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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먼저 1부에서 옮겨볼 책 이름은 대한제국 황실비사(곤도 시로스케 지음이언숙 옮김)야. 1907년부터 1920년까지 15년간의 궁중생활을 통해 순종과 인연을 갖게 된 저자가 순종 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며 1926년에 조선신문에 연재했던 회고록을 정리해 출간한 것을 다시 번역한 책이지

곤도시로스케.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창덕궁의 15년 저자 곤도 시로스케
저자인 곤도 시로스케(權藤 四郞介)는 본인이 대한제국 궁내부를 보좌하기 위해 등용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본이 파견한 황실 감시자라고 할 수 있어그는 1875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사무관으로 특채되어 황실재산을 조사 정리황제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궁내부에 들어간 것이라고 옮긴이들이 서문에서 말하고 있지. 나중엔 그 외에 거의 황실의 모든 부서를 한번씩 맡아보면서 황실 사정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고 나와있어.

 인정전.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대한제국 시대 창덕궁
   창덕궁으로 취직했을 때 대한제국은 이미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았기고 1906년, 통감부로부터 내정을 좌지우지 당하면서 망한 나라와 다를게 없어진 상태로 큰 변화와 시련의 시기를 맞고 있었음이 책은 당시 대한제국 황실을 둘러싼 알력,친일파들 행적과 이미 갇혀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생활을 하는 고종과 순종이 느꼈을 고립감, 다른 황실 가족의 생활과 고심을 15년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관찰의 결과물이지만..

조선황실가족사진.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황실 가족사진-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 순정효황후 윤씨, 덕혜옹주
   곤도 시로스케는 이런 사건들의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일본인 현장실무자였기 때문에 본인조차도 책에 이밖에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있으나 조선의 현황과 내 입장을 고려해서 모든 사실을 공개할 수 없는 여건이므로 이 정도에서 붓을 놓았다라고 적었지. 그 때문인지 창덕궁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순종과 그 주변 조선인들의 반응이나 저항에 대해 이 책에서의 언급은 거의 없어어쩌면 있어도 안 적었거나 적을 수가 없었겠지만..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들처럼 곤도 시로스케의 글에는 문명개화한 일본이 구태의연하며 옛 관습에 젖어 어떻게 손써볼 수 없게 된 조선을 구원하여야 한다는일본만이 조선의 구원자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려있어. 또한 조선민중과 황실의 안전을 위해 한일합병은 최고의 선택네?뭐라구요?이라고 믿었을거고 자기 책에서도 선전하고 있지물론 이 글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이런 인식은 지금도 일본에특히 혐한좆밥인걸간신히인간꼴만들어줬더니감히대일본에게기어올라?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어이렇듯1부 창덕궁 15년은 철저히 당시 일본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어.  그럼 이제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을 옮겨볼게. 

1. 궁에 들어가다
   1907즉 한국의 융희 원년에 왕 전하(순종)가 황위에 오르시자 우리나라(일본)와 새로운 협약을 체결하여 통감부가 설치되었고이토 히로부미 공작이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황제를 보좌하면서 궁중과 부중을 통해 정치 전반에 걸쳐 개혁을 실시하였다.당시 조선은 궁정이 정치와 외교의 중심이었으며 왕궁엔 심지어 익명의 책사가 외국 사신이나 선교사 혹은 안팎의 부랑자 무리들과 내통하는 경우도 있었다그로 인해 왕실의 존엄은 상처를 입어 군왕의 질서가 지켜지지 않았다.퍽이나
  
   총명한 통감 이토 공작은 이에 즉각 눈을 돌려 한국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왕궁 내 숙청작업을 단행해 궁정의 신성함을 지키고 궁중과 부중의 구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통감부의 자신이 오랬동안 큰 재목으로 신임해온 참여관 고미야 사보마쓰를 궁내부 차관에 임명하여 자신만의 궁정정치를 전개하였다당시 내 친구인 이노우에 마사지가 이토 공작과의 친분으로 궁내부 서기관이 되어 고미야 차관을 보좌하였으며 나 역시 이노우에의 추천으로 함께 일본제국의 조선통치에 공헌할 것을 맹세하고한일협약에 따라 통감의 추천과 황제 임명이라는 형식으로 궁내부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2. 왕세자의 도쿄유학
   내가 궁내부로 들어가 제일 처음 담당하게 된 업무는 왕세자 전하(순종의 동생 영친왕 이은)의 도쿄 유학과 관련된 것이었다당시 전하께서는 당대의 고명한 유학자와 영국인 조리 여사와 함께 공부를 하시던 중이었다그러던 중에 태자의 덕기를 더욱 키우기 위한 도쿄 유학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정관헌영친왕.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영친왕의 어린시절 모습
   당시 궁중은 완고하고 고루한 공기가 지배적이어서 아직 현대문화의 빛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며 왕세자가 아직 어려 상궁들의 손이 필요한 때였기에 유학 건의가 나오자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그러나 태왕 전하(고종)와 왕 전하(순종)께서는 우려하는 목소리를 물리치고 이토 공작의 정성과 배려를 믿고 왕세자를 맡기기로 결심하셨다이렇게 유학 안건이 의결되어 백발의 노 정치가들이 보령 열한 살의 왕세자를 보필하는 가운데마침내 1907년 12월 5일 왕세자 일행은 도쿄로 출발하셨고 함께 유학할 명문가 자제들 몇 명이 경성에서부터 동행하였다메이지 천황과 황후 폐하 두 분도 깊고 자애로운 온정을 베푸셨는데친히 위안의 말씀을 전하시며 더할 수 없는 대접을 해주셨다.
   그런 가운데 일본 궁내성은 전하가 유학하시는 동안 머무실 임시 궁으로 살 저택을 매입하였는데 이때 참으로 황송한 일이 있었다저택의 매입을 마무리 짓고 내부 수리도 모두 마치자 이를 폐하께 아뢰었다그러자 폐하(메이지 덴노)께서는 이렇게 분부하셨다준공은 되었지만 사람이 살기에 쾌적한가? 먼저 누가 그 집에 머물러 보고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도록 하라."쓸때없이지나친배려
   당시 궁내 서기관으로 사무 담당이었던 구리하나 고타가 여러 건물 안에서 3일을 머물러 보고 문제가 없다고 아뢰자 폐하께서는 비로소 반족하시었다 이렇게 하여 왕세자 전하는 별궁에서 이곳으로 옮겨오실 수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당시 이왕가(대한제국 황실)에서는 폐하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이토 공작은 재임 중에 어느 지역을 가든 항상 왕세자 전하를 함께 모시고 가서 전하의 수양에 도움을 주었다.

영친왕이토-7981.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그렇게 지나간 세월이 20년, 오늘날 왕세자 전하가 이처럼 큰그릇으로 성장하실 수 있었던 건 당시 왕 전하께서 유학을 허락하는 결단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이토 공작 역시 이왕가가 걸고 있는 기대감과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지극 정성의 일념으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왕세자 전하에게 변함없는 정성을 쏟았다. (다음편에 계속)   

Crown_Prince_Yoshihito_and_Crown_Prince_Lee_Eun_1907.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3) - 1부 창덕궁의 15년 1편: 조선왕궁에 취직한 일본인
일본 요시히토 황태자(왼쪽)의 조선 방문, 역사 상 일본 황태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 방문이었다, 가운데가 영친왕

   사실 영친왕은 유학이란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것이나 다름없어. 고종은 늙그막에 얻은 아들에게 큰 정을 쏟았고 첫째 아들 순종에게 아들이 없었던 탓에 둘째의친왕을거르고황태자로 삼았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에 영친왕을 붙잡아둠으로서 고종을 통제하려고 했고 계획적으로 유학 1년 전부터 덕수궁에서 아버지 고종과 함께 살던 의친왕을 떼어내 창덕궁으로 옮기고 갑자기 일본 황태자를 대한제국을 방문하게 한 뒤 그 '답례'를 위해 영친왕이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고종에게 강요했지. 실제로 고종은 왜 굳이 멀리 일본에서 공부를 시켜야 하냐고 못마땅해했고 영친왕의 어머니인 엄황귀비는 인질로 잡아가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해. 이토는 매년 여름방학 때 반드시 한번씩 귀국하게 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유학을 성공시킬 수 있었지. 고종은 아들 영친왕과 헤어지는 날,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걱정은 먼저 시작하고, 천하의 낙은 나중에 즐긴다'는 뜻의 글귀와 함께 때를 기다리라는 의미로 참을 인(忍)자를 직접 써주었다고 해. 겉으로나마 대한제국 황실들 대우해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식민지 통치가 쉽지 않다는 걸 일본정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일본 황실에서도 영친왕에게 상당히 정성을 쏟았다고 해. 특히 당시 메이지 덴노(일왕/천황)는 대인기피증 비슷한게 있어서인지 ≪명치천황기≫에는 친손자 히로히토가 할아버지를 배알했다는 기록이 겨우 세번 등장한데 비해 영친왕에게는 '쓸쓸할 때는 언제든지 궁성으로 오라'고 하고 실제로 영친왕도 자주 드나들었다는만큼혹시손자보다더맘에들었나 나름대로 애정을 베풀었다고도 할 수 있어. "그들의 속셈이 어떻든 간에 자기에 대한 호의만큼은 항상 고맙게 생각해 왔다는게 사실"이라고 영친왕 주변인들이 증언한 만큼 어쨌든 영친왕도 개인적으론 메이지 덴노 부부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