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뿌린 불행한 씨앗, 3대에 걸친 베트남 가족의 뒤틀린 운명

라이따이한은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의 사안입니다.
92년 한-베트남 수교 이후 시작된 투자열기 속에서 베트남 곳곳에는 한국인의 ‘무책임한 씨앗’들이 다시 뿌려지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편의와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베트남 여성 현지처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생명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베트남전 기간인 60∼70년대에 태어난 ‘라이따이한’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라이따이한’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한겨레21>은 베트남 종전 24돌을 맞아 호치민(구 사이공) 현지취재를 통해 신라이따이한 문제를 집중조명합니다. 그 가운데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수치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사례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 종전 2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물지 않은 라이따이한 가족들의 상처를 되돌아보고, ‘라이따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의 허상도 폭로합니다. ‘신라이따이한’이 성년이 될 10여년 뒤쯤엔 이 문제가 한국과 베트남간의 새로운 이슈로 등장할 가능성도 높다는 게 이번 취재의 우울한 결론입니다. - 편집자 -
“아빠가 누구야?!”
어머니 윈티 팟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대답이 없다. “말 좀 해보렴, 응? 괜찮아… 애 아빠가 도대체 누구니.” “……” 그러나 미 쭈는 고개를 묻은 채 계속 아무런 말이 없다. 열다섯살짜리 이 소녀는 결국 한 시간 내내 눈물을 펑펑 쏟기만 했다.
임신을 알자마자 떠나버린 아버지

며칠 전부터 이상했다. 아이의 배가 자꾸 불러보이는 거였다. 그럴 리 없다고 도리질을 쳐봤지만, 볼 때마다 아이의 배는 더 불러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옷을 갈아입던 아이를 불러세웠다. 바닥에 눕히고 웃옷을 황급히 들췄다. 아이의 배엔 복대가 질끈 동여매져 있었다. 배를 쓸었다. 덩이 같은 게 느껴졌다. 가슴은 검었다.
임신 6개월. 미 쭈는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애 아빠는 한국인이었다. ‘옹 채’(베트남어로 ‘Mr 채’라는 뜻). 어머니도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윈티 팟은 급히 ‘옹 채’를 찾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다. 50대 중년인 ‘옹 채’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단지 한번뿐이었다. 임신할 줄은 몰랐다. 100달러를 주겠다. 낙태를 해라.” 그는 돈을 찾아오겠다며 떠났다.
그러나 그럴 순 없었다. 윈티 팟은 마침 귀가한 아들과 함께 ‘옹 채’집으로 향했다. 임신 6개월 상태에서 아이를 지운다면, 우선 열다섯살인 딸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옹 채’의 집으로 간 모자는 그의 여권을 빼앗았다. 베트남을 떠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옹 채’는 여권을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옹 채’는 오지 않았다. 윈티 팟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떤선넛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옹 채’는 이미 베트남 항공 서울발 VN938편으로 뜬 뒤였다. 96년 10월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99년 5월. 윈티 팟(49)의 집엔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 세살배기 방울이. 베트남 이름은 미 틴이지만, 한국인 선교사가 아버지 성을 따 ‘채방울’이라고 지어주었다. 방울이가 없다면 엄마와 할머니는 웃을 일이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방울이를 보면서 가족들은 그나마 위안을 느낀다. 하지만 방울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아버지가 없어서만이 아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 때문도 아니다.
두돌하고도 2개월. 방울이는 97년 3월4일 태어났다. 한참 귀엽게 재롱을 피울 때다. 이때쯤 되면 보통 아이들은 “아빠, 엄마”는 물론 짧은 말을 배운다. 마구 뛰어다닐 때다. 그런데 불행히도 방울이는 그렇지가 못하다. 방울이는 스스로 앉지도 못한다. 서지도 못한다. 누웠을 때 뒤집기만 할 뿐이다. 말도 못한다. “으으으으… 으으으….” 무슨 말로 얼러도 방울이는 그저 “으으으”만 할 뿐이다. 팔과 다리는 자꾸 뒤틀린다. 눈은 맑은 호수 같지만 초점이 없다.
방울이를 진찰한 의사는 ‘뇌성마비’라는 진단을 내렸다. 임신기간중에 약을 함부로 먹어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 듯하다는 거였다. 일주일에 세번씩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하지 않으면 상태가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달 병원비는 50만동(약 5만원). 호치민 브이 티 수언 거리의 빈민촌에서 단 한평짜리 방에 네 식구가 세들어 사는 형편에 50만동은 한달 생활비와 맞먹는 액수다. 방울이의 엄마 미 쭈(18)는 학생이다. 출산 직후엔 학교를 쉬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었다. 오전엔 애를 보지만 오후엔 응옥꾸인 보통학교에 나간다. 모든 부담은 할머니 윈티 팟에게 돌아온다.
이 비극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윈티 팟은 베트남전쟁을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그리고 한국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OO(61). 1969년부터 70년까지 윈티 팟과 살았던 한국 남자 이름이다. 그는 미군과 한국군을 지원하는 미국계 회사의 기술자였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채 안 돼 회사와의 계약기간이 만료됐다면서 훌쩍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당시 윈티 팟은 홀몸이 아니었다. 그때 때어난 아이가 방울이의 이모인 이근순(베트남 이름 응엔 티 뉴항·28)이다.
그런데 95년, 거짓말같이 남편이 나타났다. 25년 동안 생사를 몰랐던 남편이 ‘베트남 가족 방문’이라는 이름으로 눈앞에 찾아온 것이다. 한국 식당에 근무했던 윈티 팟이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남편을 찾아달라”는 거였다. 그래도 그런 꿈이 실현될 줄이야. 25년 만의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윈티 팟은 그 사람에게 몇번이나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고마운 사람’의 이름은 채OO(54). 바로 ‘옹 채’였다.
그 이후 ‘옹 채’는 방울이 할머니는 물론 엄마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보였다. ‘옹 채’는 가난한 방울이 가족에게 돈도 자주 빌려줬다. 다음은 방울이 엄마 미 쭈가 당시 호치민 주재 한국영사관에 보낸 진정서 내용. “그날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채OO씨는 제게 학비를 빌려주기로 했고, 그는 돈을 가지러 방으로 올라가자고 하였습니다. 제가 채OO씨를 따라 방으로 올라갔을 때, 그가 방을 잠그고 말했습니다. ‘나랑 잠깐만 자면 돼. 그러면 100달러를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을 거야.’ 그때 저는 동의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제 옷을 벗기고 침대로 밀어눕혔습니다.”
92년부터 사업을 위해 베트남에 왔던 ‘옹 채’는 지금 한국에 있다. 임신 사실을 안 직후 가족들은 호치민 공안청에 ‘옹 채’의 여권과 함께 사건을 접수시켰다. 그럼에도 ‘옹 채’는 무사히 한국에 갔다. “베트남에서 미성년자와 잤을 경우 엄청난 중형을 받게 돼 있다. 하지만 베트남은 모든 게 돈으로 해결된다. 공안에 뇌물 안 주면 어떤 일도 해결 안 된다.” 방울이 가족을 돕고 있는 응엔 홍 쿠앙(41) 목사의 이야기다.
외국의 좋은 병원에서 치료받는 꿈

방울이 가족은 한국으로 가는 인편에 ‘옹 채’에게 전해달라면서 방울이 사진을 건넸다. 양육비를 보내달라는 말도 전했다. 어떻게 하여 연락이 닿았는지 ‘옹 채’는 97년 네 차례에 걸쳐 80여만원을 보내줬다. 98년부터는 이것마저 끊겼다.
“우리는 그를 이미 용서했다.” 방울이 할머니 윈티 팟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윈티 팟은 가족의 절망을 2년 전부터 신앙의 힘으로 이기고 있다고 했다. “난 하나님을 섬긴다. 그래서 고소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불행한 병에 걸렸는데, 이를 돌봐주지 않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방울이를 진단한 의사는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외국의 좋은 병원에서 가급적 빨리 정밀진단을 받는 것이다. 방울이 가족이 진정으로 열망하는 일이다.
정상이 아니지만 방울이는 해맑기만 했다. 인터뷰 내내 방울이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만 했지만, 방울이의 재롱 속에서 가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방울이는 말은 못해도 “뽀뽀”라고 말하면 입술을 갖다댔고, 방긋방긋 입을 벌렸다.
방울이 할머니는 70년대 베트남전쟁 속에서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20여년이 지난 뒤 방울이 엄마는 외국자본의 투자열풍 속에서 또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2대에 걸쳐 이어진 모녀의 쓰라린 가족사의 틈에서 태어난 방울이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그렇게 웃기만 했다.
‘신라이따이한’ 신드롬
베트남 교민사회 가족전화 폭주 국내언론 상대 ‘명예훼손’ 대응 움직임… “자성이 먼저” 따가운 시선도

“여보, 당신을 못 믿겠어요.”
호치민에서 사업을 하는 유아무개(42)씨는 얼마 전 서울의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일상적인 안부전화가 아니었다. 부인은 뭔가 미심쩍어하는 듯했다. “베트남의 한국 남자들 중 현지처 없는 사람이 없다는데… 혹시 당신도….” 유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런 일 없어.” 그러나 부인은 계속 못 믿는 눈치로 물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 그래요. 베트남에서 혼자 사업을 한다면 분명히 현지여자를 데리고 살 거라고요. 창피하고…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전화설득에 실패한 유씨. 결국 그는 불안감을 씻지 못하는 부인을 달래기 위해 7월중 한국을 다녀가야 했다.
“최초 정보제공자를 색출하라”

(사진/문화방송의 <PD수첩>.)
베트남 한인사회가 뒤숭숭하다. 호치민과 하노이의 교민들은 “요즘처럼 한국 가족들의 전화에 시달리는 경우가 드물다”고 입을 모은다. 정확히 말하면 혼자 사는 남성 교민들에게 한국 부인들의 전화가 폭주하는 것이다. 부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나 몰래 현지처 데리고 사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한겨레21>이 258호(99.5.20) 표지이야기 ‘신라이따이한 방울이의 비극’을 통해 베트남 현지처 문제를 제기한 것에서 시작됐다. <한겨레21>은 이 기사를 통해 “92년 한-베트남 국교수교 이후 들어온 한국 남성들이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있다”며 그 구체적인 사례들을 처음으로 전했다. 이때부터 베트남 한인사회는 조금씩 술렁거렸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방송사들이 앞다퉈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문화방송이 지난 6월15일 <PD수첩>을 통해 ‘신라이따이한 방울이를 아십니까?”를 방영했고, 뒤이어 7월1일 한국방송공사의 <추적60분>이 ‘버려진 한국의 아이들- 꼬레아리또와 신라이따이한’을 보도했다. 우루과이와 베트남의 한국인 혼혈아를 취재한 내용이었다. 또한 다큐멘터리 전문 케이블TV Q채널도 7월16일 방송한 <아시아리포트>를 통해 ‘한국이 버린 아이들- 신라이따이한’을 내보냈다. 이와 관련해 <호치민 한인회보>는 “근래와 같이 국내언론이 집중적으로 베트남을 취재하는 일은 한-베트남 재수교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고 보도할 정도다.
그런데 이채로운 일은 호치민 한인회가 이러한 국내언론의 보도에 대해 ‘왜곡·과장’이라고 규정하면서 대책마련에 나선 것이다. <호치민 한인회보> 7월5일자는 이 문제를 6쪽에 걸쳐 다뤘다. <호치민 한인회보>는 “국내언론들이 베트남을 오가는 사람들은 전부 현지에 현지처를 두고 있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사람들인 양 그리고 있다”며 “베트남 한인들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와 오해를 심어주고 우리에게도 불명예의 고리를 채우고 있다”고 격분했다.
호치민 한인회는 7월12일 한인회 2층 영화관에서 교민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화방송 <PD수첩> ‘신라이따이한 방울이를 아십니까?’ 60분 테이프 시사회를 가졌다. 교민들은 시사회를 마친 뒤 대책회의를 통해 일부 방송사를 상대로 정식 제소절차를 밟고, 보도 내용에 항의하는 교민들의 연대서명도 받기로 했다. 호치민 한인회장 이순흥씨는 이날 대책회의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모두들 분개했다. 특히 방울이 가족(쪽기사 참조)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강간당했다는 말도 거짓말일 거라는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그 여자 집안 퀄리티가 원래 낮다. 안 그러면 어떻게 돈 빌려오라고 딸을 대신 보내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는 참석자들이 오히려 방울이의 아버지 채OO(54)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현지처가 많다”고 발언한 사람들은 교민사회 내부에서 ‘왕따’가 되는 일까지 생기고 있다. 호치민에서 식당을 하는 조아무개(64)씨는 “진짜 그렇게 현지처가 많냐”는 <PD수첩>팀의 질문에 무심코 “네 많이 있죠. 거의가 다 살다시피 하죠”라고 대답한 것이 실수였다. 화면에서 얼굴도 가리고 음성도 변조했지만 그의 출연사실이 알려지고 만 것이다. 지금 그의 식당엔 손님이 거의 끊겼다고 한다. <한겨레21> 취재과정에서 “한인들의 30%가 현지처를 두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취재원 역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또한 ‘마녀사냥’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한겨레21>에 최초로 제보한 사람이 누구냐. 그 정보제공자를 색출해 혼쭐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돈다는 것이다.
물론 현지처는 호치민 교민사회 ‘일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호치민 교민 전체를 싸잡아 그런 의심을 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나이키신발을 만드는 한-베트남 합작수출공장인 태광비나의 황철진(49) 총무부장의 걱정도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 공장에 한국인 관리직원이 54명이다. 그런데 ‘신라이따이한’ 보도가 계속되면서 사기가 말이 아니다. 우리 공장 사람들은 공장에서 기숙하느라 평일엔 외박도 금지돼 있다. 현지처? 말도 안 된다.” 태광비나는 한국 가족들에게 곧 “아무 걱정 마시라”는 통신문을 보낼 계획이다.
극소수 교민의 문제?
그럼에도 호치민 한인회를 중심으로 한 ‘명예훼손 대응’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부 교민들의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호치민 근교에 거주하는 한국인 선교사 최아무개(40)씨는 “호치민 한인회가 현지처 보도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것은, 한인회 구성이 자영업자 중심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지처 문제가 혈혈단신 사업을 위해 베트남에 건너온 소규모 투자자들에게서 빈발하는 탓이다. 호치민에서 5년째 살고 있는 40대의 한 중년여성은 “현지처는 결코 극소수 교민의 문제가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는 “명예훼손에 대한 대응보다 교민사회의 자성이 먼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호치민 거리에서 베트남의 어린 여자들과 다니는 한국 노인네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난 여자로서 엄청나게 분노했다. 몰지각한 남성들 정말 반성 좀 해야 한다.” 호치민대에서 유학중인 20대의 한 남성 유학생도 “일부 교민 어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한인회 차원에서 최소한 신라이따이한 가족에 대한 모금운동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명예훼손에 대한 서명부터 받는다니….”
베트남의 현지처 문제는 우리의 치부다. 그러하기에 대다수 교민들은 <한겨레21>과 잇단 방송의 ‘신라이따이한’ 보도를 보면서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수치심을 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일부의 사례를 놓고 왜 침소봉대하느냐”며 흥분하는 일일까, 아니면 냉정하게 현실을 돌아보는 일일까. ‘신라이따이한’은 현실이다.
방울이가 한국에 못 오는 사연

방울이 엄마 미쭈(18)는 요즘 꿈에 부풀어 있다. 두돌이 지났지만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방울이가 한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지난 258호를 통해 한국인 중년남성과 베트남 소녀 사이에 태어난 장애아 방울이의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사회복지법인 ‘한국사랑밭회’(회장 권태일)가 방울이 치료를 위해 나섰다. ‘한국사랑밭회’는 아산재단 서울중앙병원 무료진료팀으로부터 방울이에 대한 무료치료 약속을 받은 상태다. 서울중앙병원 무료진료팀 이덕자 계장은 “모든 준비가 돼 있다. 방울이 가족이 서울에 오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방울이를 진료한 호치민의 쩌라이병원쪽에서 방울이에 대해 간질과 뇌성마비라는 진단서를 보내왔지만 베트남 진료수준이 한국의 60∼70년대 수준이라 재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방울이 가족이 한국에 오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한달 넘게 여행수속을 밟고 있지만, 언젠 끝날지 장담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들 가족이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베트남이라는 곳이 외국 가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탓이다.
<한겨레21> 보도 당시 방울이는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방울이의 할머니 윈티 팟(49)은 20년 넘게 호치민에서 거주자신고도 안 한 채 살아왔다고 한다. 결국 그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방울이 출생신고를 하고, 윈티 팟의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20년간 내지 않은 세금을 전부 물어야 했다. 거기에만 400만동(40만원)이 들어갔다. 윈티 팟은 지금 이 수속을 밟느라 고향인 푸옌성에 3주째 내려가 있다. 베트남 중부지역인 푸옌성은 호치민에서 기차로 12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다.
다음 문제는 여권을 만드는 일. 윈티 팟은 푸옌성 출입국 관리사무소에 한국사랑밭회에서 보내준 초청장을 제출했다. 호치민 한국 총영사관의 공증을 받아 베트남어로 번역해서 보낸 것이다. 그랬더니 한국어 원본 사본을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호치민 영사관쪽은 한국어 원본을 다시 공증해서 푸옌성 출입국 관리사무소쪽에 팩스로 넣어주었다. 푸옌성 출입국 관리사무소쪽은 이번엔 한국어 원본 사본에 찍힌 한국사랑밭회와 한국 총영사관쪽의 도장에 시비를 걸고 나왔다. 베트남어로 번역해달라는 것이다. 영사관쪽의 협조를 받아 이것도 해줬다. 그러나 잡다한 주문은 계속됐다. “팩스로는 안 되겠다. 사본을 다시 우편으로 보내달라.” 쩌라이병원에서 공식적인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요구도 했다. 그러나 쩌라이병원쪽은 개인에게는 공식 진단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뒷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해외여행이 흔치 않은 베트남에서, 방울이 가족이 치료를 위해 한국에 간다고 하자 부자인 줄 알고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다.” 방울이 가족을 돕고 있는 한 교민의 이야기다. 방울이부터 방울이 할머니까지 세 사람의 공식 여권 발급비용만도 무려 600달러가 든다고 한다.
여권이 나온다 해도 장애물은 또 있다. 한국사랑밭회는 방울이 가족의 여행편이 확보되지 않아 발을 구르고 있다. 한국사랑밭회는 국내 항공사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왕복항공편 협찬을 의뢰했지만 모두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울이 한국에 오다
서울중앙병원서 무료 약물·재활치료… “걸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

창 밖엔 한강이 흐른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이다.
미쭈(18)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선반 위의 텔레비전으로 눈길을 돌린다. 개그맨들이 나왔는지 연신 웃음이 터진다. 무슨 말들을 하는 걸까.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옆 침대에선 엄마 윈티팟(49)이 칼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엔 방울이가 있다. 정맥주사를 꽂은 채 미쭈를 빤히 쳐다보는 방울이.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아산재단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62병동. 방울이 가족이 이곳에 온 것이다. <한겨레21> 258호 표지이야기 ‘신라이따이한 방울이의 비극’ 보도 이후 5개월 만에 이뤄진 일이다. 당시 기사에 소개된 대로 방울이는 미쭈가 한국인 중년남성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다. 두돌하고도 7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어서거나 걷지 못한다. 뇌성마비와 간질의 천형을 안고 태어난 탓이다. 사회복지법인 ‘한국사랑밭회’의 주선으로 지난 10월12일 한국에 온 방울이는 앞으로 적게는 두주, 많게는 한달간 서울중앙병원에서 무료치료를 받을 예정이다.
방울이는 입원 뒤 뇌파 검사와 자기공명영상장치(MRI) 검사를 받았다. 방울이 주치의인 서울중앙병원 소아과 의사 고태성씨는 “진단결과 수술적용 대상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약물치료가 주된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간질발작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더불어 재활치료가 함께 이뤄진다. “이대로 놔두면 근육·뼈·관절이 더욱 약해져 평생 누워지낼 확률이 100%다. 신경과 근육을 자극해주는 재활훈련이 필요하다.”
가족들도 방울이의 완치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서울중앙병원쪽도 마찬가지다. “지금 목표는 상태를 한 단계 호전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걸어다닐 정도까지 만들어준다면 대성공이다.” 주치의 고태성씨의 말이다. 뇌성마비와 간질에 대한 치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신경이 굳어지기 전에 해야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놔두면 평생 누워지낸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좋은 한국사람들도 많은데….” 방울이 할머니 윈티팟은 말끝을 잇지 못했다. 한국에 오기 위해 석달간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이 생각났는지도 모른다. ‘한국사랑밭회’로부터 초청을 받은 이후, 여권과 비자발급 등을 위해 호치민과 고향인 푸옌성을 오가며 갖가지 ‘더러운 꼴’을 경험했던 것이다. 출입국 관리사무소쪽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나왔다고 한다. “돈도 1천만동(우리돈 100만원) 이상 들었어요. 저희 형편에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인데… 빚을 지고 말았지요.”
그래도 모두가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 같아 기뻤다. 입원 첫날인 10월14일엔 하루종일 기자들이 들락거렸다. <한겨레> <국민일보> <경향신문>이 방울이의 사연을 기사화했고 문화방송 <화제집중 6시>팀과 <주부생활> <건강365>팀이 취재를 다녀갔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로 인해 방울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첫날 받기로 했던 뇌파 검사가 취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첫날뿐. 그 다음날부터 병실 분위기는 도로 썰렁해졌다. ‘한국사랑밭회’ 관계자만 종종 들를 뿐, 누가 그들을 찾아올 것인가. 방울이의 아버지 채OO(54)씨가 꽃다발이라도 들고 올 것인가? 미쭈에게 그와 만나고 싶냐고 물었다. 미쭈는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두달 전 채씨와의 전화통화가 생각났다. “도와줄 거냐고? 천만에, 나도 피해자야!”(서울중앙병원 서관 62병동 03호실, 홍보과 문의: 02-2224-3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