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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춘석 저작권수입은 얼마?



'히트곡 제조기' 고(故) 박춘석 씨가 남긴 곡들의 저작권을 동생인 금석 씨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원로 작곡가들의 저작권료 수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박씨는 2천700여 곡을 남겼지만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이하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은 1천600여 곡이다.

   복수의 저작권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박씨처럼 히트곡이 많은 원로 작곡가는 월 700만원에서 약 1천만원까지 저작권료를 분배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과거의 히트곡을 갖고 있지만 곡 수가 적은 원로 작곡가는 월 저작권료가 200만-300만원 수준이다.

   현재 젊은 세대를 상대로 히트곡들을 내는 정상급 작곡가가 연간 10억원 안팎의 저작권료를 받는 점에 비춰 상대적으로는 적은 편이다.
이는 대중가요 시장이 아이돌 그룹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형성돼있는 만큼 저작권료가 징수되는 인터넷 다운로드나 방송 등 횟수에서 과거의 노래는 자연스럽게 최신곡들에 밀리기 때문이다.
또 옛 노래들의 저작권 수입이 주로 발생하는 노래방, 단란주점 등에서도 옛 노래가 최신곡들에 밀리기는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 지난해 9월 노래 반주기의 저작권료 징수 시스템이 종전 수작업에서 젊은 층이 밀집된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인터넷 노래반주기의 온라인 자료 수집 방식으로 바뀌면서 원로 작곡가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받는 저작권 수입만을 단순 비교해 원로 작곡가의 저작권 수입이 요즘 젊은 작곡가에 한참 밀린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현행 법에서 저작권은 사후 50년이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70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따라서,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불리는 노래를 만든 작곡가가 창출하는 저작권 수입은 몇년 반짝하고 마는 신세대 댄스곡을 만든 젊은 작곡가의 저작권 수입을 훌쩍 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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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남진 "지금의 우릴 만들어주신 분"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 있도록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14일 뇌졸중으로 투병하던 원로 작곡가 박춘석씨의 별세 소식에 그의 사단으로 불리던 가수 모두 이렇게 입을 모았다.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남진,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등 그의 노래를 부른 당대의 가수들이 차례차례 조문을 다녀갔다. 그러나 박씨의 명성에 비해 빈소는 띄엄띄엄 조문객이 다녀갈 정도로 썰렁한 분위기였다.
 


이날 오후 패티김은 빈소로 들어서면서부터 오열했다. 조문을 한 뒤에도 유가족과 손을 맞잡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1950년대 말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은 1959년 박씨가 만든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로 유명해졌고 이어 1962년 박씨의 곡 '초우'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 박씨는 '못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시나무새', '사랑은 생명의 꽃', '내 사랑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등 시적인 가사가 담긴 클래식한 곡을 패티김에게 만들어줬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인터뷰를 한 패티김은 "내가 노래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를 찾아오신 것이 1959년, 선생님 곡을 처음 받은 것이 1962년 '초우'"라며 "선생님은 나의 스승이자 오라버니였고 친한 친구였다. 내가 죽는 날까지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이라며 말했다.

   이어 "선생님이 쓰러지신 이후 매년 자택을 찾았는데, 내가 '초우', '못잊어' 등의 노래를 불러드리면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며 "작년 가을에 뵌 게 마지막인데 내 손을 꼭 잡고 자꾸 우시더라. 너무 오랫동안 고생하신 모습을 봤기 때문에 슬프다. 하지만 이제 고생 안 하시고 정말 편안히 쉬시길 바란다"고 울먹였다.



1966년 지구레코드에서 박씨를 처음 만났다는 남진은 이후 박씨가 만든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목화 아가씨', '우수', '빈잔', '너와 나', '지금 그 사람' 등 곡 다수를 노래했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에도 최고의 작곡가이셨던 선생님의 명성을 듣고 지구레코드레 들어갔다"며 "내 히트곡의 70-80%가 선생님의 곡이기에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박시춘 선생님에 이어 우리 가요사의 명맥을 이어온 핵"이라고 말했다.

   이어 "외적으로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내가 녹음실에서 충실하지 않을 때 엄하게 혼낼 정도로 내적으로 강한 분이셨다"며 "원래 체력과 정신이 강한 분인데 너무 자신을 믿으셨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11살 때 백영호씨가 쓴 영화주제가를 녹음하는 곳에서 박씨를 처음 만났다는 하춘화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때 '조금만 더 커서 나랑 노래하자'고 말씀하신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이어 "17살 때인 1972년 선생님과 노래 작업을 시작해 '연포 아가씨', '하동포구 아가씨', '호반에서 만난 사람', '숙녀 초년생', '알고 계세요', '약속 시간' 등 많은 곡을 히트시켰다"며 "1991년 나의 30주년 공연에서 선생님이 지휘자로 서신 게 함께 한 마지막 무대였다"고 덧붙였다.

   또 "클래식을 전공하신 분으로 한국 가요계의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분"이라며 "히트곡만 1천곡이나 될 정도로 한국 전통 가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셨다. 오랜 시간 투병하셨지만 숨 쉬고 계신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됐는데 허탈하고 허전하다. 가요계의 큰 손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더불어 1970년대 초 '별은 멀어도'가 담긴 음반 한 장을 박씨와 함께 작업했다는 정훈희는 "선생님은 클래식과 재즈를 전통 가요에 접목해 전통 가요 분야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끈 분"이라고 말했다.

   박씨의 장례는 한국가요작가협회장으로 5일장으로 치러지며, 가수 남진, 한국가요작가협회 김병환 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신상호 회장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는다. 발인은 18일 오전 8시이며, 장지는 경기도 성남 모란공원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