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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을 도끼로 죽인 한국 범죄자 (1편)

[실화,소름] 17명을 도끼로 죽인 한국 범죄자 (1편)
1975년 10월 8일 오전 9시, 서울 청량리 경찰서 강력반

홍인수(가명·당시 34세) 순경은 전날 밤 당직자로부터 한통의

제보를 인계받았다. 청량리서 역전파출소에 제보된 신고는

`한 청년이 세탁소에 피묻은 옷을 맡기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강력반의 홍인수는 제보를 받자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이보다 30분 전인 오전 8시 30분께. 20대 중반의 깡마른

청년이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광명세탁소(주인 하모씨)의

문을 열었다. 청년은 가게를 지키고 있던 주인 하씨의 어머니

진모(당시 50세)씨에게 입고 있던 블루진 상하의를 세탁해

달라고 했다.

진씨는 “입은 옷을 세탁하면 뭘 입고 다니냐”고 물었다.

청년은 “날씨가 추워 속에 옷을 한벌 더 입었다”며 옷을 벗었다.

청년은 “친구와 싸우다 코피를 흘려 피가 묻었다”고 둘러댔다.

세탁소 주인 하씨는 직감적으로 수상한 생각이 들었다.

코피를 흘렸는데 하의에 피가 묻었고 별로 춥지도 않은데

안에 바지를 두겹으로 껴입었다는 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수상한 세탁물을 신고하라는 경찰의 당부도 떠올랐다.

하씨는 바로 옆 청량리경찰서 역전파출소로 뛰었다.

홍인수는 세탁소 안에 들어가 잠복했다. 청년은 오후 2시께

옷을 찾으러 오겠다고 말했으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홍인수는 “당시 성동서 관내에서 전당포 강도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세탁소에 수상한 세탁물을 신고해달라고 했으나

그 청바지는 무릎 부분에 피가 한방울정도 묻어있는 상태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안이었다”고 회고했다.

청년은 오후 4시를 훌쩍 넘겨서야 세탁소를 찾았다.

홍인수는 “왜 피를 흘렸는가”라며 청년을 다그쳤다.

청년은 “사촌누나의 동생과 싸웠다”고 둘러댔다.

그를 앞세우고 미아리 판자촌의 사촌누나 집을 찾았다.

그러나 사촌누나는 “싸우지 않았다”고 상반된 진술을 했다.

청년은 말을 바꿨다. 이번에는 미아리 뒷골목에서 동네

불량배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홍인수는 청년을 데리고 미아리

3거리일대를 뒤졌으나 목격자도 싸운 흔적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어스름이 찾아왔다.

청년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데 그가 느닷없이 어제 저녁부터

세끼를 굶었다.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그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에 배갈 한병을 비웠다. 배를 채우고 담배를 맛있게

핀 그가 갑자기 `사실은 한놈을 깠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깠다''는 말은 `죽였다''는 말의 은어가 아닌가.

살인범이라고는 생각도 않았던 그 입에서 나온 말에 놀랐다.

그렇더라도 그가 서울과 경기도 일대를 공포로 몰아갔던

연쇄살인범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홍인수는 청년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청년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청량리서에 연행된 청년은 때리면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털어놓은 첫번째 범행은 바로 전날 서울 우이동에서

저지른 마지막 범죄였다.

경찰서 강력반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이동 야산의 현장으로

수사팀이 급파됐고, 청년의 얼굴이 일대 연쇄살인사건의

몽타주와 비슷하다는 점이 포착됐다.

그는 바로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당시 26세)였다.

수사는 서울시경 강력계로 넘어가고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로 수사팀이 짜졌다.

다시 홍인수의 회고.

“김대두는 키가 160㎝가 채못되고 삐쩍 마른 작은 체구였다.

김대두를 연쇄살인범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김대두''인 줄 알았다면 같이 밥먹고 몇시간을 함께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사실 오싹하다.

조사할 당시 `왜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였나''라고 물어보니

`몸이 약해 내가 먼저 죽이기 전에는 당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대답했었다.”

홍인수와 김대두는 한차례 더 만난다. 김대두의 신병이 서울

시경으로 넘어간 뒤 김대두는 남대문서 유치장에 보호된다.

홍인수는 “남대문서에 찾아갔을 때 유치장에서 제일 큰 방에

김대두가 누워 있었는데 함께 있던 수감자들이 그에게 안마를

해주고 상전으로 모시고있었다”고 말했다.

홍인수는 김대두 체포로 일계급 특진했다. 김대두가 검거된

10월 8일 밤 박경원 내무장관이 직접 청량리서를 방문했다.

다음날 국회에서 경기지역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추궁이 있을

예정인 상황에서의 터진 김대두 검거의 낭보인 만큼 경찰은

축제분위기에 빠졌다. 경찰에 모든 것을 털어놓은 김대두는

사회에 대해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에 나온 김대두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교도소에 있다가 사회에 나오니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운 기술도 없을 뿐 아니라 장사할 돈도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냉대를 했다. 그럴수록 남보다

끗발나게 살고 싶어서 일을 저질렀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젖먹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았다. 처음 전남 광산서 살인하고 나니

그후로는 사람 죽이는 일이 두렵지 않았으며 내 깡이 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대두에 대한 현장검증은 그의 첫번째 범행지역인 전남

광산을 시작으로 10월 10일부터 시작됐다.

그는 현장검증에서도 `빨리 끝내자''며 신경질을 내거나 히죽

웃고 껌까지 씹어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김대두의 고향은 전남 영암이다. 그가 저지른 초기 범행 두건이

전남 광산과 무안에서 일어났고 전남에서만 4명이 살해됐다.

전라도 사람들은 그의 살인행각으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했다.

호남푸대접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김대두의 범행은 그들의

자존심을 구겨지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지금도 그는 살인마의 전형으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