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7.4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할 수 있게 한 국제적 데탕트 무드를 조성한 미중간(美中間) 국교정상화 조차도 1972년 2월의 일로서 실미도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그 뒤의 사건입니다.
옛 중앙정보부(중정)가 실미도 사건을 일으킨 공군 684부대의 창설 때부터 실미도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매달 400~500만원의 부대 운영예산을 편성해 지원하는 등 적극 관여해온 사실이 정부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그래서 부대원들은 사관생도에 준하는 봉급(3000~3200원)도 꼬박꼬박 나왔었다.
진상규명위는 또 1968년 3월7일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이 장아무개 공군참모총장 등 앞으로 보낸 부대창설과 관련한 ‘공작지시서’와 그해 5월10일 부대 창설 일에 중정 요원이 참가해 작성한 보고서 등을 통해 부대 창설에 중정이 깊숙이 간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공작원을 북한에 보내려면 군사분계선을 돌파해야하는 과정을 거쳐야하며 이 경우는 주한미군의 승낙이 요구되는 것이므로 북파 공작원은 과거처럼 미군이나 미군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이 담당하는 업무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국내의 정보수집기관으로서 북한에 공작원을 파견하는 임무는 없었습니다.
간첩 조작하는 중앙정보부가 실미도 부대를 간첩이나 무장공비로 조작해서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지역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박정희 일당은 해방 후 미군정이 애국적 인사를 찬탁으로 몰아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지지를 얻어 목적을 달성했던 허위선전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경상도 일원에 대대적으로 호남이 김대중을 중심으로 단합해서 몰표를 찍는다고 허위선전 하였다. 이런 삐라가 곳곳에 붙어있는 것을 본 경상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이 자기 고장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을 찍으면 안 되지 하면서 영남인이 똘똘 뭉쳐 모두 박정희에게 투표하여 박정희는 삼선을 하여 대통령이 또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지역주의를 처음 일으키고 이용해 먹은 사람이 바로 박정희 일당입니다.
밤 12시가 넘으면 통행금지령이 내리던 그 시절 박정희 일당은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질것으로 예상되자 경상도 지역의 모든 교사, 공무원, 경찰, 군인 등을 동원하여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밤에 경상도 전역에 벽보를 붙였습니다.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고용해 <미국은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빨갱이들은 신탁통치에 찬성한다.>는 거짓 내용의 벽보를 붙이듯이 갑자기 도처에 일제히 벽보를 붙였습니다.
벽보의 내용을 대략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 전국에서 경상도 지역에만 이 벽보가 붙었습니다. 타 지역 사람들은 이런 벽보가 경상도에 붙은 걸 몰랐습니다.)
전라도 세상이 밝아온다 !
전라도민들이여 김대중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라!
“김대중 후보 만세”라는 벽보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 벽보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전라도 대통령 나오면 경상도 다 죽는다!
정권 빼앗기는 걸 보고만 있으면 되겠나?
경상도민이여 일치단결하자! 라는 벽보가 함께 붙여졌습니다.
출신지역을 나란히 대비시켜 지역으로 갈리게 하여 결국 인구수가 많은 경상도지역에서의 압도적인 박정희 지지로 박정희는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호남인이 일치단결한다는 벽보의 선전과는 달리 호남지역에서 김대중후보의 득표율은 영남지역 이외의 지역에서의 평균 득표율과 같았다.
엄청난 국고를 선거자금으로 뿌리고 그리고 상대를 모략하는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1948년 이후 한국의 선거는 부정부패선거였습니다.
한국의 선거는 미군정하에서 처음 실시된 때부터 미군에 의한 살인, 폭력 선거였습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공재산으로 만들어 국가를 건설하였습니다.
자본가 계급은 한번 재력의 위력을 체험했던 자들이므로 평등하게 사는 사회 보다 옛날 자신들이 금력으로 국민들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권이 바뀌어 다시 정권을 잡기를 기다리고 일단 정권을 잡으면 사회주의자들을 모조리 죽여 사회주의 사상을 멸살 하려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인간 수명을 다 할 때까지 독재 권력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권력은 사회주의의 기초 이론이고 북한은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사유재산이 없으니 권력자도 사유재산이 형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권교체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전 인민에게 적성에 따른 고용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평등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사회주의를 공고히 해 남북 연방제로써 조국통일을 이루려는 목표를 정권교체가 오히려 흩뜨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시각으로 북한의 세습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기 주인이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라면 우선 첫째로 노예에서 해방된 후에 정권교체든 집안싸움이든 뭘 해야 합니다.
3대 세습이아니라 4대 5대 세습을 해서라도 매국노와 침략군을 물리치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노예 처지에서 해방하여 자기 땅에서 주인이 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인민의 적은 일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을 가진 세계유일초강대국입니다. 다른 생각 말고 완전한 조국해방 하나만 생각해도 너무나 쟁취하기 어려운 과업입니다. 내분이나 권력투쟁으로 적들에게 틈을 주어서 오판하게 하면 또다시 우리인민의 피가 바다를 이루는 참혹한 사태가 올 것입니다.
미국과 충견들은 ‘작계5029’니 ‘코드명 부흥’이니 하는 따위의 계획을 세워놓고 호시탐탐 북한이 붕괴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이 정치범을 단 한명도 수용하고 있지 않은데도 이렇게 붕괴가 임박한 듯 모략선전을 하고 있으니 만일 한명의 정치범이라도 수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은 석방하라고 끈질기게 국제사회를 동원해 온갖 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석방하면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면서 국외로 내보내도록 압력을 가하고 국외로 추방하면 그 사람을 북한의 지도자로 삼고 임시괴뢰정부를 구성하여 나라를 찾게 해달라는 북한지도자(미국이 만든 임시정부의 수괴)의 호소를 존중하고 북한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정당성을 내세우며 북한을 침략하여 자신의 괴뢰정부를 세울 것입니다.
따라서 적에게 허술하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적이 헤집고 올 빈틈을 없애야 합니다. 북한은 전체 인민이 단결하여 외세들이 허튼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선거가 있어야 남한처럼 위에서 말씀드린 지역감정도 있고 동서분열도 생기는 것인데 세습으로 인하여 북한에 친미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가망이 없자 외세기생 세력들은 세습 한다고 비난합니다. 외세들의 선동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북한을 반정부 집단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규정했습니까? 침략자 미국입니까? 친일매국노입니까? 범죄단체 유엔 입니까? 아니면 이승만 괴뢰입니까? 아니면 현재의 노비정부입니까?
친일 집권세력들은 김대중 납치사건/ 땅굴조작사건/ 이승복 살해사건/ 아웅산 폭파사건/ KAL기 폭파사건/ 인혁당조작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성을 투쟁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권인숙 성고문 은폐조작사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등등 수많은 사건을 조작해 왔다.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할 판사들도 사법살인이라고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였다.
1968년 무장간첩이 강원도에 침입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간첩들에게 살해된 사람을 찾아서 보고하도록 하였으나 아무도 없었다. 박정희는 화가나 빨갱이가 침입했는데 아무도 안 죽었다니 말이 안 된다면서 찾아내지 못하면 죄를 물어서 극형을 내릴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국군은 자신이 박정희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살해된 사람을 찾아야했으나 없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이승복 어린이와 가족을 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이 사건은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하니 무장간첩이 입을 찢어 잔인하게 죽였다”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고, 학교마다 이승복의 동상이 세워지고 반공교육의 실례가 되었다.
국군이 마을로 들어오기 전에 무장간첩들은 이미 산으로 도주하였다. 국군이 마을로 들어 왔을 때 마을 사람 모두가 이승복 군이 국군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죽었다고 하니 이상하다고 하였다.
잡히지 않게 도망간 무장간첩이 국군이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을로 다시 내려올 리도 없고 또 국군이나 마을 사람 몰래 마을에 있는 이승복 어린이를 죽이고 아무 일도 없이 다시 도주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소리라고 마을 사람들이 TV 에서 증언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아웅산 폭파사건은 당시 국내 신문을 보면 전두환이 저지른 범행임이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국빈자격으로 갔는데 신호등에 막혀 제시간에 도착 못했답니다. 그리고 애국가 연주에 맞춰 폭발이 발생했는데 국빈을 모신 악단이 밤새워 라도 연주 연습을 해오는 게 당연한데 귀빈들 앞에서 애국가 연습을 하기위해 연주했답니다. 그러다가 더 조사해보니 안기부 직원이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연주를 한번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폭발 신호가 된 애국가가 연주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KAL기 폭파사건은 폭발하기 직전의 공항에 내린 7인의 안기부요원이 저지른 것이며 당시 미국의 도움이 없이는 벌릴 수 없는 일이었다.
땅굴사건은 땅굴이 경계선 남쪽에 있는 부분은 길고 경계선 북쪽으로 파들어 간 길이는 짧습니다. 즉, 북쪽에 있는 입구는 남쪽에서 다 보입니다. 입구가 다 보이는데도 북에서 뭐 하러 팝니까? 땅굴은 지금도 반공교육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에서의 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의 3분의 2는 땅굴을 남한에서 팠다고 생각한다고 대답 했습니다.
김대중 납치사건 때는 북한 공작원이 납치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호텔방에 북한 제 담배와 김일성이 하사했다는 글귀가 새겨진 라이터를 놔두고 김대중을 끌고 갔습니다.
친일지배세력들은 북한과 중국도 이간시키려고 만주는 한국 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역사를 중국이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중국은 소수민족 보호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조선족이 한국보다 더 많이 중국 국민이 됐는데 고구려의 역사도 당연히 중국 소수 민족의 역사 즉, 중국역사입니다. 고구려 역사는 북한과 중국이 공유하는 역사입니다,
고구려가 있었을 때 누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에 받쳤습니까?
그러고도 고구려 역사를 주로 신라 사람들이 나서서 자기네 역사라고 빠득빠득 우깁니다.
고구려역사는 분명 우리민족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중국도 소수민족 보호정책에서는 그 소수민족의 풍속등과 함께 역사를 보호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공산주의가 경제체제가 아닌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외세기생 세력들이 지배하는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참이 아닌 거짓을 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옛'공산주의'정부들이 민주적이지 않은 것과 상관없이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 실례로 옛 동독의 정식국명은 독일민주공화국(DDR)이었으며, 북한의 정식국명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경제체제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도 정치제도에서는 민주주의 형태를 취합니다.
그래서 (경제체제를 앞에 적고 정치체제를 뒤에 적어서)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자신의 국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서 자유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경제체제 즉, 경제활동의 자유를 뛰어넘어 사상 언론 정치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뜻으로 자유가 붙여진 것이랍니다.
이렇게 용어조차도 거짓으로 또는 말장난으로 학교에서 가르칩니다.
경제활동의 자유는 기업가들이 돈 벌어 무한정 사유재산을 늘려 개인이 부를 독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대다수 국민은 자유민주주의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에서 기본적인 자유를 누립니다. 돈 없어도 자유로이 공부할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는 자유가 자유민주주의에서 가능합니까?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돈 없으면 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일부러라도 죄짓고 감옥에 가든지. 거지로 살다가 겨울 되면 노숙하다 얼어 죽든지 해야 합니다.
충성, 의무만 강요하는 그런 국가는 있어도 서민들에겐 필요 없습니다.
돈 없다고 국가가 배급을 주기를 해 직업을 주기를 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공부를 시켜 주기를 해?
가끔 언론을 통해서 북한에서 귀순 했다거나 망명 했다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국가에서 공부시켜주고 키워주었더니 배은망덕한 짓을 한 배반자일 뿐, 나라도 아닌 붕괴된 노비 집단에 들어간 것이 의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는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시킴으로써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이며 어원인 '콤무네'(commune)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공동체의 재산이 구성원들 모두에게 속하는 사회제도를 일컬었다. 재산의 사유가 빚어내는 도덕성의 흠결(欠缺)을 간파하고 공유재산제를 바탕으로 보다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공동체를 일구려는 소박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인간이 정치적·사회적 사색을 시작한 때부터 싹튼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주의 사상의 기원은 국가 (The Republic)를 저술한 플라톤에서부터 비롯됐다.
프랑스 혁명을 배태시킨 사회사상 속에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법 앞에서의 평등뿐 아니라 경제·사회적 평등을 부르짖는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적 제반 경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정치상의 모순이나 산업혁명 이후 노정된 여러 사회악의 원인이 사유제산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공산주의는 여기서 인류애적 이상주의로 향했으며, 생 시몽, 푸리에, 로버트 오언 등의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프랑스 혁명의 평등사상에 힘입은 사람들이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을 수 있다는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상상으로서만 가능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행복을 누리는 사회)로서,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인 '욕망'을 무시한 체제이므로 개인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는 낮은 생산성과 경쟁에서 뒤지는 체제로 붕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주의는 붕괴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해주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위협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높은 생산성과 경쟁에서 뒤지지 않고 체제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빨갱이 척결의 선두에선 세기의 사기꾼 미국과 외세에 기생하는 친일친미 충견 기생충들은 국민을 속이고 죽이며 억압하여 국민위에 군림하는 범죄 집단입니다.
공산주의자는 살인자인 친일매국노 또는 기생세력들의 말처럼 쳐 죽여야 할 악마가 아니고 물질적 평등 사회를 원하는, 인간성이 순수해서 순진하기까지 한 착한 사람입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그 나라 인민들만 아니고 국가 간에도 평등합니다.
그래서 북한이 중국이나 소련의 도움을 받더라도 자주권을 누릴 수 있었고 핵이나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자본주의에 속했던 한국은 미국과 평등한 관계가 아니고 수직 관계이므로 독립해서 자주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국은 한국이 원전(原電)에서 연료로 쓴 뒤 나오는 '사용 후 핵연료'를 다시 쓸 수 있도록 '재처리할 권리'를 갖게 할 것인지를 미국과 협의하고 있습니다.
한·미 원자력 협정(1973년에 개정돼 2014년 3월로 시한만료) 개정에 대해 협의 중이다.
앨런 타우셔 국무부 차관은 2009년에 "한국에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한국은 핵재처리 하는 것을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하고 미국은 허용하지 않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과 같은 군사력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신들처럼 힘이 강해져서 자신들이 시킨 대로 복종하지 않고 홀로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즉, 미국이 한국을 자신의 지배하에 계속 묶어두기 위해서이다.
한국은 영원히 미국의 품속을 벗어날 수 없고 기생해서 연명해야 될 운명이다.
한국의 정치인은 한국의 운명을 알고 그리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인권이니 흡수통일이니 하면서 북한 붕괴공작 같은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민족을 잇는 북한이 멸망하면 남북한 온 겨레가 미국의 개가 되고 한반도는 개 사육장이 되는 것이다.
미국은 해오던 대로 분쟁지역에 개를 날라다 침략 야욕을 채우는데 써먹을 것이다.
더러는 실험용 쥐가 되어 미국 광우병의심 부위로 사육될 것이다.
강도 사기꾼 도둑 같은 범죄는 부의 불평등에서 생기는 것으로써 북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한사회를 보면 부의 불평등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죽음으로 내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0.02.09 부산 다대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부싸움 끝에 한 주부가 딸을 업은 채로 투신했습니다.
이를 잡으려던 아들까지 모두 세 명이 숨졌습니다.
경찰은 이들 부부가 최근 돈 문제로 자주 다툰 데다, 어젯밤 술에 취한 남편과 심하게 다투다 홧김에 투신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거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국민과의 공약을 안 지키고 뒤집는데 선거하나마나죠. 오히려 국민에게 불신만 주고 돈만 낭비하니 그러려면 북한처럼 안 하는 게 낫죠.
한국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허울 좋은 말뿐이고 일단 당선되면 국민을 하녀로 대하고 미국을 상전으로 모십니다.
민주주의는 백성이 주인이 되고 백성을 주인으로 섬기는 정치를 말하는 것인데 한국은 권력자가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데 민주주의 입니까?
국민을 하녀로 여기고 기생충처럼 미국에 빌붙어 살려고 광우병의심 소고기도 들여옵니다.
이처럼 외세기생 세력들은 남을 세습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우선 자신들부터 독립해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북한은 민주주의도 아닌 독재국가인데 국호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한 것은 틀린 소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항일혁명투사들을 보고 배우며 자란 고매한 성품의 김정일은 사양하여 주석 직에도 앉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국민 모두 김정일을 지도자로 모시기를 원하는데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이 북한지도자가 되어야 민주주의입니까?
그게 백성의 뜻을 따르는 민주주의 입니까?
한국은 광우병의심 소고기도 그리고 4대강 사업도 국민의 대부분이 반대하는 데도 국민의 뜻을 듣지 않고 강행하니 독재정치라고 해야지 민주정치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세습으로 고난도 극복하여 영광 찬란한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이어갔고 거기다가 세계군사강국 반열에 올라 긍지 높은 인민으로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어 아이도 안 낳고 스스로 목숨 끊는 한국과는 달리 북한은 식량이 풍부한 미래를 향해 전체 인민이 단결하여 힘차게 나가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국가입니다.
북한에서 보듯이 세습이 덮어놓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북한에서 투표할 때 99%가 투표해가지고 99% 찬성을 하는데 과연 그럼 그게 민주주의이냐”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민주주의 맞습니다.
백성이 주인으로서 찬성 또는 반대의사를 투표로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보자가 하나면 민주주의가 아니고 둘, 셋이 되어야만 민주주의 인 것은 아닙니다.
흔히들 북한보고 세습이라고 하는데 민주적 절차에 의한 권력이양을 세습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북한 사람이 다 찬성하는 사람을 뽑아야지 다른 사람을 뽑아야 민주주의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투표할 때 찬성표는 흰 투표함에 반대표는 검은 투표함에 넣는다고 북한 사람에게 물으면 탄로 날 일도 눈 뜨고 거짓말을 합니다.
어느 철없는 사람은 중국이 북한의 지하자원을 다 빼앗아 간다고 말합니다. 제값을 치르고 가지고 가는 것이죠.
중국이 북한을 종속시킨다. 어쩐다. 하면서 북한이 중국에 예속된 국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종속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생충으로 사는 것보다 더한 종속이나 예속이 있습니까?
기생충인 자신의 처지를 감추려고 하는 소리이거나 잠꼬대 하는 소리입니다.
쿠바 카스트로는 월급을 청소부 월급과 같이 받습니다. 가장 낮은 월급을 받고 인민들에게 국가에서 무상치료 대학까지 무상교육의 혜택을 줍니다.
이런 혜택을 받는 쿠바국민들은 누구도 카스트로 물러나라고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 살기만 바랍니다. 카스트로가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아 똑같은 정치를 하기 바랍니다.
쿠바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하는데 그래도 독재고 세습입니까?
세습이니 왕조니 떠벌이는 사람은 북에 친미정권 들어설 수 없으니 배 아파서 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북한에 가서 김정일 싫어하는 사람 있나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세습이 나쁘다는 것은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선출된 뒤에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는 사람이 지도자인데 아이들이 국민들이 뭘 보고 배우겠습니까?
감언이설로 속이는 표도둑을 뽑을 바에는 선거 안하는게 아이들을 정직하게 키울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박정희부터 시작된 사기꾼을 뽑을 거면 차라리 한국도 훌륭한 애국자 집안에서 지도자를 배출하게 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지역차별과 지역감정으로 국민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고 전 국민이 화목하게 사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민을 위해 하루 4시간의 수면시간으로 전국을 돌며 살피는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으려고 특정소수지역을 음해하는 더러운 짓을 하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거에서의 공약을 안 지키고 제 멋대로 하는데 그렇게 달콤한 거짓말로 국민을 속여먹는 선거놀음판은 아예 없어져야 합니다.
강대한 고구려도 내부분열로 멸망하였습니다.
미국이 좌익이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거짓 뉴스로 속여 분열시켰듯이 외세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공작을 합니다.
북한에 가서 감시가 없는 데서 북한 주민에게 북한 사람들은 김정일을 싫어하는데 왜 김정일 위원장이 나라를 다스리냐? 고 물어 보면 모든 북한 주민들은 한 결 같이 당장 신고하여 지난번 유성진처럼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북한처럼 작은나라가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각 정당이 각기 다른 길로 나간다는 것은 적들이 바라는 한가한 행태이며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한 두 나라도 아니고 떼로 덤벼들어 주민을 죽이고 파괴하여 석기시대로 만든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불법 무도한 외세에게 부모형제의 생명이 빼앗긴 과거를 망각하고 경계를 풀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전쟁이었고 지금도 안 끝난 상태입니다.
그리고 북한 핵은 미국의 핵공격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미국이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북한을 핵으로 위협 했을 때 남한 당국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반대 하였습니까?
친일 매국노들은 미국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민족을 이간시키는 짓을 해방직후부터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북한 핵을 제거하면 미국의 핵 위협을 한국이 막아 줍니까?
핵을 가진 나라가 안가진 나라를 핵으로 위협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노비처지에 주인님을 가로막고 나설 수 있습니까? 기생세력들은 북한주민과 북한정권은 별개라고 씨부렁거리면서 핵 선제공격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위협합니다.
우리가 북한에게서 한 가지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강대국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지 않고 자주적으로 나간다는 점입니다.
강대국 미국과 소련이 합의하에 조국이 분단되었습니다.
북한은 미국이 분단을 주도 했지만 소련도 조국 분단의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강대국이 제 마음대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남의 나라에 의지 않고 자기 나라는 자기가 지키는 자주국방을 이루어야 한다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반대하여도 자체적으로 핵을 만들고 미사일이나 인공위성을 쏘았습니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가 되었죠.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당연히 식민지가 되는 것입니다.
식민지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이 된 땅을 말합니다.
한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완전한 식민지입니다.
과거 일본이 조선인을 동원하여 자신의 침략전쟁의 도구로 써먹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분쟁지역으로 날라 반미 성향의 정부와 싸우게 하거나 자신들이 세운 괴뢰 정권을 유지하는데 총알받이로 써먹었습니다.
걸핏하면 국가안보를 외치는데 국가안보를 해치는 자 중에서 첫째가 매국노가 아닙니까? 그런데 친일 매국노가 활개 치는데 국가안보는 무슨 국가안보입니까? 국가안보인지 미국의 식민지 사수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자주통일은 평화통일보다 소중합니다.
베트남이 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평화를 버리고 전쟁을 하였고 마침내 목숨 받쳐 자주권을 쟁취하였습니다.
북한인민은 배고파도 국가를 지켰습니다. 소중한 자주권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주권이 없으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후손들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당당한 독립국에서 산다면 우리의 목숨이 아깝겠습니까?
자주권이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전쟁을 일으키면 주인님을 보호하기 위해 전장에 가야합니다.
주인나라 경제가 어려우면 우리가 땀으로 이룩한 우리의 경제를 받쳐야 합니다.
일본 개도 안 먹는 땅을 오염시킬 쓰레기를 주인께 돈 받치기 위해 들여와서 이 나라를 짊어질 세대에게 먹여야 합니다.
일본 개보다 못한 취급 받으며 생지옥에서 스스로 목숨 끊을 거면 북한보고 세습왕조라 해도 북한에서 잡곡 먹는 게 훨씬 낫을 것이다.
인공위성과 원자, 수소탄 즉, 1성2탄은 자주권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하고 아직도 미국의 핵우산에 의지해서 살아야 됩니까?
한국도 빼앗긴 미사일 주권 핵 주권을 찾아와서 미국 같은 강대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항일독립투사의 염원대로 홀로 서는 나라 즉, 독립 국가를 실현합시다.
친일파들은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놈은 자신이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는데 일제의 앞잡이인 조선 사람은 잘못하다가는 상전인 일본인한테 질책을 당할 수 있으므로 왜놈보다 악질적으로 가혹하게 조선인을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비록 총을 겨누고 싸웠더라도 같은 조선 사람은 죽이지 않고 살려서 돌려보냈습니다. 일제 앞잡이와 비교해보면 (중국을 건국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위태로웠던 소련도 일본군의 북상을 막아 지켜 주었던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한)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인 것입니다.
보리저녁 때에(해가 퍼그나 기울어진 때) 적 척후병이 홍기하 골짜기에 나타났다. 그 뒤에 신선대(조선 사람들로 이루어진 방패막이 군대) 놈들과 토벌대의 주력이 줄레줄레 따라썼다. 김일성 장군은 척후병과 신선대 놈들이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었다.
토벌대의 주력 앞머리가 매복권 안에 깊숙이 들어설 때 군도를 찬 마에다 중대장이 골짜기에 들어섰다.
마에다가 한그루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추자 부하장교들이 모여들었다. 마에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 지시를 줄 때 ‘토벌대의 주력부대가 전부 매복권 안에 들어섰다.
이때 김일성 장군은 사격신호를 내리었다. 아군진지에서 일제히 명중탄을 퍼부었다. 여러 문의 기관총이 불을 토하고 슈류탄이 적진으로 연해연방 날아갔다. 김정숙, 김선 등 녀전사들도 뒤질세라 묘준사격을 들이댔다. 함화(적들의 기를 꺽어놓고 투항을 부추기기 위한 전투중의 선전선동)가 효과를 보아 매복권에서 벗어난 신선대 놈들은 싸울 념을 않고 출행랑을 놓았다.
적진이 수라장을 이룰 때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아군 전사들은 멸적의 함성높이 남북 량측에서 적진을 향해 돌입하였다. 중상을 당하고도 마지막 순간까지 군도를 휘두르던 마에다는 황천객이 되고 필사적으로 발악하던 놈들은 무리로 죽어나자빠졌다. 녀전사들은 “우리는 승리했다!”하고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었다. 이날 전투에서 제 2방면군은 김일성 장군의 지휘 하에 적 70여명을 소멸하고 30여명을 투항시키고 ‘신선대’ 놈들은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싸움터를 수색하니 전리품이 기관총 6대를 망라하여 100여 자루의 보총과 권총, 무전기1대, 탄알 수만 발이었다.
김일성부대를 소멸하겠다고 기고만장하던 마에다 토벌대가 도리어 유인매복전에 걸려 졸지에 풍비박산 났다. 먼발치에 있던 정안군 300여명은 달려들 엄두도 못 내고 눈먼 총질만 할 뿐이었다. 김일성 장군은 로획한 기관총 6대를 전부 걸어놓고 정안군을 향해 위협사격을 퍼붓도록 하였다.
정안군 놈들은 어둠을 타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적들은 여러 날이 지나고 항일연군이 확실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서야 비로소 마에다의 시체를 삼도구로 옮겨갔다. 다른 시체들은 머리만 베어 몇 대의 마차에 싣고 갔다.
홍기하 전투가 있던 날 저녁 제2방면군부대는 산속으로 전이하여 여러 곳에 우등불(모닥불)을 피웠다. 밀가루로 뜨떡국(수제비로 보임)을 하여 포로들을 대접하였는데 포로 거개가 조선인 경찰이었다. 아군은 포로들 속에서 “보라 전장에서 불쌍하게 죽은 것은 조선 경찰이다. 일본 놈이 죽은 것은 불과 몇이 되지 않는다. 이제 더는 개 목숨을 팔지 말라!”, “항일련군을 따를 사람은 나서라”고 하면서 정면교육을 들이댔다. 포로들이 부모처자 생각해서 나서지 못하겠다고 하니 아군은 그들을 잘 대접하여 길까지 알려주어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일성부대는 포로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국군이나 미군은 포로를 어떻게 대합니까?
다 알다시피 옷을 발가벗겨 놓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충견들은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북한을 보고 개처럼 짖어댑니다.
홍기하 전투 위력은 대단했다. 꽁무니를 뺐던 정안군 놈들과 포로들의 입을 통해 그 위력은 백배, 천배로 번져갔다. 김일성 장군 부대는 하늘이 보낸 부대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반공에 악질적인 김일로까지도 항일련군의 덕분에 겨우 개 목숨을 부지하고는 항일련군이라면 진두에 나서기를 꺼리었다.
마에다 부대가 쫄딱 녹았다는 소문은 날개라도 돋친 듯 두만강을 날아넘어 조선 땅에도 쫙 퍼졌다. 김일성부대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싸울수록 본때스레 적들을 족치고 있다는 소식은 국내 사람들에게 최대의 힘과 위안이었다. -이상 연변역사연구소 리광인 부장 진술-
북에서는 1945년 말에서 46년 초 보안국 시절,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들은 전부 숙청당하거나 월남하였습니다.
좌익이나 우익은 어느 나라나 있는 것이지만 매국노는 제거해야 될 대상입니다. 좌익이 매국노를 숙청하므로 매국노가 좌익에 대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애국자 국가유공자의 가면을 쓴 친일 매국노가 가르쳐 주는 대로 좌익은 흉악하다는 선전을 교육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북한과는 대화나 접촉하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 친일파들의 악선전만 듣고 자라 머릿속에 진리처럼 들어앉았습니다. 한국전쟁과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서 흉악한 쪽은 어디였습니까? 우익 인사 중에도 애국지사가 많습니다.
김일성은 우익이라도 민족을 위해 독립 운동한 분들을 애국자로 우대 하였습니다.
친일 매국노들은 우익 인사도 아니고 바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도려내야 될 인간들입니다.
남한은 북한과는 달리 친일매국 세력들이 정권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 북한 김일성은 일본군 및 친일 세력과는 적대 관계였으므로 악질 친일세력들은 지금까지 누리던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대부분 남하하였고 적극적인 친일을 하지 않은 친일파만 남게 되었으며 그런 사람은 같은 민족으로서 처벌보다는 관용을 베풀어 포용하였습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수립 직후인 3월 7일 친일파 척결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이 발표되기 하루 전 시행된 토지개혁도 지주계급 타파가 목적이어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은 계급투쟁이란 면에서 맥을 같이하고 있다.
북한은 “복잡한 계급투쟁의 환경 속에서 일제에게 의식적으로, 적극적으로 복무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그리고 일제의 강박에 의해 피동적으로 복무한 자들을 정확히 갈라서 처리하기 위해 채택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의적으로 일제에 협조한 사람 외에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다. 남한에서 친일파 경력자로 분류된 무용가 최승희도 당시 처벌 없이 60년대까지 활동한 기록이 있다. 정창현 국민대 겸임교수는 “북한이 친일파 청산 심사과정에서 고위 간부가 아닌 공장 기술자나 예술인은 재심의를 거쳐 처벌하지 않았다”며 “친일파로 규정된 사람은 소련으로 가거나 노동현장에서 혁명화 과정을 겪었지만 북한 지역에 친일파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고, 처벌 대상은 월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정적은 세력을 잃고 말았다.
남한의 기생세력들은 김일성을 가짜라고 지껄이다가 중상비방임이 드러나니 이번엔 김일성 부하가 친일파라는 소리를 해댑니다. 다음엔 또 뭐라고 모함을 할런지 끊임없이 모략을 만들어 내니 외세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 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겠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제국주의 시절에도 악명 높았던 반공법 즉, 국가보안법은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보다도 공산주의를 더 싫어했습니다.
히틀러에게 권력을 안겨준 건 서방 은행가들과 대기업들이었습니다.
히틀러가 공산주의를 파괴하고 근로자를 통제하는데 열광하였기 때문에 서방 은행가들과 대기업 지도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올리버 스톤’이 말했습니다.
국가 보안법을 철폐해서 한국을 전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 선전이 아닌 바르고 정직한 말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북한과 여전히 대치중에 있는 한국의 안보 현실을 고려하여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제약해야한다고 합니다.
변견들은 북한과 대치중이라는 특수한 군사안보적 상황이기 때문에 기본권을 제한해도 합법이다 는 식으로 말을 하지만 반역자이며 매국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비하면 별로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반역자, 매국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 대한민국밖에 없는 불법무법의 상태입니다.
견공들은 이와 같이 특수상황이기 때문에 제약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우리민중이 요구했던 대로 제 놈들만 사라지면 특수상황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로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자유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누려야할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밥숟가락 떠먹이듯이 특정한 계층이나 국가가 지정한 사상만 머릿속에 담고서 생각 하라고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안보를 구실로 바르고 정직하게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입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됩니다. 거짓과 위선만 난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북한과 여전히 대치중에 있는데 대치하고 있는 목적이 미국의 식민지를 지키려는 것으로서 침략자에 기생하여 살면서 부모형제를 적이라며 적대시 하는 짓입니다.
현재 65만 한국군은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여 철통같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군이 자기 일가친척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것도 침략입니까?
침략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당한 이유 없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는 것 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은 남한이 남의 나라입니까?
같은 날짜에 나온 신문들도 서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이 남조선 신문입니다. 2010.03.02일 조선일보는 북한의 100달러 위폐 '수퍼노트' 여전히 유통이라는 기사를 내보냈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2/2010030201180.html)
같은 날짜 경향신문은 미 국무부 보고서 “북, 슈퍼노트 제조 불분명” 이라고 기사를 썼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3021818065&code=910303)
북한도 우리국토라고 하면서 국가기밀을 다루지 않는 일반인이 자기나라 북한에 갔다 오면 다녀 온 것만으로도 왜 죄가 되는가? 인위적인 철의 장막을 치고 폐쇄적인 국가로 만들어서 북한에 가보지 못하게 하고 가난해서 딸을 100원에 팔았다는 등 거짓 선전을 해서 속이려는 짓입니다.
실제로 북한에 다녀온 어느 변호사는 TV 에서 내가 다시 눈 뜨고 새로 태어난 것 같다고 소감을 말하였습니다.
이분은 천애의 《고아》로 당당히 변호사에 합격하여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살아오면서 평생 반공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한의 부모가 전쟁 때 북으로 끌려간 아들을 이산가족 상봉 때 만났습니다.
아들이 부모형제 없는 북한에서 고생하는 줄 알았는데 김일성의 보살핌으로 직장에서 높은 직책의 일을 맡아 아들 딸 낳고 잘살고 있다면서 북한에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남에서 올라간 가족들은 모처럼 온가족을 만나 좋아서 가족끼리 화기애애하게 한동안 얘기하다가 남에서 올라 간 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우리 아들을 이렇게 길러주고 높은 직책도 맡겨 주신 김일성 부자에게 감사의 큰절을 올려야하지 않겠냐며 얘기하니까 나머지 가족들도 맞다 면서 전 가족이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에 절을 하는 장면이 TV 에 나왔었습니다.
이사람 뿐만 아닙니다. 모두들 북한에서 잘 사는 모습이 TV에 비쳐 지니까 작년 2009년 상봉 때는 TV 중계를 안 했습니다.
북한 선전 이라는 것입니다. 남한의 허위 선전은 방송에 나가야 하고 북한의 정직한 선전은 국민이 보면 안 되는 것입니까?
보모는 자기 자식이 어디가 아픈지 고민이 있는지 거짓인지 진심인지 아무리 오래 떨어져 살았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생을 하고 살았는지 행복하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감시가 없이 자유스럽게 가족들끼리 모여 얘기하는데도
자기가 믿고 있는 것 외에는 모두 불신 한다면 마약을 먹은 거와 같은 정신병적인 상태입니다.
3.1운동 때 33인의 민족대표는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라고 독립선언을 하였으나. 한반도 남쪽은 지금까지도 100년 동안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자, 친구의 탈을 쓴 침략자 살인자인 미국과 그리고 미국에 기생하는 인간기생충들이 부모 형제도 몰라보게 하는 마약을 세뇌교육을 통해 주입한 것입니다.
건강해 지려고 보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노력을해도 기생충이 있으면 건강해 지지 못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충을 배제하지 않으면 평화교류하고 민족화해하고 노력해도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해방 후 많은 항일애국지사들은 조국이 분열되는 것을 막고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반정부 빨치산 투쟁에 참가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자신보다는 민족을 위해 싸운 항일애국지사의 눈에는 북한이 정당하게 보이고 왜놈 앞잡이 노릇을 한 인간의 눈에는 남한이 정당하게 보입니다.
유엔에서는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군사정권에서는 이를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93년 3월에 유엔의 권고를 수용하여 이인모 노인을 북으로 송환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1917년 8월 24일 현 양강도에서 화전농의 가정에서 출생, 일제강점기 시절 반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인민군 종군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1952년 1월 종군기자 활동 도중 체포, 34년간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시다가 1993년 비전향 장기수 최초로 북송되었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지난 80년대 말 월간 ‘말’지를 통해 자신의 수기를 발표하였고 이것이 온 민족에게 큰 반향을 불러와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이인모 선생님은 북송 당시 극도로 쇠약한 몸이었으나 이후 사람들에게 의지의 화신으로 불리면서 10년이 넘게 건강하게 사시면서 통일을 위한 밑거름을 남기셨습니다.
자신이 신봉하는 사상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여 남한의 괴뢰 군사정권은 이인모 선생의 감방에 뱀을 집어넣는 뱀 고문 등 모진 고문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부당한 압력을 받을수록 불량한 인간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해졌다고 합니다. 마치 미국이 북한을 핵으로 위협할수록 북한 인민들은 배고파도 참고 인내하여 핵무기와 인공위성을 만들었듯이 부당한 압력에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남한은 북한을 반국가단체 폭력집단이라고 선전하지만 이렇게 기자를 감옥에 가두는 국제 규범이나 법도 필요 없는 폭력배인 남한 당국이 반국가 폭력 단체인 것입니다.
재미동포 출신의 북한 인권운동가로 올해 29살인 로버트 박 씨는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2009년 성탄절 중국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義血靑年 로버트 박이 국경을 넘어 북한에 들어 간지
43일 만인 2010.2.6. 북한에서 석방돼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비 법적으로 입국하게 된 동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상을 훼손시키려는 서방의 그릇된 선전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데 있다.
《비밀나라의 아이들》, 《서울행열차》를 비롯한 서방의 영화들과 출판보도물들은 조선에 있지도 않는 《인권침해행위》와 《대학살》 그리고 조선그리스도 교인들의 《혹심한 고통》 등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런 허황한 외곡선전은 그리스도교인인 나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가지게 하였다.
그때에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단지 기도를 드리고 단식을 하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첫 시도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더 많은 소식들과 편집물들이 나왔는데 갈수록 상황이 험악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식들에 접할수록 나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였다.
만일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인들도 그런 처지에 있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죽어야 한다. 내가 그들을 도와준다면 천당으로 가고 그렇지 못하면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공화국으로 갈 결심을 하게 되였다.
국경을 넘어섰을 때 나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선전으로부터 군인들의 총에 맞아죽든가 감옥 같은 데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비법적으로 넘어서는 순간 범죄자인 나를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에서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인권을 보호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몹시 걱정해주었다. 물론 부모들도 나의 건강에 대해 걱정은 한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나의 건강에 대해 부모이상으로 생각해주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공화국에서 체험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서방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지난 기간 공화국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으로 하여 기도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었다.
그러나 점차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였다.
사람들마다 내가 기도를 하는데 대하여 별다르게 여기거나 방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마음 놓고 매일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보장해주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에게 성경책을 돌려준 것이었다.
이 하나의 사실을 놓고도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이것은 내가 평양시에 있는 봉수교회에서 진행된 례배의식에 참가하면서 더욱 굳어졌다.
내가 예배의식에 참가해보니 거기에는 전도사도 목사도 있었다. 합창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찬송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의식에 참가하여 나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냐하면 봉수교회와 같은 그리스도교 예배당과 교인들이 조선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러 지역들에서 전도가 진행되고 있으며 교인들이 성경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 어디서나 읽고 믿을 수 있으며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보고 들은 모든 사실을 통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리해하고 있었음을 절감하면서 서방의 악선전에 기만당하여 저지른 죄과를 심각히 반성하게 되였다.
공화국이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모두가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고 당황하였으며 창피를 느끼었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주었다.
조선의 현실을 잘못 이해한 탓으로 내가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데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에 진심으로 사죄한다.
내가 여기서 듣고 보고 알게 된 모든 것, 사람들 모두가 친절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12월 25일에 저지른 것과 같은 비법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이에 대해 사죄하는 바이다.
나는 공화국정부 앞에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체험한 제반 사실들을 정확히 알려주어 그들이 옳은 인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 교인으로서 조선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하루빨리 깃들도록 열심히 기도하겠다.
요약하면
①“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북한)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줬으며 인권을 보호해줬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줬다”.
②"국경을 넘어섰을 때 나는 조선에 대한 미국의 그릇된 선전으로부터 군인들의 총에 맞아죽든가 감옥 같은데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경을 비법적으로 넘어서는 순간 범죄자인 나를 대하는 군인들의 태도에서 생각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③"군인들만이 아니라 공화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인권을 보호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④"이곳 사람들은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몹시 걱정해주었다. 물론 부모들도 나의 건강에 대해 걱정은 한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나의 건강에 대해 부모이상으로 생각해주고 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정말 감사한다.".
⑤"내가 공화국에서 체험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서방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내가 평양시에 있는 봉수교회에서 진행된 례배 의식에 참가해보니 거기에는 전도사도 목사도 있었다. 합창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찬송가를 알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⑥"나는 보고 들은 모든 사실을 통하여 조선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절감하면서 서방의 악선전에 기만당하여 저지른 죄과를 심각히 반성하게 되었다. 공화국이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해 준다는 것과 모두가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말 충격을 받았고 당황하였으며 창피를 느꼈다. 이곳 사람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나를 사랑해주었다".
이와 같이 말하니 어떤 사람은 북한의 연극에 속은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버트 박은 연극을 관람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주민들 속에 뛰어들어 만나고 이해 될 대까지 질문을 하고 말만 듣는 것이 아니고 표정과 작은 동작 하나하나를 보고서 본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로버트 박은 말로만 들었던 북한에 가서 북한 사람들을 직접 피부로 느낀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과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특성인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며 함께 생활하고 함께 얘기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말로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진심임을 오감을 통해서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로버트 박 자신이 서방세계에서 무엇을 듣고 자랐는지 북한 사람들은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누구하고든지 마음대로 만나서 어떤 주제를 꺼내서 얘기해 봐도 그때그때의 상황에 해당하는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박에게 감응을 주는 얘기였으며 누가 시킨 각본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한사람을 연극이나 하는 로봇으로 굳게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러시아나 중국 그 밖에 어떤 힘센 나라가 핵무기 미사일을 만들지 말라고 시키고 윽박지르고 협박 하여도 거기에 따르지 않고 핵무기도 그리고 인공위성까지도 만들지 않았습니까? 로봇처럼 누가 시키는 대로하는 남한 사람과는 다른 자유인입니다.
주위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이 북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얼마 안 되지만 성의로 받으라고 꽤 많은 북한 돈을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북한 사람은 괜찮습니다. 저희는 필요 없습니다. 국가에서 다 해줍니다. 하면서 사양하였고 그 분은 보는 사람이 없으니 받으라고 하면서 진심으로 주고 싶었으나 받지 않고 그 북한 사람이 주실 필요 없다고 받은 걸로 하겠다고 오히려 열심히 설득하려고 애를 쓰고 끝내 안 받더랍니다.
그 북한 사람이 짜증을 낼 정도로 넣어두라고 여러 차례 권하여도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이 북한에 관해서 어떤 선전을 들어 왔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노비정부로부터 무려 10억 원의 지원을 받은 뮤지컬 ‘요덕 스토리’ 같은 비방선전물을 많이 봐서 로버트 박 같은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이인모 선생에 이어서 2차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이 2000.9.2. 에 있었다.
비전향 장기수들과 민가협 등 시민단체 회원들은 "남으로 다시 올 테니 건강해라" "북으로 찾아가 뵙겠습니다." 라며 서로의 건강을 당부했다.
93살의 노모 고봉희 씨를 두고 북으로 가는 신인영(71) 씨는 "어머니, 다시 오겠습니다. 건강하셔야 합니다"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눈물을 흘렸다.
비전향장기수들은 북한의 가족들을 북한공산당이 해칠까봐 전향을 안 한다고 기생세력들은 사기를 쳐 와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또 속은 것입니다.
북한에 2차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63명중 20명만 북한 출신이고 나머지 43명은 남한 출신입니다.
남한 출신 중에서는 대구 경북출신이 9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43명의 남한 출신 중 북한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12명이나 됩니다. 통일조국 염원을 안고 수십 년을 감옥에서 살면서도 자기 정치 신념과 양심을 지켜온 분들입니다.
그 12명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오직 양심에 따라 기약 없는 줄 알면서도 옳은 길을 걸어온 분들입니다.
12명은 남한에만 가족이 있지만 가족에게 피해를 줄까봐 연락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군사괴뢰 정권하에서 비전향장기수를 모두 전향시키기 위해 고문을 하였다. 모진 고문에서도 죽으면 죽었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깡패를 고용한 괴뢰정권은 결국 양심수들을 고문하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사실이 세계 시민사회에 알려져 유엔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식민지괴뢰정부에 장기 양심수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죽으면 죽었지 오직 옳다고 생각되는 한길밖에 모르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비전향 장기수의 얘기를 들어보자.
1961년 6월 내(김석형)가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니며 취조 받을 때 해방 전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나를 고문한적 있는 김병길이라는 자와 맞닥뜨리게 되였다. 전기고문기술자로 소문난 이자는 《요놈의 새끼, 잘 만났다. 어디 뜨거운 맛을 봐라》고 지껄이면서 전깃줄 한 선은 나의 손에 묶고 다른 한 선은 발에 묶어놓은 다음 전기를 투입하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심한 경련으로 몸부림쳤다. 그래도 내가 전향하지 않자 이자는 잔인한 웃음을 띠우며 《씨까지 말려야 알겠는가》고 하면서 이번에는 전깃줄의 한 선을 나의 오른손에 연결하고 다른 한 선은 국부에 연결하여 전기를 다시 투입하였다. 나는 전신에서 불씨가 튀여 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우용각) 역시 철창 속에 갇혀있을 때 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였다. 대전《교도소》와 광주《교도소》, 전주《교도소》 등에 끌려 다니면서 나는 파쇼 교형리(사형을 집행하는 간수)들에 의하여 《통닭구이고문》과 《물고문》 그리고 방바닥에 쓰러뜨리고 온몸을 여러 겹으로 꼰 밧줄로 콩 타작하듯 내리치는 《타작고문》, 손발을 등 뒤로 결박하고 목고채를 목덜미에 끼워 넣고 비트는 고문 등 별의별 고문을 다 당하였다. 그로 하여 무릎관절과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옆구리갈비뼈가 전부 부러졌으며 목뼈까지 크게 상한데다가 늑막염에 걸려 온몸이 만신창이 되어버렸다. 그때 나에 대해 악착하게 고문을 들이대던 대전《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유종흠과 《교회관》 라석규, 《교화사》 신하균 그리고 광주《교도소》의 《전향공작전담반》 반장 문승호, 《교화사》 리규연, 최한주 등 파쇼교형리들의 잔인하고 험상스러운 몰골은 지금도 저승사자처럼 눈앞에 스산하게 떠오르곤 한다.
살인악마들의 야수적인 고문의 어혈로 공화국의 품에 안겨 행복한 삶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은 생전에 자기가 당한 고문만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향하겠어? 안하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세상이 두 쪽 나도 전향을 안 하니 포기해라>. 그러자 떡봉이 셋이 달라붙어 나를 밧줄로 묶고는 얼굴에 물수건을 덮었다. <야 고추가루 탔어?>. <탔어> 숨이 꺽꺽 막혀 내가 몸을 움직이자 한 놈이 내 얼굴을 치며 소리쳤다. <가만있어 빨리 고춧가루 물을 부어!>. 세상에서 가장 참을 수 없는 일의 하나가 코와 입을 통해 고추 가루를 탄 물이 그냥 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저 붓는 대로 물이 들어가는 것이다. <커억, 쿨럭!>. <계속 부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나를 붙잡고 계속 물을 붓는다. 의식이 혼미해지고 어느새 기절한다. 그놈들이 다시 발로 배를 걷어찬다. 물을 다 게우면 또다시 고추 가루물을 부어댄다. 》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고문만행에 살인강도질을 일삼다가 잡혀온 폭력범들까지 동원하였다. 내(조창손)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인 1973년 여름 어느 날 폭력배들이 《특별사동》의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향해 《야, 11방, 전향 안 해?》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나? 나는 전향 안한다. 》하고 말하자 폭력배들은 《뭐, 너 여기 나와, 이런 쌍놈의 새끼가 다 있어. 》하고 지껄이면서 나를 끌어내어 지하고문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천정에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 《불고문》 등을 가하면서 무려 8시간동안이나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발로 차고 짓밟아댔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가 터지고 턱이 삐어지고 입이 째진 처참한 상태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반죽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파쇼악당들의 야만적인 고문만행으로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참혹하게 학살당하였다. 대전《교도소》에 있던 비전향자 리선우도 아침 일찍 끌려 나가 캄캄한 밤이 되여 시체가 되여 돌아왔는데 그의 온몸은 고문으로 시꺼멓게 멍들어있었다.
교형리들은 비인간적고문과 학대에 단식으로 항거하는 비전향자들에 대해서는 《강제급식》이라는 고문도 들이대었다.
《강제급식》은 간수 여럿이 달려들어 단식하는 사람을 콩크리트 바닥에 쓰러뜨려놓고는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고무호스로 펄펄 끓는 뜨물 같은 멀건 죽물이나 굵은 소금이 채 풀리지 않은 차디찬 소금물을 마구 목구멍으로 들이미는 고문이었다. 이 무지막지한 《강제급식》고문으로 음식물이 식도가 아니라 기관지나 기도로 들어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1980년 7월 나(리종)를 비롯한 청주《보안감호소》에 감금된 우리 비전향자들은 야만적인 고문학살만행에 항거하여 집단항의단식을 한 적이 있었다. 집단단식에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강제급식》고문장으로 끌려갔다. 《강제급식》고문장은 우리 먼저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배설물과 구토물로 질벅하였다. 그 질펀한 바닥에 꿇어
앉히다가 나는 주춤하고 말았다. 왼쪽 콩크리트바닥에 김용성이 포승에 꽁꽁 묶인 채로 비스듬히 쓰러져 운명해 가고 있는것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그의 동공은 이미 확산되어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고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날 《강제급식》고문만행으로 김용성, 변형만 두 비전향자가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파쇼악당들이 우리들에게 가한 야수적인 고문만행을 꼽자면 끝이 없다. 비전향자 리용운과 황필구처럼 야수적인 고문과 비인간적인 학대에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그만둔 이 야수들의 잔악무도한 고문만행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비전향자들이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교형리들은 우리 비전향자들을 무참히 고문학살하고는 저들의 비인간적 만행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자살》로 꾸며놓기도 하였다. 대전《교도소》의 《최석기, 박융서 고문치사사건》은 그 하나의 실례이다. 《전향공작전담반》의 교형리들은 1974년 4월 최석기가 사상전향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처참하게 때려죽이고는 목을 매여 《자살》한 것처럼 처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간수 김진태, 깡패 이돈욱 등은 비전향자 박융서를 몽둥이로 때리고 바늘묶음으로 온몸을 찌르고 나중에는 인두로 지지면서 모진 고문을 가하던 끝에 잔인하게 살해하고는 그의 배와 목을 유리로 마구 난도질 쳐놓고 《자살》로 꾸며놓는 치 떨리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파쇼악당들은 고문과 학살로 비전향자들을 굴복시킬 수 없게 되자 고문 끝에 의식을 잃은 사람들을 강제로 《전향》의 손도장을 찍게 하거나 고문으로 학살당한 사람을 《전향자》로 만드는 모략도 거리낌 없이 감행하였다. 당시 광주《교도소》뿐 아니라 대전, 전주를 비롯하여 남조선각지에 널려진 《교도소》들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정치범전향 실적 올리기》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 강제전향책동으로 하여 적지 않은 비전향자들이 《전향자》의 루명을 쓰게 되였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전향》이라는 구실로 오늘까지 공화국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
파쇼교형리들은 우리들을 사상 전향시키기 위하여 회유기만책동에도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들은 야수적인 고문만행의 후과로 중병을 만나 생사기로에서 헤매고 있는 비전향자들에게 전향을 하면 약도 주고 치료도 해주겠다고 하면서 얼림 수를 썼으며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죽게 하였다.
1973년 9월경 나(박완규)는 고문후유증으로 호흡장애가 심해지고 고열이 나면서 운신할 수 없게 되였다. 의무과장이라는 자가 와서 진찰했는데 급성 폐렴에 늑막염이라는 것이었다.
이자는 치료를 안 하면 사망한다고 하면서 《중환자이기에 병사에 입병시켜야 하겠으나 전향하지 않아서 안 된다. 전향만 하라. 그러면 항생제주사도 놔주고 치료도 해주겠다. 》고 하였다. 나는 격분하여 그자를 내쫓아버렸다. 결국 병 치료를 받지 못하여 사경에서 헤매다가 겨우 살아남게 되였다.
비전향자 최재필은 오랜 기간의 감옥살이와 고문만행으로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데다가 위암까지 걸렸다. 교형리들은 《전향해야 수술해주겠다》고 하면서 그를 병사에 보내는 것을 거절하였다. 우리들이 《환자를 놓고 흥정하느냐, 당장 입원시켜라. 》고 하면서 강력히 들이대자 교형리들은 그를 병사에 데리고 가는척하고는 병사 2층에 있는 문둥병원에 처박아두었다. 결국 그는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 운명하였다. 비전향자 유재현도 고문의 후과로 폐병을 몹시 앓았다. 교형리들은 그에게 병을 고쳐주겠으니 《전향서》를 쓰라고 하면서 그러면 마산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주겠다고 하였다. 그가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뻗치자 교형리들은 약조차 주지 않아 결국 그는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파쇼교형리들은 사상전향공작에 가족들까지 내모는 비열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내(양정호)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있을 때 어느 날 교형리들은 나를 사상 전향시켜 보려고 여든이 넘은 어머니를 끌어왔다.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가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야말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때 나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혈육의 정까지 전향공작에 이용하는 파쇼 통치배들에 대한 증오로 치를 떨었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야만적인 고문후과로 사망한 비전향장기수 신인영의 경우도 교형리들이 그의 8형제를 모두 끌어내어 전향공작에 내몰았으며 그들이 잘 동원되지 않는다고 모진 고문을 가하여 동생은 허리까지 다쳐 고생하게 하였다.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이 만기출소한 후에도 본인은 물론 가족들도 거주와 직업, 생업, 여행 등에서 계속 커다란 박해를 받으면서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당하였다.
실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사상과 신념을 꺾기 위하여 남조선 파쇼통치배들이 저지른 악행은 이루다 말할 수 없다.
극악무도한 고문학살만행과 온갖 비인간적학대로 우리 비전향장기수들의 존엄을 유린하고 생명을 빼앗았으며 신체를 마구 짓밟은 남조선의 역대 파쇼통치배들의 죄행은 그 하나하나가 천추에 용납 못할 가장 야만적인 반인권범죄이다.
종교와 사상 같은 믿음을 강제적으로 폭력으로 바꾸게하는 나라가 이세상 어디에 있는가?
인류력사에는 신념과 정의를 지켜 싸운 유명, 무명의 영웅, 투사들도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사상전향과 굴복을 강요하는 최악의 감방조선에서도 30, 4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 한생을 바치고 목숨을 내대면서도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지켜 낸 우리의 비전향장기수들과 같은 불굴의 인간들은 아직 모른다.
홍안의 애젊은 시절에 들어 간 감옥문을 머리에 백발을 얹고 나오기까지 갖은 고문과 유혹속에서도 그들은 과연 무엇을 믿었고 어떤 담력과 배짱이 있었기에 한번 택한 사상, 한번 들어 선 길을 끝까지 걸어 올수 있었는가.
김선명(金善明)은 세계최장기수라는 거창한 명칭답게 4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빨갱이라는 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갇혀 지낸 사람이었습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고 했습니다.
근본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근본이 불량하면 학식이 아무리 높더라도 사리사욕을 쫓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만큼 가문과 뼈대가 가치 있는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김선명 김정일은 뼈대 있는 항일의병 집안 출신입니다.
김선명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서 출생했다. 만석꾼인 김선명의 집안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으나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보면서 자신이 사는 세상이 평등이 없는 사회임을 깨닫게 되었다.
1995년 출소할 때까지 45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이 기록은 세계 최장기수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라 있다.
TV 에서 어느 외국인이 <김선명을 석방하라>라는 노래를 부렀는데 제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김선명 이라는 이름 뿐이었으나 그 외국인은 열심히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김선명은 세계 시민 여론의 힘에 의해서 석방 된 것입니다.
6·25전쟁 중 9.28수복때 월북해 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가 51년 10월유엔군의 포로가 된 그는 무기수가 됐다.
한편, 김선명이 인민군에 입대한 사이 아버지와 누이 두 명은 국군에게 보복 살해되었고, 다른 형제들은 연좌제로 고통을 받아 김선명과 연락을 끊었다.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 드물게 총각이었던 김선명은 북조선으로 송환된 뒤 결혼하여 평양에서 살고 있다.
김선명씨는 같은 한반도에 태어나 자랐음에도 오직 머리속에 "빨갱이물"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탄압을 받고 형제들도 자신에게 까지 야만적인 탄압이 가해질까 무서워 외면 하였던 한많은 40여년의 반도남쪽 생활을 걷고 떠났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쳐 지는 대전교도소
너는 무서운
야수의 아가리
자주와 통일을 위한
이 땅의 양심들을
무차별로 삼켜
몇 십 년이더냐
199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의 그날로부터 반세기 되는 날이었다.
통일을 위해 심장을 불태우던 사람들을 수없이 빨아 들여 청춘을 빼앗고 목숨을 삼켜 버린 대전교도소의 뻘겋게 녹 쓴 철문이 무겁게 열리며 나는 《세계최장기수》라는 옥살이기록을 안고 감옥 밖으로 나왔다.
스물여섯 살 홍안의 청춘을 45년간 철창 속에 가두고 짓 조기고 얼쿠고 굶기다가 끝내 토해 버리고야 마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45년 세계최장기 옥살이, 그것은 한마디로 죽음과의 결사대결에서 사회주의 신념이 승리한 45년,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절대불변의 신념이 나의 운명을 구원해 준 45년이었다.
조선인민군 정찰부대에서 복무하던 나는 1951년 10월 15일 철원근방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 불행하게도 미국 놈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다. 미군정보기관에 끌려갔다가 남조선육군특무대에 넘겨 진 나는 1952년 2월경 서대문육군형무소를 거쳐 마포형무소로, 1953년 4월경에는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나는 터무니없는 《간첩죄》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시 군법회의라는 데서는 정확한 심리도 없이 《앞줄 누구누구이하 사형, 뒤줄 누구누구이하 무기》하는 식의 날치기 단심재판을 하는 판국이었다. 이렇게 되어 대구형무소에서 근 1년간 사형수생활을 하던 나는 1954년 2월 27일 서류심사에서 무기형을 확정 받았다. 기아와 혹한, 고독의 지옥에서 참기 어려운 전향고문을 당해야 하는 무기수옥살이가 시작되었다.
전향강요의 첫 시련은 1957년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형무소 작업과장이란 자가 나타나서 《전향자술서》를 안 쓰면 모두 《불취업》처분을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불취업》이란 형무소 안에 설치한 공장에서 하던 일을 못하게 하는 일종의 벌이었다.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다소나마 주림을 달랠 수 있고 고독감도 덜 수 있었던 재소자들에게 있어서 《불취업》은 사형선고 다음 가는 중벌이 아닐 수 없었다. 그자는 자술서를 안 쓰고 《불취업》처벌을 받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놈들이 요구하는 어떤 형태의 문서장이든 전향강요의 한 형태이므로 우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기로 했다. 나는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뒤따라 모두가 손을 들었다.
《불취업》에 들어가면서부터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죄수옷섶에 꽁보리밥 한 덩이를 받아 안고 양말 빨고 난 물 같은 소금국 반 국자를 고무신짝에 받아먹는 살인적인 급식조건에다 10명도 빠듯이 들어 갈 방에 20여 명씩 번호순서로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감방 안은 찌물쿠는 더위와 악취로 질식할 지경이었다.
전향강요와 그에 따르는 살인고문은 중요 정치적 사변들이 있을 때마다 더욱 살기를 띠군 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후 군사파쇼도당은 《사상범》들을 한데 모아 놓고 《특별관리》를 한다면서 여러 지방 교도소들에 분산 수감되어 있던 비전향장기수들을 대전형무소 특별사로 집결시켰다가 7.4남북공동성명발표 이후에는 다시 대전, 대구, 광주, 전주 등지의 교도소로 분산 배치하였으며 교도소 별로 《전향공작반》을 조직했다.
인류형법사에 《한국의 사상전향테러》로 악명을 떨친 1972년부터의 전향공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공작반놈들은 《한국》의 교도소들에는 공산주의사상을 가진 《빨갱이》가 한명도 있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빨갱이》들을 돌려 세우라, 전향공작과정에 생기는 인명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안는다는 것이 《청와대》의 《특별지령》이라고 하면서 죽던가, 전향하여 살든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라고 공공연히 위협하였다. 낮에는 복도를 돌아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밤에는 한명씩 불러내다 잔인무도한 고문을 들이댔다. 감방바닥과 복도가 온통 피로 칠갑을 했고 처절한 비명소리에 육중한 감옥건물마저 몸부림치는 듯 했다. 고문으로 숨지는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등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다.
신념을 안고 정치적 생명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신념을 버리고 육체적 생명을 부지하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이었다.
죽더라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안겨 주신 정치적 생명과 체험을 통해 심장에 새겨 안은 최고사령관동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결단코 버려서는 안 된다, 내가 감옥에 끌려 올 때 살기를 바랐던가, 죽음을 각오한 이상 맞받아 나가자, 죽더라도 피 값은 받아 내야 한다, 이렇게 결사의 각오를 굳히니 순간이나마 갈마들었던 공포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음은 오히려 담담해 졌다.
드디어 나의 신념을 검증 받는 시각이 왔다.
1974년 6월 어느 날이었다.
《3596번-》
나를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그래 전향을 안 하고 끝까지 뻗댈 작정인가? 인생이 뭐고 부귀영화가 뭔지 알고나 있어?》
《난 인생이요, 부귀영화요 하는 따위는 모른다.》
《무식쟁이, 그걸 모르니 뻗댈 수밖에.》
《그렇다. 나는 너희들의 <이론>따위에는 무식하다. 그 따위 것을 알아서 뭘 해.》
존엄 높은 조선로동당원이 적들의 반동이론을 알아서는 무엇 하겠는가. 더욱이 적들과 단독으로 대결하는 마당에서 말씨름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놈들의 궤변에 말려들어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좋다》, 《나쁘다》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쟁이》로 계속 뻗쳐 댔다.
《내 인생철학을 한 강의 해줘야 할 가 보군.》
《가만 한 가지 묻자. 불이 왜 뜨거운지 아는가?》
《어, 그거야…》
《모를 테지》
《뜨거우니까 뜨겁지 왜 뜨겁겠어, 난 철학이고 이론이고 그런 건 몰라. 그저 옳은 것은 옳기 때문에 옳은 거지. 난 김일성장군님과 공화국이 절대적으로 옳고 좋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하는 거다. 옳은걸 나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전향 안 하는 거구.》
놈들은 《빨갱이》의 악질인 자를 발가 내겠다며 달려 들었다. 옆에 섰던 놈의 가죽장갑을 낀 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귀뿌리로 날아들었다. 전향을 하지 않는 한 피 터지도록 맞을 것은 뻔한데 나 죽었소 하고 두들겨 맞기만 하겠는가, 네 주걱이 하나면 내 주먹은 두개다! 나는 날아오는 그놈의 주먹을 피하며 날래게 달려들어 그놈의 사타구니 것을 움켜잡아 채며 늘어 졌다. 급소를 잡힌 놈은 사색이 되여 거친 숨을 톺아 쳤다.
《죽여 버리겠어. 어느 놈이든 한 놈 병신 만들고야 말거야.》
나는 힘을 다해 머리로 그놈의 배를 밀어 받으며 급소부위를 기운껏 잡아 당겼다.
《아이구, 나 죽는다. 사람 살려라-》
그놈이 얼마나 고함을 지르는지 간수들이 다급히 달려 왔다. 놈들은 달라붙어 내 손가락을 잡아 푸느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나는 사생결단의 악이었고 놈들은 곁 놈을 구원하기 위한 간접적인 발악이었다. 그러니 내 손을 풀 수 없을 수밖에.
급소를 잡힌 놈은 놓아 주면 다시는 폭력행사를 안하겠다고 숨 넘어 가는 소리로 빌었다. 그제서야 나는 손을 풀었다. 손을 풀자 간수놈들이 발로 내 면상을 걷어찼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 몸을 휘청거리는 사이에 목덜미에 둔중한 몽둥이강타가 떨어 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나는 의식을 잃었다. 깨여 보니 온몸이 멍이 들고 쑤셔 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통쾌했다. 아무래도 죽도록 얻어맞을 건데 먼저 손을 써서 한 놈 혼찌검을 내주고 항복을 받아 내니 아픔이 덜한 것 같았다.
쇠를 숫돌에 갈면 날이 서듯이 놈들이 고문장에 불러낼수록 나는 놈들 몇 배로 펄펄 뛰곤 했다. 놈들이 내 멱살을 움켜쥐면 나는 그놈의 멱을 비틀어 잡고 숨을 못 쉬게 했다. 손발을 묶을 기미를 보이면 선손을 써서 골받이를 하고 물어뜯는 등 결사의 자세로 놈들과 맞서 싸웠다. 어떤 방법으로든 매번 놈들에게 주먹 값을 치러 주고 본때를 보였더니 놈들은 점차 무지막지하게 다루지 못했다. 나의 가까이에 접근하기를 주저했고 언제 날아 들지 모를 나의 손과 발, 머리를 경계했다. 적들에게 그 어떤 자비심을 바라거나 비굴하게 놀면 놈들은 더욱 포학해지고 기승을 부린다. 적들과는 오직 맞불질을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동유럽사회주의나라들의 붕괴를 기화로 놈들의 전향공작은 집요한 회유기만술책으로 넘어 갔다.
어느 하루 나는 교무과 전담반으로 불려 갔다. 교화사라는 놈들이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여 주며 《보라. 당신이 아무리 사상이요, 신념이요 하면서 버텨도 사회주의는 무너지고 있어.》하는 식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쏘련이 어떻소, 루마니아가 어떻고 고르바초프가 어떻고 하고 지껄여 대던 교화사놈은 《어떤가. 생각을 달리할 때가 되잖았어?》하면서 나의 대답을 독촉하는 것이었다.
《소련이요, 동유럽이요 하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밖에 몰라. 장군님밖에 모른단 말이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공화국은 끄떡하지 않는다.》
《지독한 놈, 악종 같은 놈.》
놈들은 악에 받쳐 날뛰었지만 더는 어쩌지 못하고 나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철의 심장일지라도 혈육을 통한 적들의 전향심리전은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살인적인 고문일변도로 전향거부의지를 꺾을 수 없게 되자 적들은 부모친척들을 이용하는 회유책동을 병행하였다.
1989년 봄 삼촌을 통한 전향설유, 그해 겨울 제수를 통한 전향설복은 나의 가슴을 사정없이 허비였다.
내가 수십 년간 감옥 안에서 《빨갱이》의 사상을 가진 것으로 하여 인생최악의 고초를 다 겪었다면 혈육들은 《빨갱이》아들, 《빨갱이》형님 때문에 감옥 밖에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시달림을 다 당하였다. 적들은 가족, 친척들의 애절한 하소와 전향설득으로 우리가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회정의와 인간의 양심에 비춰 볼 때 결코 나는 《죄》인일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마음은 대적관계에서도 철석이여야 하지만 혈연과의 관계에서도 냉정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고 그들의 전향권유를 단호히 뿌리쳤다.
혈육들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나의 심장은 더더욱 뜨거워지고 이성은 더욱 냉철해 졌다.
45년 동안 감방에서 믿는 데가 없었다면 내가 감히 그렇듯 죽음을 범상하게 여기면서 적들과 뻑뻑 맞설 수 있었겠는가.
위대한 영도자의 품에 안겨 수령에 대한 절대적 숭배의 암반에 신념의 기둥을 세울 때만이 그 어떤 천지풍파에도 드놀거나 굽히지 않는 불굴의 투사로, 영웅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한생의 총화이다.
{김일성이 왕청에 있을 때 수류탄공장을 하나 지어달라는 편지를 소련에 보낸 적이 있었는데 상대측에서는 회답조차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일성부대는 《연길폭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탄을 자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 합니다.
즉 소련은 동북혁명이나 조선혁명에 냉담하고 무관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김일성은 조선독립을 외세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우리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룩하려고 하였습니다.}
광복직후 독립조선의 진로를 두고 서울장안이 어중이떠중이 정객들로 일대 혼잡판을 이루었을 때인 1946년 봄 어느 날이라고 생각되는데 평양에 올라 가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조선이 나아갈 길을 받아 안은 여운형선생이 영등포 우편국 앞마당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얼마 전에 북에 가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만나 뵙고 내려 왔다는 것을 이야기한 다음 그분께서 광복된 우리나라는 미국식이나 소련식을 따를 것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 길로 나가야하며 새 조선건국사업에서 외세에 기대를 걸 것이 아니라 민족의 단합된 힘을 믿어야 한다는 것, 민족이 단합하려면 정견의 차이나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애국애족의 기치아래 통일전선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 그러자면 일체 파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 광복된 조선이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신데 대해 감동적으로 이야기했다.
1950년 9월 27일 서울을 떠나 전략적인 후퇴의 길에 올랐을 때였다. 철원근방에서 인민군부대에 편입되었다. 인민군대에 몸을 잠근 나는 참으로 놀라운 현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고금동서의 어느 나라 군대에나 상관의 명령일하에 움직이는 군률이 있고 그래서 등급에 따르는 차별이 심한 것이 군대인줄로 알았다. 내가 보아 온 일본놈 군대가 그랬고 《국방군》이 그랬다.
그러나 인민군대에는 상하간에 간격이나 차별이 없고 형제지간 같은 애정과 화목이 꽉 차 있었다. 상관은 하급을 혈육처럼 사랑하고 하급은 상급을 아버지나 형님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알고 보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조직영도하신 항일무장투쟁시기로부터 내려오는 관병일치의 전통, 혁명적동지애의 계승이었던 것이다. 전하명장 김일성장군님의 군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한번은 마초를 베다가 낫에 다리가 약간 긁혔는데 중대장은 큰 일이나 난것처럼 급히 달려 와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매 주었다.
어찌 중대장뿐이랴. 중대의 모든 성원들이 친형제처럼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한집안처럼 화목했다.
천하명장의 슬하에서 교양육성된 인민군대의 참모습에서 나는 사랑과 믿음과 정을 주는 혈연적인 동지적 단결로 험난한 조선혁명의 혈로를 열어 오신 위대한 인간이시고 위대한 동지이신 김일성장군님의 고매한 인품을 읽었다.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인간적인 매혹과 절대적 숭배심에 뿌리박은 신념의 기둥이 있었기 때문에 1만 6,425일의 주림과 추위, 고독과 전향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사회주의사상을 지켜 내고 육체를 지탱해 낼 수 있은 것이 아니랴.
혈육들조차 정을 끊어 버린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끝까지 나를 고무격려해 주고 승리에 대한 신심을 안겨 준것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싸움길에 뒤떨어진 한명의 전사라도 천리만리를 되돌아 가 부축하여 대오에 세워 주며 역경에 처한 동지 마지막 한사람까지도 다 구원해 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특유한 동지애의 세계를 실감할수록 장군님과 동지애로 혼연일체를 이룬 무한한 긍지와 자랑이 가슴에 차넘쳤다.
사실 동지를 위한 일에 한몸을 내댄다는것은 결코 누구나 할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일국의 영도자가 평범한 전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그토록 헌신적인 로고와 심혈을 바친다는 이야기는 고금동서에 없었다.
세계최장기수라고 불리우는 나로 말하면 물론 한생의 거의 전부를 철창 속에서 최악의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국앞에, 민족앞에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인간으로서의 의리와 신념을 지킨 것 밖에 그 무슨 생의 흔적을 남긴 것이 있는가.
의리는 사회적 존재인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이다. 아무리 죽을 고비에 들었다 한들 다 꺼져 가던 민족과 겨레의 운명을 구원해 주시고 천대와 멸시 속에 살아오던 무지렁이인생들을 나라의 주인,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내세워 주신 민족재생의 은인, 인민의 어버이에 대한 충의를 저버린다면 무슨 인간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량심과 의리와 지조를 지켰을뿐인데 곁에 둔 자식보다 멀리서 고생하는 자식을 더 생각하는 어버이심정으로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역사적인 북남최고위급회담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문제를 상정시켜 북남공동선언문 조항에 박아 넣도록 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이시였다.
이 억척같은 신념의 기둥이 내 가슴에 서 있는 한 나는 45년 세계최장기수로 두 번 다시 산다 해도 그 어떤 주저나 동요도 없이 수난의 그 길을 웃음 속에, 긍지 속에 걸어 갈 것이다.
옥살이 중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전향하지 않았다.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개 휴전 후 공작원으로 남파된 데 반하여 김선명은 전쟁 중 잡힌 군인이라는 점에서 리인모와 유사한 경우였다. 김선명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제31사단 정찰부대 소속이었다고 밝혔으나,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526군부대라는 간첩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간첩죄가 적용되어 전쟁 포로가 아니라고 억지 주장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른 송환 대상 비전향 장기수로 선정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양심수인 김선명을 주인공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다큐멘터리 《송환》과 극영화 《선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내삶이 닻을 내린 곳》이라는 장편영화와 〈신념과 의리를 지킨 45년〉이라는 단편영화가 만들어졌다. 북조선의 소설 《조국의 아들》 역시 김선명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1993년에 김선명을 주제로 한 〈43년 김선명 할아버지께 바치는 시〉를 발표했다. 다음은 문익환 목사의 시 중 일부이다.
얼마나 긴 세월이었습니까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43년이나 당신을 가둬둔 조국
얼마나 부끄러운 역사입니까
(중략)
김선명 총각 할아버지
끝도 안 보이는 당신의 그 기다림은 무엇이었습니까
43년은 얼마나 긴 싸움이었습니까
몽둥이 찜질이야 기절해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온몸 바늘로 찔러대는 쓰림과 싸우며 버텨내신
그 신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후략)
{북한이 사분오열 되어 있었더라면 김선명은 북한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김선명은 민족을 단합시킬 옳은 지도자를 모신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지가 임종에 한 탄식대로 나라에 위인을 모시지 못하다보니 우리 선조들은 역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어도 사색당쟁으로 기울어지는 국운도 바로 잡지 못했고 종당에는 망국의 비운도 막지 못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척양척왜의 총검을 잡았으나 허무한 희생만을 남겼고 의병도, 독립군도 모닥불처럼 사그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의병들이 지도자가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무수히 죽는 것을 경험한 조선민중은 특히 전쟁에서는 훌륭한 지도자를 갈망 하였습니다.
걸출한 영도자를 모시지 못하면 죽을 각오도 무의미하고 헌신적인 애국충의도 허무하다는 것이 할아버지 대부터 우리 가문이 새겨 놓은 가훈이라면 위대한 수령의 영도를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일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혈육도 남남사이가 되고 진하게 이어 져 오던 혈연도 매정하게 잘라 버리는 이기적 인간으로 된다는 것이 나의 대에 와서 우리 가문이 보여 준 생활의 진리이다.
내가 45년 옥살이를 하고 대전교도소를 나서는 날 문밖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성의를 다해 우리의 옥바라지를 해주고 석방투쟁을 벌여온 《민가협》성원들, 운동권의 청년학생들과 각계인사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남쪽태생으로서 친인척인 많은 나에게는 일점 혈육도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형언할수 없는 착잡한 심경을 안고 일단 집으로 가기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먼저 출소한 동지들이 살고 있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락성대 《만남의 집》을 찾아 갔다.
《민가협》성원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
천만뜻밖에도 형제들이 나와 만나기를 거부해서 마중도 안 나왔으며 내가 그들의 집에 가는것도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들을 기다려 죽지 못한다는 94살의 어머니도 만날 수 없다는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동생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형과의 의절을 선포했던것이다. 벌써 내가 출소하기 20년전인 1976년에 동생 선일이는 내가 1950년 8월 2일에 죽은것으로 사망신고서를 내고 나를 호적에서 지워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지 석달후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조차도 통지가 없었고 묘를 어디에 썼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선희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자고 했으나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선일이가 형이 장례식에 오면 자기는 거기에 안 가겠다는 최후통첩을 해왔기때문이다.
생각할수록 억이 막히는 일이였다. 출소 며칠후 극적으로 만났던 어머니의 주름 패인 얼굴이 떠올랐다. 로환으로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저녁밥술을 놓은 다음 대문까지 걸어 나가서는 생급스럽게 《선명이 왔다 갔지?》라고 큰소리로 물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신상이 심상치 않아서 림종이 박두했다는 예감이 든 동생내외는 급기야 《민가협》에 알려 나와 만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건강을 핑계대면서 상봉시간을 재촉하는 제수때문에 45년만에 처음이자 일생에 마지막이였던 어머니와의 만남은 고작 25분으로 끝났다.
나라가 독립되지 못하고 국민이 미국이란 주인을 섬기는 노비신세로 전락하였으니 어찌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 친일친미 매국노의 폭력이 가해질까봐 형을 형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아들이라도 마음 편히 만나지도 못하니 이런 기막힌 망국노의 한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야속하면서도 정겨운 시선으로 이 아들을 바라보는 물기어린 어머니의 눈빛에서,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시는 그 작고도 따뜻한 손길에서 변함없이 뜨거운 어머니의 사랑이 나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세상에 기막힌 일도 다 있구나. 선명아, 네가 이렇게 나왔는데 너와 동생들, 제수들과 조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밥이라도 한 끼 나누는 걸 내가 보았으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어머니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용서해라, 아들아…
이것이 어머니모습에서, 그 선한 눈빛에서 내가 읽은 모성애의 서정시였고 내가 들은 그 옛날과 다름없는 어머니의 자장가였다.
제수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재촉하며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자 어머니는 그를 마다하며 나에게 안기겠다고 하였다. 내가 어머니를 안아 자동차에 앉혀 드리는데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장손아, 집은 네가 갈 곳이 못 되는 것 같구나.》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감은 눈귀로 눈물이 주르르 굴러 내렸다.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어머니손등에 점점이 떨어 졌다.
(나라의 남쪽반쪽이 미 식민지로 되어 노예처럼 상전의 눈초리가 무서워 김선명의 가족은 부모자식도 흩어져야 했습니다.)
어머니손등을 적신 나의 눈물은 핏줄을 나눈 혈육들의 집은 비록 갈 데가 못 되어도 나에게는 한생을 맡아 주는 웅심 깊고 뜨겁고 영원한 어버이 품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위로의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지옥에서 45년간 삶을 지탱해 온 아들을 만난 기쁨보다는 한배에 품어 키운 자식들 사이의 의리가 상하는 가슴 저미는 통한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는 결코 동생들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죄도 아니고 나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죄를 따진다면 미제와 남조선사회제도에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혈육의 가슴에도 서슴없이 칼을 박고 인정과 의리도 도덕도 무참히 짓밟는 남조선사회가 그들로 하여금 40여년 만에 사지에서 풀려 나온 형에게도 등을 돌려 대게 했던 것이다.
내가 죽음을 각오했기에 신념을 지켜 냈다면 그들은 혈연을 단절하는 것으로 자기를 살리려 했다. 나는 믿는 데가 있어야 죽을 각오도 하고 육체적으로는 죽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영생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면 나의 동생들은 이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피보다 더 진한 것이 수령과 전사와의 관계이고 수령의 품에서만 혈연의 피도 물보다 진할 수 있다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2000년 12월 6일, 인간의 온정과는 담을 쌓다 싶은 천애의 《고아》로 40여 년간을 살아오다가 선경같은 인덕의 품, 사랑의 품에 안긴 나는 이날 인생의 화창한 봄날을 맞았다. 다정한 이웃들과 동지들의 축복 속에 아내를 맞이하는 결혼식을 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45년간 지옥 속에서 이성을 모르던 이 《숫총각할아버지》에게 아득히 꺼져 버린 청춘을 안겨 주신 것이다. 여자라는 말을 들을 때면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우주인 같은 거리감을 느꼈고 어쩌다 여자들과 상종하는 때에는 어색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모걸음을 치던 《할아버지총각》이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멋쟁이 옷을 입고 훌륭한 결혼식상에 마주 앉고 보니 행복에 대한 실감에 앞서 그 어떤 신비의 세계를 체험하는 듯한 서먹서먹한 심경이었다.
신념의 강자로 말하자면 <고난의 행군>같은 전대미문의 시련속에 사회주의붉은기를 지켜 내고 극악한 제국주의의 고립압살과 혹심한 자연재해의 역경속에 강성대국을 안아 올리는 우리 조국의 전군, 전민 같은 신념의 최강자집단, 불사조집단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 또 있으랴.
마음을 의지할 기둥이 있을 때 정의를 위해 한목숨 기꺼이 내댈 억척의 각오도 생기며 투철한 결사의 각오를 안고 역경을 맞받아 나아갈 때 죽음도 물러 선다는것, 설사 그 길에서 죽는다 해도 한가문의 얄팍한 족보 아닌 부피 두터운 조국의 역사와 더불어 영생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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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의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동유럽 국가가 그 후 어떻게 변했는가? 2009.06.09일 한국일보 기사를 봅시다.
세계적 경제위기는 문자 그대로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선진국과 금융강국, 자원부국과 신흥 개발도상국 경제는 일시에 완전히 붕괴됐다. 국가파산이 선언됐고, 그에 따른 영향으로 정권도 바뀌었다. 최고 10% 가까운 고성장을 구가하던 국가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곤두박질쳤다.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해 고성장을 누리던 동유럽 정부들은 불명예 퇴진하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유럽연합(EU) 순회 의장국인 체코 정부는 지난달 의회 불신임으로 붕괴됐다. 중도 우파 성향의 미렉 토폴라넥 총리는 그 동안 4차례나 불신임 표결을 받으면서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해왔지만 경제위기 파고만은 넘지 못했다. 체코뿐만 아니다.
2009년 1월 유럽의 모범국가로 불리던 아이슬란드 연립정부가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라트비아, 헝가리 정부도 차례로 교체됐다. 라트비아 내각은 올해 2월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라트비아는 2004년 EU 가입 후 적극적인 외자 유치로 10%가 넘는 고성장을 구가하며 유럽의 ‘강소국’으로 꼽혔지만 지난해 4분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0.5%를 기록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보스니아, 그리스 등도 경제위기에 따른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
IMF 구제금융을 받을 경우 고강도 긴축재정으로 국민들 삶이 피폐해지고, 이는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남한의 주민을 만나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데 남한에서는 북한 주민을 만나고 오면 죄가 된답니다.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했다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만일 북과 남이 대결한다면 어느 쪽이 이기기를 바라는가? 라는 판사의 질문에 북에 다녀와 국가보안법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어느 피고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남쪽이 승리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답하면 감형이 되겠지만 남은 평생을 양심을 속인 고통 속에서 떳떳치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피고인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일 남한 주도로 흡수통일 된다면 많은 사람이 빨갱이로 지목 되어 많은 사람이 또다시 피를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기꾼 등의 범죄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되고 전국이 미국의 식민지 (자신이 자기나라에서 주인 노릇을 못하고 다른 나라가 대신 주인이 된 땅을 식민지라고 합니다. 한국은 군사 경제적으로 완전한 식민지입니다.) 로 되어 일본 개도 안 먹는 광우병 의심 소고기를 온 겨레가 먹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고 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북이 승리해서 통일 되면 살아도 살아도 차별이 극복되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 끊는 사람이 없고 대학까지 무상으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민족을 팔아먹었던 매국노들에게는 미국의 선전에 속은 거라면서 학습을 시켜 과오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흡수통일 한다면 북한 주도로 흡수 통일을 해야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아 되므로 좋다고 생각 했을 것입니다.
항일연군이 속산에 갇혀 배를 곯고 엄동설한에 떨고 있을 때 일제는 삐라를 뿌렸다.
어느 부대는 눈 속에서 길을 잃고 굶어 죽었다.
지금도 나날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투항하면 많은 상금을 주고 잘살게 해준다.
누구누구는 투항해서 아무벌도 받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제1로군 군장 양정우가 체포되었다.
이제 항일연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이런 종류의 삐라를 뿌려 무장 투쟁은 가망이 없다고 사기를 잃게 하려는 투항권고 선전을 많이 접하면서도 의지를 꺾고 끝까지 항일 무장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오직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한 목숨 받치기로 하고 불 땐 더운 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도 바라지 않고 배불리 먹는 다는 것도 바라지 않고 헤진 얇은 옷을 입고 차가운 비바람을 견디고 황량한 들판과 깊은 산속에서 뜨거운 피를 쏟기도 하며 조국광복의 미래를 등대로 간직하며 다가올 또 다른 전투를 치르기 위해 산속에서 뼈를 에는 듯 한 엄동설한을 보냈던 것이다.
빨갱이들은 대가리 찍어 죽여야 된다고 지껄이는 걸 볼 때마다 빨갱이 편에 서는 게 올바른 인간의 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위 빨갱이라는 사람들은 사상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참되고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중시하는 이것 하나만 봐도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은 휴머니스트이고 자칭 우익이란 매국노들은 주인을 모시는 폭력배에 불과합니다.
전 국민이 한 결 같이 수입을 반대하는 세계 어느 나라도 먹지 않는 광우병의심 소고기를 전체 국민에게 먹이려고 언론을 탄압하고 심지어는 헌법에 의해 독립된 사법부에까지 폭압을 가하는 폭력배에 불과 합니다.
침략자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항거하는 주민을 학살하여 우리나라의 절반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든 미국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무장을 갖추었건 안 갖추었건 우리민족이 우리 땅을 맘대로 왕래하는 게 침략이라고 반세기 이상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매국노들은 영어만 혀 꼬부리며 배울게 아니라 자기의 국어부터 똑바로 알기 바란다.
2010.02.19 경인일보는 월미도 폭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이란 1950년 9월10일 미군 전폭기가 월미도에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가해 당시 주민들이 대거 희생된 것을 말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3월, 월미도 폭격은 리차드 루블 제독의 해병대 항공단 제15항모전단 항공기들에 의해 월미도를 전소 또는 철저한 집중 폭격으로 모든 시설을 불태울 목적으로 발행했다고 규정지었다. 진실화해위는 100명이 넘는 주민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하고 한국정부와 미국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한국전쟁 당시 월미도 90번지 일대에는 45가구가 있었는데, 폭격으로 쫓겨난 뒤 동네를 군부대가 장악해 사용하면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시 월미도에는 600여명의 민간인이 살았으나 한미 양국은 어떠한 피해보상을 위한 공식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미군은 기지를 세우기 위해 민간인을 학살했으나 미군의 ‘월미도원주민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드물다.
공원 내 조성돼 있는 조형물에도 옛 월미도의 평화로운 풍경만이 전시돼 있을 뿐, 이 참혹한 살육의 현장은 인천상륙작전의 신화에 묻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월미도 원주민 거주 지역에 95발의 네이팜탄을 떨어뜨리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 폭격으로 월미도의 건물과 숲, 원주민 거주지가 완전히 파괴됐다. 목숨을 잃은 민간인 희생자만 1백여 명에 이른다.
이 억울한 죽음은 5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은폐돼 왔다. 국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은 꾸준하게 진실이 규명돼 왔지만 미군이 저지른 ‘월미도양민학살’ 같은 경우는 한국전쟁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월미도 원주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서서히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미뤄져 왔던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까지 이끌어냈다.
1950년 9월 10일. 하늘은 아주 맑고, 바다는 파랗게 반짝이는 초가을 새벽이었다.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주민들은 어딘가에서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동사무소 인근에 떨어진 네이팜탄이 몇몇 주민들의 사지를 찢어놓은 순간이었다.
이어 정용구(당시 35세)씨 집 위로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그 자리에서 정씨는 숨을 거뒀다. 이 폭격으로 마을은 산산이 부서졌고,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부상당한 주민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 숨졌다.
폭탄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아이를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파편이 몸에 박힌 사람들도 아픈 줄 모르고 도망쳤다. 하지만 전폭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기총사격을 가했다. 육안으로도 민간인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지만 총탄은 멈추지 않고 주민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의 깨끗한 얼굴에도, 순진한 처녀의 가슴에도 날카로운 총탄이 날아와 박혔고,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도 모두 쏴 죽였다. 야만이었다.
임인자(당시 15세)씨의 작은 아버지는 사촌 여동생을 오른팔로 안고, 할머니를 왼손으로 잡고 나왔는데, 몇 발의 총탄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폭격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어떤 이는 머리가 깨지고, 어떤 이는 복부에 구멍이 났다. 한인덕(65)씨는 “머리가 터져 하얀 것이 흘러내리던 한 청년이 그것도 모르고 살기 위해 달려가다 얼마 못 가 푹 쓰러졌다”며 몸서리쳤다.
미군의 폭격 당시 간조 때여서 물이 빠진 상태였다.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주민들은 갯벌로 몸을 숨겼다.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숲속에 몸을 숨긴 사람들도 탄환이 계속 날아오자 갯벌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갯벌에 닿기도 전에 마을길에서, 다리 인근에서 미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갯벌에 도착한 주민들은 개흙을 서로 몸에 발라주고 몸을 바짝 엎드렸다. 카멜레온이 천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색을 바꾸듯이 벌거벗은 몸에 개흙을 발랐다. 그러나 이곳에도 전폭기의 기총소사는 계속됐다. 갯벌을 뒤덮은 소금 거품이 이내 피로 뒤범벅이 됐다.
곧이어 2차, 3차 폭격이 이어졌다. 이 폭격으로 1차 폭격에서 폭파되지 않은 건물 서너 채까지 차례로 무너졌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왕국처럼 그렇게 월미도 원주민 마을은 땅속으로 완전하게 꺼져버렸다.
마을 가장자리에 살고 있던 전천봉(75)씨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숨어 살아 남았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기자의 취재 수첩에 비행기와 네이팜탄이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그려주기도 했다.
“비행기 한 대에 네이팜탄 2발이 실려 있었는데, 비행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다 선회하더니 마을 한가운데에 폭탄을 떨어뜨렸어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빠져 나올 수 없었지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거든요. 마을 가장자리에 살던 주민들이 놀라 도망치자 비행기가 기관총을 쐈어요. 진짜 참혹했죠. 민간인인줄 알면서도 총을 갈긴 거예요. 적군도 아니고 민간인인데. 저는 아버지와 함께 갯벌에 몸을 숨겼어요. 거기에서 비행기가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엎드려 있었지요. 오후가 되니까 폭격이 멈췄어요. 아버지는 작은 배로 고기를 잡고 살았는데, 물이 들어오자마자 그 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갔어요.”
나룻배를 타고 영종도로 피란을 간 주민들은 황금빛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피눈물을 뚝뚝 흘려야 했다. 당시 22살이었던 윤정여씨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기관총에 맞은 많은 주민들이 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다른 주민들은 갯벌에 물이 불어나자 뭍으로 올라와 나무 그늘에 숨었고, 어스름 녘이 돼서야 마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종일 굶었던 주민들은 먹을거리가 폭격으로 다 타서 텃밭의 감자를 캐 먹었으며, 언제 또 폭격이 들이 닥칠지 몰라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청했다.
송도에 있는 외갓집에 머물던 정용구씨의 아내는 폭격 소리를 듣고 남편을 찾아 월미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생지옥이 따로 없는 마을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 정용구씨를 잃은 정지은(65)씨의 말이다.
“어머니께서는 비행기가 월미도를 폭격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찾아 달려갔어요. 도착하니까 집은 다 타버리고, 여기 저기 널린 시신들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 있었죠. 어머니는 여러 시신의 입을 열어보고 나서야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치아가 안 좋아서 금이빨을 하나 했는데, 거기에 별표가 있었거든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불로 말아서 가묘를 하고 월미도에서 빠져 나왔어요.”
9월 11일. 최초 폭격이 벌어진 다음날 월미도는 잠잠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슬프고도 슬픈 하루를 눈물로 보내야했다. 가족을 잃은 이들은 허물어진 건물에서 불에 탄 시신을 찾아 땅에 묻었고, 길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들의 시신도 수습해 가묘를 만들었다.
심장이 터질지는 것 같은 분노를 억누르는 것도 잠시, 12일과 13일 다시 폭격이 시작됐다. 전투기 소리에 놀란 주민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흩어져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네이팜탄이 떨어진 곳의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나갔고, 몸뚱이에는 살덩이만 남았다. 어떤 이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렇게 모두 죽어갔다.
9월 10일. 미군의 전폭기 14대가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지역에 투하하고 월미도 원주민들을 향해 로켓포와 기관포를 발사했다.
11일에는 태풍 때문에 미 항공모함이 일본 사세보로 귀항해 폭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일과 13일 다시 출격해 10일과 유사한 폭격으로 원주민 마을을 지도에서 없애 버렸다.
9월 15일 드디어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졌다. 당시 월미도에는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했거나 폭격으로 부상당했던 원주민, 인민군의 부역을 했던 인천지역 민간인, 인민군들이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월미도를 한 시간 만에 점령했다. 이 사실은 10일 미군의 폭격을 피해 도망 나온 원주민들의 증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하인천 쪽 다리 끝(당시 원양냉동)에 판잣집을 짓고 고향에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했다. 하지만 미군이 월미도 접근을 막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유청시(69)씨는 “월미도에서 도망 나온 뒤 주민들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미군들은 바닥에 총을 갈기면서 위협해 들어갈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날 이후부터 원주민들은 섬에서 나오거나 들어가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12일과 13일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한인덕씨도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등 특별한 관계의 사람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전쟁이 나서 대부분 피란 갔지만 폭격이 있기 전에 모두 돌아와 있었어요. 남의 집에 있는 것도 삼사일이잖아요. 인민군이 점령한 뒤 단 한 번도 해코지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예 피란을 가지 않았습니다. 예전처럼 120가구 600여명의 주민이 모두 살고 있었다고 봐야죠. 하지만 아직까지 원주민 30여 가구에 대한 소식은 없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죠. 5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폭격으로 온가족이 몰살당한 게 분명해요.”
이범기(77)씨는 “미군이 월미도에 있는 사람들을 죽인 뒤 시체를 매장하지도 않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는 소문은 들었다”고 말했다.
첫 폭격이 있던 10일 미군의 항공공격보고서에 따르면 전폭기들의 폭격대상은 인민군 주둔지가 아니었다.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집중폭격’ 또는 ‘전소’(burn out)였다. 여기서 ‘집중폭격’(Saturation Bombing)은 적이 있는 일정지역을 목표로 설정해 집중적으로 무차별 폭격한다는 뜻.
혹시 미국은 월미도에 민간인이 거주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존자들은 “미군은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해방 후 월미도 민간인 마을 10m 앞에 있던 일본 해군기지에 미군 기지를 설치했어요. 1949년 일본으로 일시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 진주해 있었지요. 인천상륙작전 후 다시 월미도 해군기지에 들어왔던 미군 부대원들이 당시 철수했던 바로 그 군인들이에요. 미군기지에서 일했던 월미도 주민들이 말해줘서 동네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어요.”
한인덕씨는 폭격 당시 미 해군을 돕는 한국 군인들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월미도를 폭격을 할 때 한국 간부급 군인들이 관여했다”면서 “이들이 월미도 지형이나 밀물, 썰물의 조수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내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군인들은 미군이 월미도 민간인 거주 지역을 폭격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인한 것이 된다.
이 같은 정황으로 미뤄볼 때 미군의 월미도 폭격은 인민군 살상이 아니라 월미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문서에도 ‘월미도 민간인 거주지에는 군인이 안 보인다’는 단편적인 보고 외에는 적병에 대한 인적 전과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미군은 왜 원주민들까지 학살하면서 월미도를 초토화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정지은씨의 말에서 그 의문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었다.
“미군은 인민군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월미도 모든 지역에 폭격을 했어요. 하지만 민간인 거주 지역 가까이에 있었던 해군해안경비대 시설은 폭격하지 않았지요. 미군 기지로 사용하기 위해서요. 그 당시 갯벌을 건너 몰래 마을에 가보았는데, 미군들이 폭격 희생자들을 가매장해놨던 곳을 모두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기지를 세워놓았더라고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 없이 쓰레기처럼 취급한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 아버지 묘지도 없이 평생 살아 왔어요.”
한인덕씨도 미군은 월미도에 자신들의 기지를 세우려고 민간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월미도 원주민들을 죽인 건 두 가지 이유에요. 인천상륙작전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다 미군 기지를 만들려고 그런 거지요. 아무리 그래도 살아난 사람은 살려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모두 다 죽였어요.”
월미도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원주민들의 삶은 비참했다. 판잣집에서 기거하며 풀뿌리와 죽으로 끼니를 연명했다.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정지은씨는 더욱 그러했다.
“인천상륙작전 뒤 송도에 피란을 갔어요. 이곳에 주둔해 있던 미군들은 밤이 되면 민간인 마을로 내려와 부녀자들을 강간하러 다녔지요. 우리는 문도 없는 방에서 거적 대기를 걸어놓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밤에 군인들이 나타나면 삼남매를 막 꼬집었어요. 군인들은 애들 셋이 우니까 그냥 돌아가곤 했지요. 머리맡에다가 낫을 갖다놓고 자기도 했고요.”
“월미도 폭격은 미군의 계획적인 살인입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고요……. 인명피해, 재산피해는 두 번째에요. 한국전쟁 때 우리만 피해본 게 아니니까 보상도 원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옛날부터 살아왔던 고향인데 왜 우리가 그곳에서 살 수 없느냐는 겁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도 원주민 거주지에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대토를 내 주었고, 1942년 월미도공원 조성을 위해 원주민 거주지를 철거했을 때도 인근에 2,400평을 마련해 옮겨 살게 했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악랄했다고 해도 우리 정부처럼 이렇지 않았어요.
인천상륙작전의 신화에 감춰진 월미도원주민학살
국제인도 법, 전쟁 법에는 민간인 면제규범이 있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규범에 따라 공중폭격을 할 때는 무고한 피해자의 발생을 막기 위해 작전 실행 전 사전 대피 경고를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미군은 아무런 조치 없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그 땅에 기지를 세웠다. 천인공노할 ‘전쟁범죄’다.
미군의 월미도원주민학살을 인천상륙작전의 예비작전으로 규정하면서 진실규명과 보상에 대한 책임소재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은 점이다. 이에 따른 추가조사와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희환 인천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냉전적인 대결의식에 사로 잡혀 한국전쟁의 역사가 편향되게 기술돼 왔다. 면서 인천상륙작전은 이 나라를 살리는 대작전으로 신앙화 돼 있지만 그 이면에는 무자비한 민간인의 학살과 희생이 있었다. 고 지적했다.
이희환 인천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은 “미흡하지만 이번 진실규명은 외세가 개입한 전쟁이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면서 미국은 무 대응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성의 있는 조사와 사과, 그에 따른 배상조치를 철저하게 시행해야 한다. 고 덧붙였다.
2010.2.17일 전주지법 형사1단독 진현민 판사는 학생들을 데리고 '남녘 통일 애국열사 추모제'에 참가하는 한편 이적 표현물을 소지하고 이를 각종 행사에서 전파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기소된 전교조 소속 전 교사 김형근(51)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대해 기생충들은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빨치산과 싸워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킨 사람들을 친미주의자로 폄하하고, 어린 학생들에게 편향된 가치관과 그릇된 역사관을 심는 게 통일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빨치산은 대한민국 체제에 맞서 저항했던 세력이다. 이를 훌륭한 분으로 추어올리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반국가단체(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이라고 하는 것은 항일 빨치산을 가리킨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벌였던 항일 빨치산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해방 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해서 싸운 민중들을 기생충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빨갱이로 몰았고 그들을 빨치산이라 부르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 선생과 우리 2천만 동포가 다 빨치산이다.
사회주의는 인류 공영(共榮)의 이상 실현을 목표로 합니다. 즉, 우리나라 건국이념인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과 맥을 같이하고
주체사상의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고 하는 것은 우리 동학의 교리인 사람이 곧 하늘이다. 즉,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맥을 같이 합니다. 주체사상은 어떤 사상이나 이념보다도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사상입니다.
이와 같은 주체사상을 수령이라는 하나의 개인을 우상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들판에서 맹수를 만난 경우 맘에 안 맞더라도 합심해야 될까요. 맘에 안 든다고 따로 흩어져야 될까요?
기생충들은 미국이라는 세계최대의 살인마는 그들 뇌 속에 지워버리고 북한에 대해서 독재니 우상화니,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느니, 인권을 유린한다느니, .... 하면서 개처럼 짖어댑니다.
숭배할 영웅이 많은 민족은 없는 민족에 비해 자긍심이 높습니다.
이승만 괴뢰부터 줄곧 숭배할 지도자가 없는 남한 민중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 주위에는 1990년대에 유행했던 철지난 유행가를 오늘도 불러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역사의 커다란 실험을 지난 70년 동안 치렀고 종말을 고하고 막을 내렸는데 아직도 마르크스의 잘못된 이론이 북한 땅에서만 가능한 잘못된 우상으로 전이되어서 마지막 고통스런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북한 땅에만 있다는 망상을 노래처럼 주절거린 것인데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무식할 지라도 중국 공산당은 아직도 세계 인구의 5분의1인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깨닫기 바랍니다.
러시아도 학교 무상급식을 하는 등 아직도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빈민들의 따뜻한 햇볕이 되고 있습니다.
사상이나 제도는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사상을 절대시하여 사상이 다르다고 부모형제간에 싸워서는 안 됩니다. 사상이나 제도를 위에 두지 말고 인간 즉, 사람을 위에 두어야 합니다.
옛날 노비에게는 글을 깨우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한국이 자신을 섬기게 하려고 핵주권 미사일 주권을 앗아 갔습니다. 마치 옛날에 노비가 글을 깨쳐 주인의 자리를 넘보는 형국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은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 위해 우리의 자주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 한국국민은 조국이라는 크나큰 존재를 강탈당하였으나 너무 오래도록 그대로 살아와서 이성과 감각이 마비가 와서 느끼지 못한 채 원래 노예였거니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힘이 강대한 미국이지만 결코 신이 아닙니다. 흥망성쇠의 진리를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나라일 뿐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갈대처럼 나약하지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한 존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약하지만 주는 마약을 곧이곧대로 받아먹지 말고 정신을 차려 사고할 수 있게 의식을 회복한다면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미래의 주인,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갈라놓고 반쪽을 복속시켰다. 이유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니 뭐니 하는 체제를 채택하는 것은 그 나라 인민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데 제 놈이 뭔데 제 맘대로 우리의 권리를 짓밟는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면 제 나라 국민이 선택하지 않도록 해야지 남의 나라 국민의 선택권까지 빼앗는 것인가?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짓뭉개 버린다는 되먹지 못한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즉, 도둑이 들어온다고 남의 땅에 쳐들어와 담을 쌓는 날강도 짓을 하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뭐라 해도 침략자인 것이다.
미제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노력은 1945년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때부터 의병들은 많은 피를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로써 65년째입니다.
의병들 중에는 민족주의 이외에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상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악이고 미국의 자본주의가 선이라는 돼먹지 못한 사기는 그만 쳐라. 미국 민주주의 중국 공산당에게 쫄딱 망하고 2009.1월 유럽의 모범국가로 불리던 아이슬란드 연립정부가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는 물론 그리스 등의 유럽의 나라들도 망하였다.
미국은 유엔을 시켜 군사적 침략을 하고 IMF를 시켜서 경제적 침략을 하는 음모와 사기의 왕국입니다.
한국을 접수해서 말아먹고도 양이 안차서 경제가 오그라들어가 오죽 다급했으면 기르던 충견 일본까지도 도요타 사건을 계기로 잡아먹고 있겠는가?
나는 우리민족을 계승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눈부신 우주국방과학에 놀라 미 팽창주의가 평화회담장에 끌려나와 결국에는 제 소굴로 흉악한 살인 무기들을 거두어들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수천, 수만 명, 수십만 명 아니 이보다도 훨씬 많은 수백만 명의 부모형제를 죽인 원수를 갚기 전에 미군은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갈 것입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내 남편, 내 아들, 내 오빠, 그리운 그 사람을 생이별시키는 고통을 더는 지속시키지 말고 너희 나라로 이제라도 무기를 거두어 가는 것이 도리이다.
해방이 되어 나라에 있던 일본군이 무장해제 됐으나 미군이 일본군이었던 자들에게 다시 무기를 지급하였다.
우리는 해방 후 미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은 친일매국 반역자 치하에서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은 주인의 지위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었다.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한 해방은 김일성 항일의병장군을 모시는, 형제에게 총을 겨누는 외국의 무장군인들이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염원에 따라 100년 식민지 남조선을 지옥에서 해방하고 도탄에 빠져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남조선 인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김정일 장군께서 해방구역인 북한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삼아 대를 이어 과업을 수행하고 계십니다.
미국이 내세우는 정의가 뭐가 됐든 우리민족의 이익에는 배치되었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의를 세우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의를 세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