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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6.한일병합(경술국치)의 서글픈 어전회의 
   이토 공작의 뒤를 이어 부통감인 소네 고스케 자작이 통감으로 임명되었으나 지병으로 물러나고 이어서 육군 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 백작이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우리 조정의 논의와 국민의 의견은 모두 한일병합의 단행이라는 일치점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조선의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두 나라를 합하여야 한다는 이용구와 송병준 백작이 이끄는 일진회천하의개쌍놈에서 나왔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요원의 불길과도 같이 한반도의 산야를 풍미하였다. 

   데라우치 백작은 기분이 섬뜩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며 가슴 속 깊이 우리 조정에서 논의된 사항을 품고 조용히 안팎의 정세를 살피면서 은밀히 일사불란한 계획을 세웠다. 아카시 모토지로 경무총장에게 명하여 조선 전국에 경비기관을 갖추었으며, 또한 궁중과 정부 혹은 민간 정치단체(일진회 같은 친일매국단체)와 수시로 만나 이면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면서 그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에 병합 협약이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총리 손에 의해 체결되었다.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평화와 영광 속에 국경이 철폐되었고 한국 황제 폐하(순종)는 그 통치권을 우리 천황 폐하(메이지 덴노)에게 양도하셨으며 사방 1만 5000리의 영토와 2000만 민중은 우리 천황의 보살핌 아래 현대 문화의 혜택무슨 혜택 임마 근데 지금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을 받게 되었다. 

군복을 입은 순종.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대한제국 황제 순종

메이지덴노.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일본제국 덴노 메이지 

   당시 궁중의 모습은 매우 평온하고 조용한 가운데, 단 한 차례 어전회의가 열렸을 뿐이었다. 그때 어전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총리 대신 이완용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매국노 트레블 달성!, 내부 대신 박제순, 농상공부 대신 조중응, 탁지부 대신 고영희, 법부 대신 이재곤 외에(학부 대신 이용직은 조약에 반대하여 불참) 당시 왕족을 대표하여 이희 공 전하(고종의 친형), 원로를 대표하여 김윤식, 전하의 측근으로는 궁내 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시종무관 이병무 등이 자리해 있었다.모두 나중에 경술국적 타이틀 획득 왕비의 부친인 해풍부원군 윤택영 후작과 총독부에서 특별히 파연한 고쿠부 쇼타로와 고미야 차관이 어전 회의의 진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동궐도 흥복헌.pn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마지막 어전회의의 현장인 흥복헌(검은 표시 안, 왼편에 큰 건물이 대조전) 
1917년에 불에 타 일본에 의해 당시와는 다른 모습으로 재건되어 지금까지 남아있음 

   어전회의는 오후 2시가 좀 지난 시간에 대조전 흥복헌에서 열렸다. 본래 우리와 같은 사무관은 어전회의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나, 다만 내 경우에는 명령을 받고 내전으로 나아가 국새와 옥새를 보관하고 있는 금고에 이변이 없도록 조용히 감시하라는 특수한 임무에 따라 안쪽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 앞쪽 복도가 대조전으로 가는 통로여서 출입하는 대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긴장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나라의 운명이 여기서 결정되고 마는구나 하는 몹시도 슬픔이 가득 감도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어전회의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왕 전하께서 이완용 총리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원장을 내리셨다. 

이완용.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대한제국측 대표 내각 총리 대신 이완용 

800px-Masatake_Terauchi_2.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일본제국측 대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후에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함) 

   내가 당시 가까이 있던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왕 전하께서 직접 발의 하시고 엄숙하게 이완용 총리에게 병합 단행의 칙명을 내리셨으며 이 총리는 삼가 받들며 단 한마디 ”…예…” 하고 대답하며 명령을 받들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치욕을 당하니 신하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며 한탄하고 분개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자의 말에 의하면 미국이 하와이를 병합한 예를 들며 황제가 폐위당하고 한 나라가 폐망하는 그 말로를 보며 눈물지었다고도 한다. 이에 반해 전하께서는 이미 대세를 달관하신 것인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결단을 내리시고 이를 번복할 의사가 없으셨으므로, 조선 500년의 마지막에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미증유의 이 중대 안건을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한 시간의 어전회의를 통해 결정하신 다음 폐회를 선언하셨고 곧 각 신료들은 내전을 물러났다. 

통감관저.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전권위원장을 받아든 이완용은 곧바로 남산에 있던 통감관저(하얀 건물)로 달려가 데라우치와 조약문에 도장을 찍어버린다

   당일의 창덕궁은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하고 조용하여 특별히 비상경계를 펴지도 않았으며 헌병이나 경관을 늘려 배치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황궁경찰서 안에는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총기 몇 점을 준비 해두었으며 비번인 경관도 모두 궁내 각 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전회의 전후에는 내전 출입을 금하는 정도의 경계를 폈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2시간 정도 지나 해제되었다.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거대한 문제에 직면한 왕궁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로서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어딘지 부족한 감이 들 정도였다.이게 드라마 감상평이라도 되냐.. 

   이보다 앞서,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병합의 대업을 단행할 준비에 고심하던 데라우치 총독은 비밀리에 시종원경인 윤덕영 자작을 불러 우리 조정회의가 결정한 중대방침을 설명하였으며 이왕 및 이태왕 두 분 전하의 양해를 얻어야 하는 모든 일을 그의 수완에 믿고 맡겼다. 윤덕영 자작은 이미 내외 형세가 더 이상 손을 써볼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고 그 대업을 맡기로 승낙하였다.친일파가 되겠단 소리다 그러고는 민병석 궁내 대신 및 왕비 전하의 부친인 윤택영 후작과 함께 약 일주일간 아침저녁으로 왕 전하를 알현해 이치를 따져가면서 성심을 다하고 열성을 피력하면서 일주일 동안 매일 찾아가 들들 볶았단 얘기다 왕가 백년의 안위를 위해 결단을 내려주시길 촉구하였고 협약을 골자인 왕가의 지위, 종친 및 공신의 대우, 백성의 혜택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뜻을 말씀드리며 사전에 심심한 양해를 청하였다. 따라서 사직과 백성의 안녕을 유지하려면 협약을 원만하게 성립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이미 깨닫고 계셨던 왕 전하께서는 이 자리에서도 의연하게 칙명을 내리셨던 것이다. 

통감관저 터.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한일병합강제조약이 체결되었던 통감관저가 있었던 터 
그동안 아무런 표시 하나 없다가 경술국치 100년이 되어서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표석을 세움 

   전하의 총명함과 영단과 일신의 영욕을 뛰어넘은 위대한 희생정신 덕분에 조선의 종묘사직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받들어 모셔질 것이며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이왕가 역시 일본제국의 국운원자폭탄과 함께 오래도록 평화와 만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그러나 사실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이루어진 한일병합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도 을사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고종 황제 퇴위 등 몇년에 걸쳐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 온 것을 보아왔던 터라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빠져 울부짖고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다던 을사조약 때와는 달리 한편으론 이미 모든게 끝났다고 체념한 상황 속에서 마치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지나갔다는 분석도 있음. 을사년과 차이로 현직 고위 관료 중에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해. 저자 곤도 시로스케는 한일병합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어. 그렇지만 당장 궁궐 주변에 병력이 없다곤 하지만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부임했을 때 이미 일본은 대한제국으로부터 경찰권을 가져온 상태였어. 그는 조선에 온 즉시 이미 군대까지 해산당한 조선에 일본 헌병 2000여명을 증원시키고 조선의 유력 언론기관을 폐쇄하여 모든 정보를 차단하였어. 한일강제병합조약 10일 정도 전부터 창덕궁 안팎의 철저한 통제를 위해 아카시 모토지로 경무총장이 직접 궁을 순시하고 궁문의 열쇠를 모두 일본인 황궁경찰서장이 보관하도록 바꾸었다고 해.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순종을 강압한 결과 한일합방을 무사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거야. 여기엔 안 나온 야사이지만 어전회의 때 친일파 대신들이 한일병합조약에 옥새를 찍으라고 순종에게 강요하자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맛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고 큰아버지인 윤덕영이 뺏어서 찍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지. 며칠 뒤인 8월 29일은 바로 경술국치 105주기 되는 날인 만큼 우리 모두 이 날 있었던 일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ㅠㅠ 

Empress_Sunjeong_of_the_Korean_Empire.jpg [연재] 대한제국 황실이야기(7) - 1부 창덕궁의 15년 5편: 8월 29일 한일강제병합 그 날의 풍경
순정효황후 윤씨