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두의 범죄일지**김대두의 살인릴레이는 75년 8월 12일 새벽 전남 광산군
임곡면 고룡리 한 외딴집에서 시작됐다.
김대두는 이날 밤 12시께 안모(62)씨 집에 잠입한 뒤
새벽 3시께 안씨 집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잠에서 깬 안씨가 도망가자 이를 살해하고 안씨의 부인
박모(58)씨에게 중상을 입힌다.
김대두가 55일 후인 10월 8일 서울에서 검거될 때까지
전남과 서울·경기를 오가며 저지른 9차례
(17명 살해, 3명 중상, 3명 강간)
에 걸친 살인질주의 시작이었다.
첫 범행 뒤 목포로 간 김대두는 순천행 기차를 탄다.
여기서 우연히 수원교도소 한 감방에 있었던 교도소 동기
김회운을 만났다. 둘은 무안군 몽탄역에서 내린 뒤 철길을
따라 가며 범행장소를 물색했다.
9월 7일 새벽 2시께 몽탄면 당호리 박모(55)씨의 집에 침입,
돈을 요구했다. 거절당하자 박씨와 부인 서모(56)씨,
손자(6)를 살해한다. 여기서 강취한 돈은 단돈 250원.
둘은 “이왕 죄를 지을 바에는 돈이 많은 서울에서 하자”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서울역에 도착한 뒤 둘은 일단
헤어진다. 이후 범행은 김대두 단독으로 이뤄진다.
제3범행, 9월 11일 서울시 면목4동 용마산 중턱에서
최모(60)씨 살해.
제4범행, 9월 24일 수원시 송탄읍 양모(40)씨 집에 침입,
양씨의 어머니 최모(70) 할머니, 다섯살과 여덟살난 손자 둘,
손녀(11) 등 4명 살해 고추 15근 탈취
제5범행, 9월 27일 경기도 양주군 변모(50)씨 집 습격,
변씨와 부인 손모(40), 아들(3) 살해, 장녀(15) 등 2명 중상,
2만1천원 탈취
제6범행, 9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양모씨의 부인 윤모(28),
생후 3개월 여자어린이 살해, 1천500원 탈취
제7범행, 10월 2일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 칫골산 근처 독립
가옥 침입, 노모(38)씨와 부인 김모(37)씨 살해
제8범행, 10월 3일 경기도 성남시 낙생동 남서울 컨트리
클럽 근처 야산에서 캐디 이모(21)양 강간, 1천450원 탈취
제9범행, 10월 7일 서울 우이동 교도소 감방 동기 이씨 살해.
김대두가 전남과 서울·경기도 일대를 휩쓸고 다니던 약 두달
동안 전국은 살인 공포에 휩싸였다. 주로 외딴집이나 노약자,
어린이들을 범행의 목표로 했다. 17명의 목숨을 앗아 빼앗은
돈은 모두 2만6천800원에 불과했다.
김대두는 82년 4월 경남 의령경찰서 궁유지서 우범곤 순경이
인근 5개마을 주민 56명을 하루사이에 살해한 소위
`우순경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기록적인 수치를 남겼다.
김대두 사건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던 1975년 10월 말.
변호사 이상혁(당시 39세)은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주인공은 서울 법대 1년 후배이자 사시 동기인
심훈종 부장판사. 심 부장은 “골치아픈 일이 생겼다.
연쇄살인범 김대두 재판을 맡았는데 응답을 하지 않고 있다.
국선변호인이 돼 재판진행을 도와달라”고 부탁해왔다.
심부장은 김대두 담당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 8부의
주심이었다. 1967년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이상혁은 72년부터 구치소 교화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심 부장은 이 변호사와의 인연과 그가 교화위원이란 점을
감안해 어려운(?) 부탁을 해온 것이다.
이 변호사는 김대두에 대한 국선변호를 승낙한다.
이상혁은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난 김대두에 대해
“깡마르고 새까맣고 못생긴 얼굴이었다”고 회고했다.
김대두의 말에서는 아직 독기가 흘렀다.
이상혁의 회고.
“첫 접견 때 그는 `당신 검찰의 앞잡이지. 적당히 재판해서
나를 사형시켜 버리려는 것 아닌가''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부의 불평등, 사회적 차별에 대한 분노를 욕설을 섞어 거칠게
표현했다. `있는 놈들은 배불리 먹고 우리같은 사람들은
무관심이다''고 쏟았다. 이런 자를 변호해야 하느냐는 생각도
들었으나 꾸준히 접견을 신청했다.
이상혁은 모두 다섯번 김대두를 접견했다. 국선변호인이
사형이 분명한 피고를 여러번 만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상혁은 세상사의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그를 달랬다.
틀림없이 사형구형되겠지만 무기로 감형되도록 모든 노력을
하겠다라고 했다. 김대두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에는 그가 이 변호사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우리사회는 바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상혁은 이런 말도 했다.
네 이름 대두는 큰 대(大)에 말 두(斗)인데 결국 `큰 사람''이란
뜻 아닌가. 사형을 받아 죽을 몸이고, 인격체로서의 시간은
짧게 남아있지만 유용하게 크게 살아라. 그 길만이 인간다운
모습 되찾는 것이고 피해자에게 회개하는 길이다.
이상혁이 재판을 맡는 한편, 종교교화는 김수진 목사에게,
개인교화는 김혜원이란 여성에게 맡겼다.
재판은 진행됐다. 혐의가 뚜렷했기 때문에 쟁점도 없었다.
75년 11월 17일 오혁진 검사는 김대두와 공범 김모에게
강도살인 등을 적용, 사형을 구형했다.
1심 선고도 마찬가지였다. 이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을 통해
“남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불빛은 많은데 내것은 없었다''
는 피고인의 한탄은 바로 집단에의 귀속의식이 충족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사형제도 폐지론의 조류에 따라 실증적인
하나의 연구로서 피고인을 무기로 감형시켜 달라”고 말했다.
김대두는 항소했다. 이 변호사는 김대두는 평소 무기감형은
원치도 않고 죽은걸로 여기고 담담하게 가겠다고 말해왔다.
그가 항소한 것은 공범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항소심인 서울고법 제3형사부(재판장 김병연 부장판사)도
김대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공범 김모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범행에 가담했다”며 무기로 감형했다.
76년 3월 18일. 김대두의 항소심 판결이 내려진 날이다.
김대두는 상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날 판결로 사형이 확정됐다.
이날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울구치소 접견실.
가죽수갑을 찬 김대두와 40대초 여성의 첫만남이 이뤄졌다.
이 여성은 김대두의 교화위원인 김혜원(당시 40세).
김혜원은 구례출신으로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나온자이다.
당시에는 수도여고 교사를 그만둔 뒤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김대두의 마지막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사람이다.
김혜원은 가냘프고도 작은 체구였다. 수줍은 듯 미소를
짓자 그의 가느다란 눈이 눈꺼풀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첫 만남을 말했다.
김혜원과 김대두와의 인연은 75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만남 3개월 전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혜원이 먼저
신앙을 권하는 편지를 썼다. 김대두도 이에 답해 편지를 보냈다.
김혜원의 회고.
우리 둘은 우선 기도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렵고 흉악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만나보니 순진하고 순박해 보였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였기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단 벌레만도 못한 나를 무엇하러 찾아오느냐는
말만 기억난다.
이후 김혜원은 한달에 두번씩 김대두를 찾았다.
김혜원의 기억에 김대두의 가족 중 면회를 온 경우는 어머니뿐.
김대두는 면회온 어머니에게 다시는 면회오지 마라.
고향의 사모님이 잘 돌봐주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해를 마감하는 76년 12월 28일 김혜원은 서울구치소로
부터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다.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김혜원은 결국 그날
구치소로 가지 못했다.
“그때 마지막 길을 보지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된다.”
김혜원의 술회다.
김대두는 바로 이날 사형당했다.
그는 김수진 목사를 통해 유언을 남겼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의 전과자들을.
따뜻히 대해주셔서 갱생의 길을 넓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알라주시기 바랍니다.
교도소에서 초범자와 전과자는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