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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이야기(10) - 1부 창덕궁의 15년 8편: 일제강점기 조선 마지막 왕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9. '궁내부'에서 '이왕직'으로
   한일병합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이루어지고 나서 조선 전체가 여전히 평온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덕궁(당시 고종은 덕수궁, 순종은 창덕궁에 살았음) 역시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별천지가 되었다. 왕 전하(순종)는 번잡한 정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제 폐하"의 칭호는 '왕 전하'라는 칭호로 바뀌었고(한일병합 후 일본은 순종에게 이왕李王이라는 칭호를 내려줌), 주권자의  존엄을 의미하는 인정전의 옥좌는 폐기되었으며, 황제의 위용을 보여주는 의장은 중지 되었다. 또한 한국 궁중의 사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는 일본 궁내성 소속의 한 부국인 이왕직으로 개편되었으며, 궁내부 대신은 이왕직 장관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짐'이라는 말은 이제 완전히 궁중에서 사라졌다. 왕 전하는 이에 대해서 전혀 불만이 없으셨으며 그동안의 허명허영으로 가득한 인생에서 벗어나 평안하게 지내고 계셨다.

크기변환_DSCN0036.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10) - 1부 창덕궁의 15년 8편: 일제강점기 조선 마지막 왕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악도와 옥좌가 폐기되고 그냥 의자와 탁자만 덩그러니 놓인 당시 인정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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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정전 옥좌는 일본이 바꾸기 전 모습으로 되어있음

   다만, 근친이나 귀족과 같은 옛 신하들은 전하의 대한 충심과 오랫동안 신하로서 사용해온 궁중 용어가 한꺼번에 폐지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여전히 내전에 들어 전하 앞에 나아갔을 때 '폐하'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무단정치를 행한 데라우치 총독도 매우 관대하였다. 단지 공문이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내전에서의 '폐하' 존칭 사용을 허락한다는 따뜻한 인정미를 보이고 엄숙한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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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를 방문한 순종(왼쪽에서 두번째)

   왕 전하의 당시 생활 모습은 매우 여유로웠고 어떠한 번잡한 고민도 없었으며 운명에 만족하시는 듯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 덕수궁에 사자를 보내어 아바마마(고종)께 문안을 드리셨고, 월 1회 정도 직접 방문하시어 식탁에 둘러앉아 부자의 정을 나누셨다. 정기적으로 종묘의 제사를 모셨고 때때로 성밖에 있는 역대 왕릉을 성묘하시는 일 외에 궁문 밖으로 나오시는 경우는 3대 축일에 천화 폐하에게 드릴 축사를 의뢰하기 위해 남산에 있는 총독관저를 방문하시는 정도였다. 다만 기분전환으로 매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인정전 동행각의 공놀이(찾아보니 이 공놀이가 바로 당구였다ㄷㄷ) 장소에 납시어 직접 시도해보시다가 근시하는 사람들에게 경기를 벌이게 하시어 그 승패를 재미있게 지켜보셨다. 또한 봄과 가을에 창덕궁 후원의 꽃과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 무렵에는 상궁들을 이끌고 행차하시어 산책을 하셨으며, 식물원이나 동물원을 둘러보시면서 대자연의 풍광을 바라보고 귀여운 새소리를 들으시며 즐거워하셨다.

옥돌실.PN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10) - 1부 창덕궁의 15년 8편: 일제강점기 조선 마지막 왕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1912년 3월 1일자 신문에 실린 순종이 당구치던 옥돌실(당시엔 당구를 옥돌이라고 불렀음) 사진. 두개의 당구대가 보임

   그리고 왕 전하께서는 매주 목요일에 근친 귀족, 옛 신하들과 더불어 이왕직 직원 10여 명씩을 차례로 부르시어 오찬을 함께 하시며 사심 없는 환담을 나누시는 일로 적막함을 달래셨다. 또 그리운 옛 신하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개최하셨는데, 그때 나누는 환담의 화제는 대부분 옛날 양반의 재미있는 이야기나 일본의 산수풍경, 사회적 사건들이었다. 이야기 사이에 일본 원로대신 같은 인물들에 대한 평이나 풍자가 나오기도 하였지만 정치문제를 직접적으로 화제로 삼지는 않았는데, 이는 전하가 담소 중에도 용의주도하게 배려를 하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