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창경원 파티와 모닝코트
이토 공작이 궁정의 존엄을 유지하여 국왕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궁전의 조영과 박물관, 식물원,동물원(창경궁을 개발살내고)을 신설할 것을 진언하였고 이 진언을 들은 이왕 전하(순종)는 크게 만족하시며 이를 허락하셨다. 마침내 박물관과 식물원도 준공을 보게 되었고 창경원 일부도 완성되었으므로, 민병석 궁내 대신은 왕 전하의 뜻을 받을 어 1000여명의 내외 귀빈을 초대하여 개원식을 겸한 원유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왕 전하께서 어떠한 복장으로 원유회에 참석하셔야 하는지 복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다. 마침 내(저자)가 시종직을 겸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윤덕영 시종원경에게 군복을 입으시는 것은 지나치게 딱딱한 느낌을 주니 모닝코트와 같은 가벼운 정장이 어떻겠느냐고 진언하였다. 윤 시종원경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주저하면서 전하께 말씀드려도 될지 망설였다. 또 이와 같은 일은 궁내 대신이나 차관과 협의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튿날 윤 시종원경은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말하였다.
군복을 입은 순종
이게 바로 모닝코트 역시 백암선생..
“전하께 말씀드리니 매우 만족해하셨다. 궁내 대신과 차관도 모두 찬성하였으니 서둘러 옷을 만들도록 하라.”
원유회는 3일 뒤로 다가와 있었으므로 나는 즉시 양복 전문점인 초지야의 주인에게 그 사정을 전하였다. 한 시간 후에 주인은 재봉사를 데리고 궁으로 왔다. 안내를 받으며 내전으로 들어 전하 가까이 다가가 치수를 쟀다. 그 옆에는 시종들과 상궁들이 있었다, 전하께서는 웃으시면서 나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곤도, 이제 나도 하이칼라가 되는 건가?”
그렇게 농담을 하시며 참으로 소탈한 표정을 지으셨다.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은 순종
군주가 각종 행사 때 입었던 옷, 아마 원래는 양복 대신에 이 옷을 입었어야 했을것으로 추측...
드디어 원유회 날이 밝았다. 전하는 쥐색 중절모에 새로 재봉한 모닝코트의 가벼운 정장 그리고 시부사와 자작이 헌상한 순금 장식이 달린 가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근시백관을 거느리고 도열해 있는 내빈들을 지나면서 인사를 받았다. 일부 옛 양반들은 이 모습에 놀라 제왕의 위엄을 훼손하는 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역시 전하가 옛 관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시대 흐름에 따르고자 하시는 노력으로 보아야 한다.
일제시대 창경원(창경궁)의 앞
유교문화권에서 옷차림은 실용성 이상으로 상징성에 큰 의미가 있었어. 만약 신분에 따른 의관을 잃어버리면 그 신분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해. 통감부는 왕의 궁궐을 일반인에게 공개해 궁궐의 신성함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순종 황제의 의관을 바꿈으로서 거기에 깃들어 있는 신성한 상징성을 훼손하려고 했다고 해. 순종의 황후인 순정효황후를 모셨던 김명길 상궁의 회고록 ≪낙선재 주변≫에선 이렇게 그날을 이렇게 증언함..
“파티(원유회)를 며칠 앞두고 일본인 재단사가 내전으로 들어오더니 치수를 잰다며 순종의 어신(몸)에 마구 손을 대었다. 우리들은 너무 놀라 멍하니 서 있는데 한 상궁이 나서더니 재단사 앞을 가로막았다. 이 때 순종은 괘념 말고 치수를 재도록 하라고 일렀다. 우리들은 모두 순종 앞에 엎드려 ‘황송하옵니다’를 연발할 뿐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원유회 날 순종이 쥐색 중절모에 모닝코트를 입고 나타나자 몇몇 양반 지사들은 분함을 참지 못해 원유회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마지못해 모닝코트를 입고 참석하시긴 했지만 역시 순종은 보수적인 분이었다. 고종이 승하하고 인산 때 한 황족이 프록코트 차림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자 아무 말도 없이 돌아앉아 버리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